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봉축특집섹션 - [br]불살생-비폭력 사상, 현대 사회 병폐 해결 위한 유일한 대안

기자명 권오영
  • 사설
  • 입력 2004.05.24 14:00
  • 댓글 0
‘학문-개인주의 불교’극복이 서구불교 과제

무조건적 개발서 벗어나 공동체적 삶 지향



과학, 욕망-편리 극대화 추구 버려야 한국불교 세계화 때 인류사회에도 공헌

강대국-기업의 개발 논리 에너지 낭비-환경 파괴

모든 생명에 대한 자비심이 환경 문제 해결 실마리

생명살리기 위한 인간복제 자비에서 출발해야 성공

불교 합리적-보편적 정신 첨단 과학의 이론적 배경

지식으로만 접근한 불교 지혜 체득 불가능

현대사회 문제 관심갖는 삶의 철학으로 접근해야

초기 불교에선 여성 성불도 인정

여성에 힘줄 수 있는 불교역사 발굴해야


#왜 불교가 미래인가
슈미트하우젠 : 종교적인 갈등과 대립이 팽배해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불교는 미래가 될 수 있다. 현재 유럽을 비롯한 서구사회에서는 전쟁, 인종문제, 환경 파괴, 대규모 사육을 통한 동물학대 등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대안을 불교의 가르침에서 찾으려는 노력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는 불교의 가르침 자체가 신비적이고 주술적인 면에 대한 관심보다는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설명과 함께 다른 생명체와의 공존적 측면에 대해 보다 많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로스 : 슈미트하우젠 교수의 의견에 깊이 동감한다. 부연해 설명한다면 불교가 현대사회에 끼친 많은 영향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불살생과 비폭력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결국 불살생과 비폭력은 다른 생명체와 공존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헬레나 : 최근 서구사회에서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서구에서 그 동안 사상적 배경이 됐던 기독교의 가르침은 지극히 인간중심 이었다. 따라서 서구에서 급속도로 이룩한 경제적 발전은 인간을 점점 더 자연과 분리시켰고 인간을 서로 멀어지게 했다. 이와는 반대로 불교는 자연주의적이고 환경을 중시하는 사상이다. 즉 다른 생명을 존중하면서 공존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서구 사회에 불교는 급속히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됐다.

<사진설명>『오래된 미래』의 저자로 세계적인 여성 생태운동가이다. 런던대에서 언어학을 전공했다. 75년 학위논문을 쓰기 위해 라다크를 방문. 이 때부터 생태운동가로 변신한다. 86년에는 라다크에서 기울인 노력을 인정받아 대안노벨상이라 불리는 '바른생활상'을 수상했다.

황우석 : 현대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폭력과 갈등, 전쟁은 결국 남을 배려하고 이해해주는 자비심이 부족한 것에서 기인한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타인을 인정하고 그들의 편에서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 넓은 의미에서 자타불이(自他不二)인 것이다. 모든 생명체에 인격을 부여하고 그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현대사회가 겪는 모든 문제들은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설명>세계 최초로 복제된 인간 배아에서 줄기 세포를 추출하는데 성공한 세계적 생명공학자. 서울대 수의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에서 임상 수의학석˙박사.86년부터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0년 국회과학기술상. 2001년 세종문화상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로스 : 그러나 불교가 사상적으로 우리 인류의 미래라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을 학문적, 철학적으로만 접근한다면 결코 삶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불교는 오로지 경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즉 삶 자체로서 불교를 만나야 한다는 점이다.

슈미트하우젠 : 그 점은 불교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불교학을 고고학이나 지적 유희의 대상으로만 접근한다면 불교학은 죽은 학문에 불과하다. 불교학은 현대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불교적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 살아 숨쉬는 삶의 철학으로 접근해야만 한다.

<사진설명>1939년 독일 퀼른에서 출생. 19살에 쾰른대학에 입학해 인도학과 아랍어, 티베트어와 고전한문을 배웠다. 63년 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66년 교수자격논문을 쓰고 뮌스터대학에서 전임강사, 조교수를 거쳐 1973년부터 함부르크대 인도학연구소에서 불교학 담당 정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헬레나 : 불교를 실천이 아닌 이론적으로만 접근해 발생한 병폐는 이미 미국 등 서구 사회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편협한 방식으로 해석하면서 서구 사회를 다시 개인주의적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불교의 올바른 진리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실천에서 비롯된다.

