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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단배에 원력 싣고 12800㎞ 고해 건너다

기자명 김형규

요트로 태평양 횡단 수행 지 명 스님



거센 강풍-파도 맞서 120여일 구도대장정

“화두 온몸으로 실천한 수행자의 쾌거”칭송



일엽편주(一葉片舟). 20년 된 중고 요트에 의지해 거센 파도와 싸우며 태평양 횡단에 나섰던 전 법주사 주지 지명 스님과 일행 5명이 5월 8일 부산 수영만 요트경기장에 입항했다.

“안일한 수행자의 삶을 버리고 죽음과 직면해 업장(業障)과 무명(無明)을 녹이겠다”는 구도의 일념으로 시작된 120여 일의 대장정. 초속 40노트의 거센 강풍과 삼킬 듯 몰아치는 파도를 헤치고 죽음의 여정 1만2800km를 돌아온 바라밀다호는 모든 번뇌를 털어 버린 듯 평온한 모습으로 미끄러지듯 항구로 들어왔다.

이날 수영만 요트 경기장에는 스님과 불자, 그리고 부산 시민 등 500여명이 참석해 지명 스님 태평양횡단 기념 입항식을 열고 꽃다발을 전달하는 등 스님의 무사귀환을 축하했다.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은 “무동력 요트에 의지해 태평양을 횡단한 것은 처절한 수행의 과정이었다”며 “지명 스님의 높은 원력은 경제난으로 고통받고 있는 국민들에게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라고 치하했다.

지명 스님 태평양 횡단 추진위원장인 불국사 주지 종상 스님도 “망망대해에서 죽음과 맞서 싸우며 무심(無心)한 바다의 공덕을 체험한 스님은 이미 피안(彼岸)을 경험했을 것”이라며 “이번 항해는 선가의 화두를 온몸으로 실천하는 수행자의 삶을 보여준 일대 쾌거”라고 말했다.

지명 스님은 지난 1월 10일 길이 14.6m, 무게 15톤의 중국산 중고 요트를 타고 미국 샌디에고항을 떠났다. 배의 이름은 피안에 이른다는 의미의 바라밀다호. 안일한 삶에서 벗어나 죽음과 직면해 생사(生死)를 판가름하겠다는 굳은 의지는 회갑이 얼마 남지 않은 스님을 미지의 수행처 바다로 내 몰았고, 배의 이름은 그렇게 항해의 이유이자 목적이 되었다.


항해에 참가하는 이들은 지명 스님, 하와이 백련사 주지 세인 스님, 김정자(64), 이영화(54), 김옥희(64), 홍영숙(56) 등 모두 6명. ‘노인네 선원’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나이가 많은데다 스님을 제외하면 모두 여성. 더군다나 항해라고는 한번도 해보지 못한 생짜 초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해 전문가의 항해 지도도 뿌리쳤다. 시험 항해에서 공포감이 생기면 태평양 횡단을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였다.

항해는 처음부터 녹록치 않았다. 유서를 남기고, 항해 도중 사망하면 그대로 수장한다는 각서를 쓰는 등 굳은 각오로 출발했지만, 멀미를 하고, 소변에 피가 묻어나오는 상황을 맞으면서 두려움은 항해 내내 가시지 않았다.
더구나 바다 한가운데서 강풍과 6∼7m 크기의 파도를 맞으며 배가 이리 자빠지고 저리 엎어지기를 반복하는 순간에는 극심한 죽음의 공포로 떨어야 했다.

특히 태평양 한가운데서 만난 태풍 ‘수달’은 무서움의 극치였다. 무풍지대에 들어선 배는 아무도 없는 대양 한가운데서 그대로 멈춰 서 버렸고 선원들의 가슴 밑바닥에서는 신물 같은 고독감과 외로움이 밀려왔다. 선실은 이내 공포로 변했다. 임시방편으로 비상엔진을 이용해 무풍지대를 겨우 빠져나왔지만, 20년 된 낡은 중고 요트의 엔진이 갑자기 멈출 수도 있다는 걱정에 이틀을 뜬 눈으로 보내야 했다.

“배타기의 고통과 고난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세상의 어떤 어려움을 이기지 못할 것인가. 어떤 고독도 이기지 못할 것인가. 어떤 떠남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인가. 적어도 진정한 자신을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지명 스님은 당시의 심정을 일기 형식으로 정리한 태평양 소식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그러나 고통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낡은 전화, 팩시밀리, 이메일 등을 통해 항해 도중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태평양 소식을 통해 알리는 것은 작은 행복이었다. 또 돌고래의 재롱과 무지개, 대양의 평화로움 등 아름다운 풍경을 영상에 담을 수 있었던 점도 남들이 누릴 수 없는 기쁨이었다.

지명 스님 일행은 하와이 호놀룰루항(2월 2일)과 일본 오이타항(4월 17일)을 거쳐 5월 8일 부산 수영만 요트경기장에 무사히 입항했다. 8000마일, 1만2800km에 걸친 현대판 구법순례. ‘신왕오천축국전’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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