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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바오지(寶鷄) 법문사(法門寺)

기자명 이재형

탑 복원 위해 목숨 바친
老거사의 비원 담겨

새벽 5시. 이 곳 호텔은 시안(西安)에서 손꼽힐 정도로 크지만 어제 밤 정전이 된 후 아직까지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샤워를 하거나 머리를 감다 정전 사태를 맞은 사람들이 로비에 나와 항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호텔측은 공사 중이니 어쩔 수 없다며 초 한 자루씩 나눠줄 뿐이었다.

짐을 꾸려 밖으로 나왔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호텔 안보다는 환하다. 차는 어둠을 가르며 바오지(寶鷄) 법문사(法門寺)를 향했다. 빠듯한 일정 탓에 실크로드를 향할 때도, 다시 돌아올 때도 들르지 못했던 법문사를 마침내 가게 된 것이다. 1시간 30분 정도 달려 바오지에서 법문사 입구로 접어들 무렵 짙게 깔린 안개 속에서 새악시 볼 같이 붉은 해가 꿈틀거리고 있다. 그 동안 실크로드의 삭막했던 것과는 달리 평화로운 농촌 풍경이다. 다만 우리나라 농촌마다 산이 있는 것과는 달리 탁 트인 모습이 이국적으로 와 닿는다.



1900년 역사의 중국대표 사찰

다시 20여 분을 달려 법문사 입구에 들어섰다.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법문사 입구로 향했다. 법문사라 쓰인 현판이 새겨진 일주문 아래에는 스님 두 분이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아 뭐가 그리 즐거운지 희희낙락하고 있다. 스님이라기보다 오히려 관리 같아 보인다.

일주문을 거쳐 다시 경내로 들어갔다. 사람 키 두 배는 됨직한 탑처럼 생긴 구리 향로가 있고, 바로 앞에는 촛불 하나가 외로이 타고 있다. 대웅보전 앞에는 중국의 여느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회색 승복을 입은 한 스님이 탁자에 앉아 불사금 장부를 뒤적이고 있다. 스님께 합장을 하고 대중보전을 지나니 거대한 첨탑이 마침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아! 그 유명한 법문사 13층 첨탑이다.
중국에 수많은 사찰이 있지만 중국을 대표하는 사찰을 꼽는다면 단연 법문사일 것이다. 비록 일반에 알려진 정도야 소림사를 쫓아갈 수 없겠지만 법문사는 오랜 세월 동안 중국불교의 중심으로 자리매김 해왔다.

법문사가 세워진 것은 148년이지만 그 연원은 아쇼카대왕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부왕의 신임을 받지 못했던 왕자 아쇼카는 101명의 형제 중 99명을 살해하며 왕좌를 차지했다. 이후 대제국을 세운 그는 수많은 살생에 대해 참회하고 불교에 귀의했다.


<사진설명>1987년 법문사 보탑 복원 공사중 지하궁전이 발견돼 세계를 깜짝놀라게 했다. 그 곳에서는 황금으로 만든 봉진신보살(捧眞身菩薩) 〈맨 위〉, 보찰단담동탑(保刹單擔銅塔) 〈가운데〉, 부처님 손가락 사리〈맨 아래〉 등 수많은 진귀한 보물들이 발견됐다.

그리고 제3차 결집을 후원하는 동시에 파미르고원 너머 중국 땅에 석리방(釋利房) 등 18명의 스님을 보냈다. 이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 19과를 갖고 그 험난한 길을 넘어 중국에 당도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불법을 전하기란 역부족이었다. 이들은 먼 훗날을 기약하며 부처님의 사리를 시안 인근인 성총에 묻어두고 그곳에서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다 입적했다. 여기까지가 법문사에 얽힌 전설이라면 사리의 발견은 역사의 장으로 넘어온다.

안식국(현재 이란 북부)의 왕자이자 동아시아의 걸출한 역경가였던 안세고는 서역 30여 개국을 여행했던 까닭에 불교적인 지식뿐 아니라 견문도 대단히 넓었다.

그가 중국에 들어와 성총에 머무르던 어느날 밤 갑자기 오색찬란한 광채가 북두칠성까지 뻗어있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그 곳을 파보니 7개의 푸른 벽돌에 쓰인 산스크리트 문장과 함께 진신사리가 있었다. 그 사리 중 부처님의 손가락 사리를 모신 곳이 법문사의 전신인 아육왕사(阿育王寺)다. 이렇게 시작된 법문사는 당나라 때 최고의 전성기를 맞는다. 당나라 때 법문사에서 황제가 있는 시안으로 불지사리(佛指舍利)를 이운할 때면 80킬로미터에 이르는 길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너무 감격한 나머지 소신공양을 하는 사람들도 잇따랐다. 심지어 황제도 그 앞에 엎드려 절을 올리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그러나 당나라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자 법문사와 그 보탑도 황제들의 불교에 대한 관심 정도에 따라 영욕의 세월을 거듭하게 된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재난을 겪으며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특히 1568년 8월 엄청난 지진으로 목탑이 무너져 내렸고, 이 지역 사람들은 힘을 모아 이번엔 나무 대신 벽돌을 쌓아 탑을 쌓아나갔다. 그러나 당시 한 끼 식사도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대불사가 원만히 진행되기란 극히 어려웠다. 더욱이 수년간 몰아닥친 가뭄은 불사를 더욱 어렵게 했다.

