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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은 아침 저녁 한 시간이면 충분"

기자명 채한기

현 웅 스님 조계사 禪 법문


<사진설명>"주장자를 뺏으리라" 미국 버클리 육조사 주지 현웅 스님은 4월 25일 조계사에서 열린 '조계종 선원장 초청 대법회'에서 '한국 선의 세계화와 생활선'을 주제로 법문했다. 현웅 스님은 법석에서 "우리나라의 간화선은 너무 어렵게만 인식되고 있다"며 "불교가 생활 속에서 꽃피지 못하면 선의 세계화는 요원하기만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웅 스님은 주장자를 내려치는 속에 선의 진수가 있지만 "이로 인해 대중은 주눅만 들어 선은 더욱 어려워져 가고 있다"고 말했다.

한 선사가 주장자를 보이며 말했습니다. “너에게 주장자가 없으면 뺏으리라.” 주장자가 있어야 뺏을 텐데 없으면 뺏는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요? 잘 관찰해 보면 이 말에 큰 법문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 마음에 닿아서 연결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분들은 처처에서 큰 법문을 들을 수 있는 분들입니다.

전통 禪 너무 어려워

배워서 안 불교가 가끔 참부처를 만나는데 방해가 될 때가 있습니다. 자기 안의 부처를 찾으려면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부처를 과감히 버려야 만날 수 있습니다. 천수경을 비롯한 경전과 선어록을 보고 불교를 알면 깨칠 텐데 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불교를 버리라고 할까요? 이 말을 이해하면 주장자를 뺏겠다는 것도 이해합니다. 사족이지만 설명을 하겠습니다.

‘주장자’라는 것은 자신 안의 참 부처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닫고 일체 중생을 둘러보니 모든 사람이 자기와 똑같은 깨달음의 불성이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밖에서 찾으니 옛 선사들은 ‘너에게 주장자를 없으면 뺏으리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불교의 참 부처를 경험한 것이 아니라 배워서 들은, 우리가 사랑해서 알음알이로 알고 있는 불교로 인해 내 안의 자성불을 막아버렸습니다. 자기 안의 부처가 있는지, 자기 안에 주장자가 있는지를 모르고 삽니다. 자기가 부처인줄 모르고 밖에서 찾아 다니면 헛것을 뺏어버리겠다는 말입니다.

즉 내 안에 주장자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불성이 있는 줄을 아는 사람이고, 주장자가 없다고 밖에서 찾는 생각하는 사람은 주장자 뺏김을 당해야 할 사람입니다. 선사는 네 안에 주장자가 있고 부처가 있음을 깨우쳐주기 위해 이런 말을 던진 것입니다.
선과 교는 다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천수경에 ‘내가 가면 지옥이 없어지고 칼싸움이 부서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외우기만 하지만 우리 선승이 보면 그대로 선법문입니다. ‘내가 가면 칼싸움이 부서진다’는 말은 내 안의 어리석음을 알아차려 걷어내고, 내가 비어있는 것을 깨달으면 칼을 대하는 마음이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니 칼싸움을 만날 때 칼 자체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가면 지옥도 없어진다’는 말은 지옥도 사람이 밖에서 만든 것일 뿐 내 본체에는 없는 것이니 비어있는 내가 가면 지옥도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석가모니가 깨달아서 하신 말씀이 그대로 우리 마음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선과 교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사진설명>초파일 연등을 그늘 삼아 사부대중이 법문을 듣고 있다.

선지식 믿는 순간 아만 없어져

선에서는 면도칼 보다 날카로운 것으로 마음의 어리석음을 베어버리기에 강렬하면서도 차원 높은 언어를 씁니다. 경전은 보다 쉽다면 쉽습니다. 중생이 이해하기 쉽게 부처님이 차근차근 비유를 들어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언어가 달라질 뿐 부처님 가르침을 담은 경전이나 선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간화선이 제3수행법 등에 밀리는 현실을 맞은 것은 우리 선이 너무 어려운데 기인한다고 봅니다. 제가 처음 말한 주장자 이야기도 제가 설명을 하니 알아듣지 처음 들어서는 알 수 없는 법문입니다. 우리 선가도 너무 전통에 따라 어려운 법문만 하고 있습니다. 큰 스님들의 법문에는 불교의 핵심이 농축된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중은 이런 법문에 주눅들고 있습니다. 주장자 한 번 크게 내려치며 ‘알겠는가’ 하는 그 순간부터 주눅이 들어 있습니다. 천편일룰적으로 이렇게 해서는 생활불교가 되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불교를 너무 많이 알고 있습니다. 큰 스님들이 법문 한마디 하면 스님이 전하려는 큰 뜻은 접어둔 채 ‘저 소리 어디 책에도 있는데’ 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지금 알고 있는 부처를 버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부처를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스님들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자신의 그릇은 생각지 않고 알쏭달쏭한 법문을 해야 큰 스님 대접받는 다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대중에게 전하는 폐단도 있습니다.

동서양의 문화를 경험하면서 우리 생활에서 왜 불교가 피어나지 못하는가를 고민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선을 너무 추상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참부처는 모르고 배워서 알고 있는 부처만 있으니 선이 생활로 내려오지 못하고 이상에만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선은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이라는 것은 어디 보따리 속에 숨겨 놓고 자기만 알고 보통 사람은 모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불교는 처처에 있습니다.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며느리와 자식, 친구와의 대화 속에도 관세음보살, 석가모니의 법음이 있는 것입니다. 동대문 시장에도 선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불교가 아니면 참선하는데 시끄럽게 하지 말라며 참선방만 따로 만들려 합니다. 애들 며느리 참선하는 동안 다 나가 있으라고만 합니다. 불교는 그렇게 융통성 없고 협소한 것이 아닙니다.

동대문시장에도 법음은 있다

저는 좌선을 하루 10시간 12시간씩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아침 저녁으로 한시간씩만 해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스승이 있는가. 스승을 얼마만큼 믿고 있는가. 화두할 때 만큼은 매진하는가가 관건이지 시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승을 믿는 마음이 깨닫게 합니다. 스승을 완전히 믿으면 내 생각을 없애버립니다. 아만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러는 중에 의단이 일고 이 때 여러분 모두에게 있는 불성의 싹이 싹트는 것입니다. 자기 안의 부처를 보고 나와 부처가 둘이 아님을 확인하면 되는 겁니다. 이정도 되면 생활 속에서도 화두 놓치지 않습니다. 자신은 날마다 변화하니 날마다 좋은날이 됩니다. 어록 보아도 다 꿰뚫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계속 공부해 가며 익어져야 합니다.

스승을 믿으면 부처도 믿습니다. 스승을 믿으면 황벽, 임제, 마조 등 역대 조사는 물론이요 부처까지 믿습니다. 둘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금강경까지도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순일한 마음으로 스승을 믿고 정진하면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정리=채한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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