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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뤄양(洛陽) 롱먼(龍門)석굴

기자명 이재형

측천무후 ‘잔혹 전설’ 깃든 석조예술의 정화


<사진설명>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측천무후, 가운데 부처님은 당 고종이 그녀를 본 따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권력 쟁취를 위해 자식까지 죽여야 했던 측천무후이건만 이 부처님은 한없이 평화롭고 자비로워 보인다.

시안(西安)의 법문사를 뒤로 하고 차는 드넓은 평원과 황량한 들판을 가로질러 빠르게 나아갔다. 그렇게 점심이 지나고 오후가 기울어갈 무렵 이정표는 뤄양(洛陽) 시내에 들어서고 있음을 알려준다. 동탁, 여포, 조조 등 『삼국지』의 영웅들이 활거하던 곳. 불타는 뤄양을 뒤로하고 훗날을 기약하는 조조의 분노에 찬 눈매가 불연 듯 스쳐간다.
그 때 한 스님이 남도의 걸쭉한 목소리로 성주풀이 한가락을 뽑아내고 있다. “낙양성 십리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인가 우리네 인생 한번가면 저기 저 모양 될 터이니…”

<사진설명>롱먼석굴을 대표하는 봉선사동 대불

1352개 석굴…10만여 불상

뤄양은 기원전 770년 주나라 이후 후한, 위(魏), 서진(西晋), 북위 등 9개의 왕조가 이 곳에 도읍을 정했다. 당시 뤄양성은 동서 10킬로미터, 남북 7.5킬로미터나 되는 큰 도성이었고, 인구도 100만 명에 이르렀다. 시안에 이어 중국 제2의 역사도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뤄양은 불교와도 깊은 인연이 있어 북위 이후 이곳에 도읍을 정한 왕조는 모두 불교를 신봉해 수많은 불사를 일으켰다. 특히 북위시대는 불교문화가 만발했다. 당시 전국적으로 절이 3만, 스님이 200만 명에 이르렀고 그 중에서도 뤄양은 불교문화의 중심지였다. 중국 최초의 사찰이라 일컬어지는 백마사와 영태후가 세운 대규모 사찰인 영령사를 비롯해 선종의 본찰로 중국 불교무술의 발생지라고 일컬어지는 소림사도 이곳 뤄양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오늘 우리가 보게 될 롱먼(龍門)석굴도 뤄양 인근에 있는 것으로 둔황의 막고굴, 다퉁(大同)의 윈깡석굴과 더불어 중국 3대 석굴로 꼽히고 있다.

차가 드디어 도시에 진입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고풍스러운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수많은 차량들과 자전거들만 분주히 오갈 뿐이다. 여기에 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커먼 매연들이 숨을 턱턱 막히게 한다. 실망이 크지만 그래도 뤄양이 한번 쯤 스쳐가는 이들의 눈요기가 아니라 현재 이 땅에 뿌리내리고 사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어야 한다고 애써 위로해 본다.

도시를 벗어나 약 15킬로미터 쯤 가자 마침내 롱먼석굴이 나타났다. 폭 100미터 쯤 되는 이허(伊河)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307미터의 롱먼산(龍門山)이, 왼쪽에 371미터의 시앙산(香積山)이 길게 뻗어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매표소까지는 약 1킬로미터 쯤 떨어져 있다. 우리는 4위엔(600원)을 내고 6인승 미니버스에 올라탔다. 가족과 연인들이 다정히 손을 잡고 걷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할머니 손을 잡고 나온 한 아이, 앞머리만 남겨두고 짧게 깎은 중국식(?) 헤어스타일이 이색적이다.

<사진설명>1960년대 문화혁명으로 파괴된 불상

표를 끊고 아치형 다리 밑을 지나니 곧바로 수많은 석굴과 마애불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마치 벌집을 확대해 놓은 듯 온통 석굴이다. 지난 2000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 롱먼석굴은 북위 때부터 조성되기 시작해 400년 동안 수많은 불사가 이뤄졌다. 이허를 중심으로 롱먼산과 시앙산에 1352개의 석굴과 10만여 구의 불상이 만들어졌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특히 둔황이나 다퉁의 석질과는 달리 롱먼의 바위면은 검은 청색에 단단한 석회암이어서 조각 하나하나가 대단히 정교하다. 또 전반적으로 둔황의 관능적이고 육감적인 아름다움과 달리 롱먼은 고요하고 우아한 정신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