그로스 : 미국의 불교학자들이 직면해 있는 문제점도 바로 실천적인 부분이 결여돼 있다는 점이다. 불교 고전언어에 대한 역량과 번역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도 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것이 미국불교학계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 볼 수 있다. 참된 힘은 실천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불교학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사진설명>불교와 페미니즘을 접목시키고 이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학자이다. 위스콘신대를 졸업. 73년 ~ 88년까지 위스콘신대에서 재직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다. 티베트의 카르마 가규파 전통엣서 오랫동안 수행했으며, 수행지도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환경운동의 미래는 불교

헬레나 : 결국 현대문명과 기존질서의 충돌에서 발생하는 폐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불교적 가르침의 실천을 통해 공동체적 질서를 회복하는 것뿐이다. 이는 환경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경제 성장과 행복은 비례한다’는 식의 개발론을 강조함으로써 인류는 오히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고 이로 인해 많은 환경파괴를 가져왔다. 우리가 정말로 행복해지는 것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속에서 함께 노래하고 일하며 즐기고 자연과 접촉하면서 함께 숨쉬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로스 : 인간의 행복은 결국 자연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점에 공감한다. 인간과 자연, 모든 생명체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비폭력과 불살생을 전제로 해야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비폭력을 지향해야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비폭력적 방법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는 개발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것은 자연에 대한 폭력인 것이다.

헬레나 : 개발이 전 세계인에게 매우 편안하고 아름다운 삶을 보장해줄 것이라는 논리는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이런 논리는 서구 강대국이나 다국적 기업의 정당성을 대변해 주는 것에 불과하다. 서구 강대국과 다국적 기업은 인류 개개인의 행복을 배제한 채 일방적인 개발을 지속해왔다. 즉 우리가 필요로 하는 개발이 아닌 강제적인 개발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코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제는 지역주의적 경제 모델을 통해 자연 생태시스템과 전통문화를 고려한 개발을 추구해야한다.

슈미트하우젠 : 물론 환경 문제는 개발과 보존의 측면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거시적으로는 생명의 논리로 접근해야 한다. 불교는 모든 생명체를 자기 욕망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같이 살아가는 동일한 중생으로 생명을 이해하는 공동체적 윤리관을 추구하고 있다. 개발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를 죽이는 행위다. 이런 점에서 개발론자들에게 불교의 공동체적 윤리관의 당위성을 이해시키고 그들을 설득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황우석 : 난 생명과학을 전공하는 과학자이지만 환경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한다. 과학의 발전이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켰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의 사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학의궁극적인 지향점은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는데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대자연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불교 사상은 현대사회가 겪고 있는 환경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슈미트하우젠 : 최근 유럽을 비롯해 서구의 많은 불교인들이 채식주의자이면서 환경주의자로 변해가고 있다. 이는 불교인들이 환경문제에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보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불교인들이 채식을 하거나 환경에 관심을 갖는 것은 불살생계를 중시하는 불교와 채식주의 전통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 생명을 가진 동반자적 존재로서 생물계에 위해를 가하지 않으려고 하는 불교적 사상이 삶의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헬레나 : 환경문제의 해결은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공존의 삶을 통한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다. 진정한 행복은 유기체적인 자연의 일부로서 자신을 경험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에 대해 우리 스스로 깊은 자비심을 발휘하는 것이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기본적인 생각이며 사상이다.

#여성운동의 미래는 불교

그로스 : 환경문제와 더불어 현대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성적, 인종 차별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이 시대 불교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성별 역할이라는 감옥으로부터의 자유’라는 페미니즘이 최근 단순히 남성에 반대하는 것만으로 왜곡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남성에 대한 분노를 일으켜 또 다른 갈등을 유발시킬 수 있다. 올바른 페미니즘이 정착되기 위해서는 불교적 페미니즘이 적용돼야 한다.

