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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축특집섹션 - 한 평생 자신을 속이지 말라

기자명 이학종
  • 사설
  • 입력 2004.05.24 14:00
  • 댓글 0

석종사 조실·조계종 원로 범 룡 큰스님

석종사 조실 추대법회서 ‘無言법문’
여법한 조실추대 광경에 대중‘합장’


한암 스님에 사사한 화엄의 대가
후학들에 늘“신심을 투철히 하라"


<사진설명>지난 5월 15일 충주 석종사 조실로 추대된 조계종 원로 범룡 큰스님이 선원장 혜국 스님의 부축을 받으며 법당으로 향하고 있다.

91세의 한 노선사가 후학의 부축을 받으며 법당으로 들어섰다. 조실채에서 나와 법당에 이르는 동안은 물론이요, 어간을 통해 대웅전 안으로 들어선 노 선사를 향해 대중은 기립해 존경의 합장을 올렸다.

“지금 조실 스님께서 막 법당에 오셨습니다. 이 소중한 법석을 증명하시기 위해, 또 조실추대를 승낙하시는 의미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어려운 걸음을 하셨습니다. 지금부터 약 5분 동안 조실 스님께서는 법당에 머무실 것입니다. 대중들께서는 조실 스님께 예를 취해주시기 바랍니다.”

조실 스님께서 좌복에 정좌를 하신 후 대중들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약 5분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조실 스님의 표정은 미동조차 없고, 대중들의 얼굴은 점점 환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법문이 진행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었다. 성전일구(聲前一句), 즉 소리 이전의 한 소식을 좇는 납자에게 있어 노 선사의 무언법문(無言法問)은 사자후에 다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충주지역의 참선 도량 금봉산 석종사가 중창불사를 마치고 새롭게 문을 열던 날(5월 15일), 선지식의 청량법음을 청해들을 목적으로 천년고찰 석종사(釋宗寺)를 찾았다. 이 도량의 조실로 추대된 범룡(梵龍) 큰스님께서 중창불사 낙성의 법석에 참석차 석종사에 오신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선원장 혜국 스님과 미리 연락을 취했던 차에 큰스님의 기력이 허용된다면 법음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석종사 행에 한 몫을 했다.

제방에서 찾아온 선원장 스님들, 눈푸른 납자들, 그리고 재가불자 등 금봉산에 운집한 대중은 5천여 명을 훌쩍 뛰어 넘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모두가 환희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듯 대중이 감동한 것은 천년고찰의 복원낙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여법하게, 문중과 반연의 굴레를 뛰어넘어 오직 법에 의지해서 조실을 추대하는 아름다운 광경 때문일 것이었다. 법석에 참석한 한 납자가 “선도량의 복원보다 여법한 조실 추대의 모습을 보고 감격했다”며 선원장 스님의 손을 맞잡는 광경은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인 1993년, 기자는 팔공산 비로암으로 범룡 큰스님을 찾아뵌 적이 있다. 그 후 10년 세월이 지났는데도 오늘 큰스님의 기상은 여전하다. 문득 10년 전 큰스님과 나눴던 문답의 한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산중지산(山中之山)이라고 할까. 대동강 상류지역의 맹산이란 곳이 내 고향인데, 그 이름만큼이나 산세가 험했어요. 그래서 옛날엔 철석문(鐵石問)이라고도 불렀지. 그런데 나는 출가 이유가 조금 우스워요. 세계일주가 하고 싶어서 출가를 했으니까. 그런데 외국에 나가면 우리나라의 자랑거리가 금강산 하나뿐이라는데 세계일주 하러 나가기 전에 금강산은 한 번 둘러봐야 도리라는 생각으로 금강산을 찾았다가 그만 그대로 머물러 중이 되었지. 어때요. 내 출가 동기가 조금은 우습지요.”

출가는 금강산에서 했지만 범룡 큰스님의 공부는 오대산 한암(漢岩)스님 회상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한암 스님의 지도로, 처음에는 범망경을 읽었고, 다음으로 금강경을 공부했다. 특히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이 화엄경 공부를 하던 것인데, 책이 없어서 중국에 특별히 주문을 해서 어렵게 공부를 하곤 했었다. 그 인연으로 인해 범룡 큰스님은 화엄학에 관한한 탄허 스님과 함께 당대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도를 얻기 위해 선지식을 찾아다니는 열정 또한 범룡 큰스님의 성정을 잘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어디에 선지식이 계신다’는 소리만 들으면 천리를 마다않고 바랑을 짊어졌다. 당시는 교통사정이 좋지 않아 늘 걸어 다녔는데 그렇게 걸어 다닌 거리가 남북한을 두어 바퀴 돈 만큼은 족히 되고 남는다. 남북한을 한 바퀴 도는 데 약 10년쯤 걸리니까 약 20년은 구법의 행각을 계속한 셈이다.

남방의 지리산, 동방의 금강산, 서방의 구월산, 북방의 묘향산 등 이른바 사산(四山)에 방부를 든 수좌이기도 한 범룡 큰스님의 공부에 대한 끝없는 열정은 자연히 재미있는 일화를 만들어내곤 했다. 그 중 하나를 꼽는다면 큰스님이 불국사 강원 강사 시절, 강원의 초보단계라고 할 수 있는 치문과 초발심자경문 강의 시간에 다른 학인들과 똑같이 앉아서 공부를 했던 사건이다. 당시 중강을 맡아 초발심자경문을 강의하던 후학이 혼비백산 당황을 했을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 그러자 큰스님은 출가 당시 초발심자경문과 치문 등 수행자가 처음 접하는 과목에 대한 공부를 제대로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려 배우려는 것이니 개의치말고 강의를 계속하라고 요청했다. 아무리 강백의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범룡 큰스님의 소신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직접 농사를 지으며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큰스님에게 요즈음 출가 수행하는 후학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을 물으니 간단히 답변하신다. “그저 신심을 투철히 하라”는 것이다. “신심 없이 의심을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아쉽게도 큰스님은 이날 석종사에 운집한 수천의 대중이 다투어 친견을 청하자, 조실채에서 하루를 머물려는 계획을 바꿔 홀연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획과는 다르게 대담을 제대로 나누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는지 혜국 스님께서 기자를 거들어주셨다. 혜국 스님을 통해 전화대담이 이뤄진 것이다. 어렵사리 이뤄진 대담에서 불기 2548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 큰스님께서 불자들에게 내린 당부는 다음과 같다. 이 당부는 큰스님께서 지난 91년 생애 동안 직접 보여준 삶의 지침이기도 하다.

“반드시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 평생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학종 기자 urubell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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