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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깨치려는 그 욕심도 버려라”

기자명 채한기

기본 선원장 지 환 스님


<사진설명>4월 11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열린 '조계종 선원장 초청 대법회'에서 기본 선원장 지환 스님은 '참다운 삶의 행복을 위한 선 수행의 요체'주제로 법문했다. 지환 스님은 이 법석에서 "망념만 놓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며 "매일매일이 좋으려면 수행을 통해 마음씀씀이를 올곧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존께서 도솔천을 떠나기도 전에
이미 가비라 왕국에 태어남이요.
마야부인 태에서 나오기도 전에
중생을 다 제도해 마쳤느니라.

이 도리를 아시겠습니까? 이 도리를 아신다면 오늘 선 법문은 다 마친 것입니다. 입정하는 그 순간 법문이 다 들어있습니다.

신심없는 참선은 테크닉일 뿐

아무리 성능 좋은 컴퓨터도 전원에 콘셋트를 꽂지 않으면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깨달음과 신심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신심은 도의 근원이요, 모든 공덕은 신심에서 나옵니다. 신심이 없으면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참 성품인 이 마음은 본래부터 부처님과 똑같은 것입니다. ‘본래부처’라는 이 말을 믿어야 합니다. 번뇌 망상이 이토록 많은 내가 부처님과 똑같다니 이해가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합니다.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은 참선은 테크닉에 불과합니다. 부처님께서 깨닫고 나서 맨 처음 이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아, 기특하고도 기특하구나.
일체 중생이 여래의 지혜덕상을 다 갖추고 있구나.
분별망상으로 인하여 증득치 못함이로다.

위대한 생명선언입니다. 부처님이 깨닫고 보니 일체중생이 여래의 지혜덕상을 다 갖추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다만 ‘나’가 있다는 착각으로 인해 그 자리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온이 개공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나와 이 세계가 있다는 착각 때문에 한없는 탐욕만 생깁니다.
자성이라는 마음자리도 본래부터 온갖 덕성이 다 갖춰져 있으니 지혜만 열면 됩니다. 이 속에서 참사람의 에너지가 솟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대자비, 대지혜가 원만하게 구족되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본래 부처와 같다는 믿음을 갖지 못하면 초등학생보다 못한 것입니다. 매일 동쪽에서 떠 서쪽으로 지는 해를 본 학생은 해가 움직인 줄 압니다. 그러나 초등학교 입학해서 선생님이 “그게 아니다. 지구가 돌기 때문이다. 이게 진리다.”하면 바로 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움직인다고 믿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은 믿으면서 부처님 말씀은 안 믿으십니까?
여러분, 이 것(컵) 보이십니까?(대중 “예.”) 이 것(주먹) 보입니까?(대중 “예.”) 이 컵을 보는 바로 그 순간, 이 주먹을 보는 순간, 이 소리를 듣는 작용 속에, ‘예’ 하는 작용 속에 완전한 ‘참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흙탕물 속에 맑은 물은 있을까요? 없을까요?(대중 “있습니다.”) 있지요? 흙탕물을 번뇌망상이라고 비유해 봅시다. 흙탕물 속에 ‘수청주’(水淸珠)라는 구슬을 넣으면 맑은 물이 됩니다. 여러분 마음에도 ‘반야’라는 ‘수청주’를 넣으면 맑은 물, 청정법신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탐진치 삼독(三毒)에 빠져 있으면 불행한 것이고, 참마음을 가지면 대자유인 되는 것입니다.
본래부처임을 믿기는 했는데 그래도 번뇌망상은 끊임없이 오지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부처인데 왜 이리 망상이 오는가? 내가 부처인데 지금처럼 살아도 되는 것인가? 그래 나도 수행을 해서 견성하자. 하면 될거야. 이렇게 마음을 내는 것이 발심입니다. 믿음이 강해야 발심도 크게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발심하겠습니까? 나도 부처다! 절대로 건방진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부처님과 똑같이 될까요? 마음을 닦으면(修心)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닦는 것도 올바르게 해야 합니다.
부처되기 위해서는 좌선이 최고인 것은 분명하지만 올바르게 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중생인데 참선을 해서 나중에 부처가 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시는 분 많습니다. 중생과 부처를 이원적으로 나누어 놓고 좌선하는 것은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는 것과 같습니다.

정혜 일치해야 올바른 수행

선정과 반야, 삼매와 지혜 즉 반야의 지혜와 선정의 삼매가 제대로 함께 일치되어야 올바르게 수행하는 겁니다. 좌선이든, 위파사나이든, 염불이든 모든 수행은 정혜가 일치되어야 합니다. 이 소식을 육조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과 혜로서 근본을 삼나니
정과 혜가 다르다 말하지 말라.
정혜는 한몸이고 둘이 아니니
정은 혜의 체요 혜는 정의 작용이라.
정혜는 등불과 불빛과 같나니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느니라.
등불은 빛의 몸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이니
정혜도 이와 같나니라.

정혜일체에 하나가 더 있습니다. 바로 용심(用心)입니다. 참마음의 내용에 맞는 용심을 내어야 합니다. 욕망과 집착에 매달려 남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쓰면 정혜가 일치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화두에 큰 의심이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망념만 놓으면 나날이 좋은날

신심을 바탕으로 발심을 해 화두를 들었는데도 잘 안되지요? 수행을 하다보면 나도 부처라는 것을 믿기는 믿는데 정말 부처가 무엇인지 간절하게 알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식을 찾아가 “스님 부처는 무엇입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런데 “똥이라”한단 말예요. 스승은 절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억 하고 계합하면 마조 도일 스님처럼 열려 버립니다. 바로 계합 안되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부처를 물었는데 ‘똥’이라고 답을 들은 그 순간 그 한마디는 큰 충격으로 옵니다. 아니! 그 고구정녕한 말씀을 하신 분이 똥이라니? 지혜덕상을 다 원만하게 갖춘 분이 ‘똥’이라니? 이런 의심 하나가 나옵니다. 이런 과정에서 의단이 일어나는 겁니다.
화두는 간절하게 집중해서 들어야만 합니다. 성성적적인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큰 불무더기에는 참새고, 나비고, 벌이고 아무 것도 근접하지 못합니다. 성성적적인 상태에서의 화두는 불무더기와 같습니다. 번뇌망상은 근접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루 1시간을 앉아 있어도 간절하게 화두를 들어야 합니다. 이런 수행이 깊다보면 일상에서도 화두는 놓치지 않습니다. 빨래하면서도, 설거지를 하면서도,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화두는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망념만 놓으면 부처라 했습니다. 그러면 매일매일이 좋은날입니다.
화두를 드는 사람은 사람을 참마음의 지혜 위에서 베풀고 사랑하며 한 세상을 삽니다. 너무 빨리 깨치려는 욕심도 버려야 합니다. 계·정·혜 삼학(三學)에 의지해 화두를 들며 인생을 사세요. 그러면 깨달음은 분명히 있습니다.

정리=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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