1987년 복원 중 지하궁전 발견


<사진설명>부처님 손가락 사리가 모셔져 있는 법문사 보탑. 그동안 수많은 영욕의 세월을 겪었던 이 탑은 중국불교의 상징이기도 하다.


촉 땅의 한 늙은 거사가 법문사에 나타난 것도 이 때다. 유서 깊은 절과 보탑이 폐허가 된 것을 본 그 거사는 자신의 몸을 바쳐 법문사 탑을 재건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끝이 뾰족한 쇠막대를 자신의 어깨에 깊이 밀어 넣었다. 단말마의 비명…. 쇠는 어깨를 관통해 반대편으로 뚫고 나왔다. 거사는 끝내 고통을 참지 못하고 기절했다. 보름이 지나 죽은 줄 알았던 거사가 관중 들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피범벅이 된 양 어깻죽지에는 긴 쇠사슬이 매달려 있었다. 철로 만든 바리를 든 채 쉰 목소리로 뭐라 외치는 그 거사를 보고 사람들은 경악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긴 핏자국이 선명하게 그어졌다. 탑을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그 거사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처절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를 계기로 30년에 걸친 대불사가 진행돼 1609년 마침내 47미터 8각 13층의 첨탑이 완성됐다. 그러나 법문사 보탑의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청나라 때인 1654년 진도 8에 이르는 대지진으로 탑이 3미터 가량 심하게 기울고, 1976년 이 지역을 강타했던 지진으로 또다시 기울였다. 그러던 중 1981년 8월 24일 진신사리탑에 천둥번개가 내리치고 400년을 묵묵히 서있던 탑은 마침내 탑을 위에서 내리 자른 듯 3분의 2가 떨어져 나갔다.
탑이 무너져 내리자 가장 안타까워 한 것은 이 지역 주민들이다. 이들은 정부에 끊임없이 진정서를 올려 보탑을 수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1986년 12월부터 본격적인 복원공사가 시작됐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이 공사가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복원을 위한 발굴이 시작되면서 법문사 탑 아래 지하궁전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 안에서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부처님의 손가락 사리 4과가 발견됐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갖가지 문헌과 화폐를 비롯해 백옥으로 정교하게 만든 아육왕탑, 금으로 만든 봉진신보살(捧眞身菩薩), 중국 여황제 측천무후의 자수치마, 온갖 금관과 은곽, 비취색 자기, 금으로 만든 석장(錫杖) 등 말 그대로 보물창고였다.

이러한 발굴은 세계 고고학계를 흥분으로 들뜨게 했고, 진시황릉에서 발견된 동거마(銅車馬)와 함께 곧바로 중국 1급 문화재로 지정됐다. 그리고 1988년 진신보탑이 중건되고 박물관이 완성되면서 수많은 스님들과 불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 역사적인 현장에 우리는 서 있는 것이다.

한 스님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먼저 지하궁전부터 찾았다. 30여 평 되는 공간의 중심에 부처님의 손가락뼈를 모셔놓은 조그만 진신사리금탑이 눈에 띈다. 바로 내 눈앞에 부처님의 사리가 있는 것이다. 우리 일행들은 돌아가며 한 배 한 배 정성껏 삼배를 올렸다. 2600여 년 전 살았던 위대한 성인과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중국 1급 보물 무더기로 나와

“저기 모셔진 게 진짜 부처님 손가락 사리가 맞나요?”
“글쎄요, 그거야 누가 알겠어요. 하지만 설령 저 사리가 실존했던 부처님의 손가락이 맞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하더라도 지난 2000여 년간 이 땅의 사람들이 믿고 받들어 왔던 부처님 손가락 사리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게 더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일행 몇 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우리는 간단히 예배를 드리고 밖으로 나왔다. 입구를 지키는 한 중국 스님에게 자신의 몸을 바쳐 탑을 세웠던 거사의 비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고개만 갸우뚱거릴 뿐 모른다는 표정이다. 이곳저곳 수소문해 결국 법문사 정전 서쪽에서 83센티미터 크기의 비를 찾을 수 있었다.

법문사 세워지고 머물다 무너지니
텅 빈 공(空) 속에 홀연 한 사람 나타났네.
백 자 철심으로 어깨를 꿰뚫고
여래와 더불어 기개를 더하려하네.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 자신의 몸을 잊는다는 말을 이럴 때 쓸 듯싶다. 500여 년 전 이 탑을 세우기 위해 선혈을 뿌리며 고을을 헤맸을 거사의 모습이 아프게 와 닿는다. 박물관에는 지하궁에서 발견된 수많은 진귀한 보물들이 전시돼 있다. 특히 38.5센티미터의 봉진신보살은 871년 당 의종(懿宗)이 불지사리를 맞이할 때 조성한 것으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또 온갖 장식을 하고 있는 7중보함, 백옥으로 만든 아육왕탑과 금향로도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박물관을 살펴본 후 밖으로 나왔다. 상점 앞에서 한 시각장애인이 비파를 연주하고 있다. 서글픈 곡조 때문일까. 법문사 보탑이 조금씩 멀어질수록 아려한 슬픔이 여울처럼 맴돈다.


<사진설명>법문사 앞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시각장애인.

글·사진=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협찬:
한중자동차문화교류협회 (silkroad4x4.or.kr)
성남 청계산 정토사( jungt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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