입구께 위치한 잠계사동에 들른 후 24년간 80만 명이 동원돼 만들었다는 빈양3동(賓陽三洞)을 찾았다. 마치 큰 산의 한 부분을 들어낸 듯 하다. 어떻게 이렇게 단단한 바위산을 깎아 석굴을 조성할 수 있었을까. 3동의 입구에 서있는 두 분의 금강역사는 우람하면서도 친근감을 준다. 각 굴속에 조성돼 있는 불상들 모두 묘한 감동을 주지만 그 중 수미좌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 아미타여래상은 풍만한 육체와 부드러운 얼굴선 등 당대불상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빈양동을 빠져나와 다시 이허의 강줄기를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그 때 거대하면서도 아름다운 불상이 한 눈에 들어온다. 책에서나 봤던 그 유명한 봉선사동(奉先寺洞) 대불이다. 세계적인 걸작품으로 평가받는 이 불상은 이 곳의 수많은 불상 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손꼽힌다. 장중하면서도 당당한 체구, 거기에 완벽하리만큼 뛰어난 균형감각은 경외감을 자아내도록 한다. 거대한 암반 허리를 절단해 높이 30미터, 너비 30미터, 길이 30미터나 되는 암벽을 파고 들어가 4구씩 모두 8구의 협시상을 부조한 엄청난 규모다.


<사진설명>롱먼석굴을 보러 온 중국인 꼬마

2000년 세계문화유산 지정

이곳 석굴은 670년 당 고종이 착수하고 황후 측천무후의 엄청난 후원으로 완성됐다. 고종은 당 황실의 위엄과 권위를 이 석굴을 통해 선양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정 가운데 자리 잡은 13미터 크기의 비로자나 부처님은 고종이 측천무후의 모습을 본 따 만들었다는 얘기가 정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중국 역사상 수많은 여인들이 권력을 누렸지만 그 중 여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는 오직 측천무후 뿐이다. 양주 도독장사의 둘째 딸로 태어난 그녀는 어린 나이에 궁궐로 들어갔다. 탁월한 미모와 재능으로 인해 그녀는 곧 당태종의 눈에 띄게 되고 재인으로 발탁됐다. 그러나 그 때 태종의 나이는 오십을 넘겼고, 수많은 아들들이 장성한 때였다. 그 중 고종으로 등극하는 왕자가 그녀를 보고 첫 눈에 반했다. 왕자는 그녀를 보기 위해 매일 황제에게 문안인사를 드리고, 이를 효성으로 오해한 태종은 그를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 그러나 태종이 죽은 후 당시 풍습에 따라 그녀는 감업사로 출가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태종이 죽은 지 3년째 되던 날 이를 핑계로 감업사를 찾은 고종은 그녀에게 궁궐로 반드시 돌아오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마침 그 때는 황제의 총애를 얻으려는 황후와 숙비사이의 갈등이 있었고, 황후는 숙비를 견제하기 위해 그녀를 황실로 불렀다. 무 씨를 통해 숙비의 총애를 없애려는 계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궁궐로 돌아온 그녀는 곧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게 됐다. 그리고 그녀가 아이를 낳아 황후가 의례적으로 찾았을 때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죽이고 황후가 죽였다고 고종에게 고했다.

이로 인해 숙비는 물론 황후까지 참혹한 죽음을 맞는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황후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병약한 고종을 대신해 전권을 휘두르는 것은 물론 황제가 죽자 아들들을 번갈아 가며 황제를 시키고 다시 폐위시키거나 죽이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690년 주왕조(690~705)를 세워 중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자식들과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았던 그녀는 만년에 진심으로 참회하고 불문에 귀의했다. 이 때문에 경산사와 백마사 등 엄청난 불사를 일으키게 된다. 이후 1300여 년간 역사는 그녀를 인륜을 저버린 극악무도한 악녀로 표현해 왔다. 그 여인이 바로 이곳 롱먼을 대표하는 봉선사동의 대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대하는 대불에서는 잔인함은커녕 온화하고 깊은 눈을 지닌 성스러운 부처님만 있을 뿐이다. 어쩌면 그 역사의 이면에는 남성중심사회의 뿌리 깊은 우월의식이 배어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사진설명>롱먼석굴은 북위부터 당나라 때까지 400여년에 걸쳐 조성됐다.

파손된 불상들도 부지기수

봉선사동을 내려오니 벌써 어둠이 내리고 있다. 이곳에 신라 스님들이 머물었던 석굴이 있다기에 안내인을 비롯해 여기저기 물어보았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다시 천천히 올라왔던 길을 되짚어 가면서 석굴 안의 부처님들을 살펴보았다. 천수백전 살았던 사람들의 신심이 가슴으로 전해져 오는 듯 하다. 그럼에도 우리를 한없이 안타깝게 하는 것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불상들이 부지기수라는 점이다. 부처님이 영험하다고 하여 떼어가거나 이교도에 의해 파괴된 것도 있지만 대다수는 지난 1966년 문화대혁명 때 어린 홍위병들에 의해 파괴됐다고 한다. 결국 이념이 모든 가치의 최상에 있다는 어리석은 믿음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권력은 무엇이고 이념은 또 무엇일까. 생겨난 것은 언젠가 반드시 사라지는 것이 만고의 법칙이건만 밀려드는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다. 어둠이 벌써 짙게 깔렸다. 강 건너 향적사의 목탁소리가 강물처럼 잔잔히 울려퍼지고 있다.

글·사진=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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