헬레나 : 남성을 상정하고 이에 반대하는 페미니즘과 모든 것을 포용하는 불교적인 입장과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 같다.
그로스 :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견해 자체가 다르다. 페미니즘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별 역할이라는 감옥으로부터의 자유’라고 정의한다면 페미니즘과 불교페미니즘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페미니즘을 단순히 ‘남성에 반하는 것(anti-men)’으로 본다면 이는 불교페미니즘과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불교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집단도 적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페미니즘은 남성에 대한 또는 어떤 사람, 집단에 대해 분노를 유발시키고자 하는 측면도 있지만, 불교는 수행을 통해 분노를 해독시킬 것을 가르친다.

헬레나 : 불교적 페미니즘은 대립적 관계보다는 양성 평등적 개념으로 결국 남성, 여성이라는 고정된 틀을 깨고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로스 : 옳은 말이다. 일반적으로 불교사를 보면 남성중심적 시각에서 연구 해석돼 왔다. 가령 경전도 남성중심적 시각에서 기록되고 보존돼 왔으며, 초기불교에서는 여성성불도 인정되지만 여성 혐오적인 시각도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불교 페미니스트 학자는 본래 부처님의 가르침과 합치하지 않는 과거의 왜곡된 전통을 바로 잡아야 한다. 또 성별 문제에 대해 경전이 포함하고 있는 미묘함, 복합성, 애매성을 분석해 그러한 자료의 적절성을 밝혀내야 한다. 뿐만아니라 불교역사 속에서 여성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정확하면서도 활용 가능한 역사’를 찾아내는 것이다.

슈미트하우젠 : 결국 페미니즘도 불교의 핵심사상인 평등에서 찾을 수 있다. 남성 중심적, 인종 우월성이 배제되고 모든 생명이 동일한 객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면 이 또한 쉽게 해결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로스 : 다시 말하면 ‘남성은 오직 남성적이어야만 하며, 여성은 여성적이어야 한다’는 관념, 관습, 문화가 바로 인간을 속박하는 감옥이며, 이로부터의 자유가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바가 돼야 한다. 따라서 여성해방은 곧 남성해방이며 인간해방을 의미하는 양성(평등)적 인간상을 추구해야 한다.

#과학의 미래는 불교

황우석 : 생명공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로서 불교는 과학과 거리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 만큼 불교는 과학적이라는 점이다. 현대사회가 첨단 과학사회로 변화 발전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사고와 합리적인 생활방식이 필요하다. 해석여하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불교가 첨단 과학의 이론적 바탕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헬레나 : 불교를 공부하고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흔히 불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과학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과학을 어떻게 정의 내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과학을 유럽의 데카르트 등으로부터 기원한 사고의 체계라고 정의한다면 불교가 과학적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과학적 사고는 지나치게 단순화되고 기계적인 것으로 자연세계의 연기관계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는 궁극적으로 살아있는 세계의 작용원리에 대해 합리적이고 사려 깊게 정의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황우석 : 전적으로 동감한다. 불교가 과학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하고 기계적인 사고가 아닌 불교 사상의 큰 틀에서 접근한 것이다. 예를 들어 불치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줄기세포를 복제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자비심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 같은 생명 공학의 기본 정신은 새로운 성과를 내기 위해 단순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겠다는 자비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과학은 불교 사상을 적용하고 때로는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한 적극적인 수단인 것이다.

헬레나 : 최근 동물복제, 인간복제 등을 두고 생명윤리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황우석 : 이런 우려와 지적에 대해 겸허하게 받아 들이려는 입장이다. 그리고 과학자로서 과연 이 생명공학이 종교-과학-윤리학적 측면에서 어긋나는 것인지를 늘 고민하고 이를 통해 바람직한 결론을 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할지라도 비판을 무조건적으로 외면한다면 끝없는 갈등만 계속될 것이다. 생명공학이 불교적 관점에서 옳은 일인지는 정확히 결론 내릴 수 없지만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한 자비의 실천이라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슈미트하우젠 :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자기 욕망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즉 소유와 소비가 행복의 조건인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이런 소비와 소유문화가 자연의 착취와 자원의 낭비, 헛된 욕망을 부추기고 갈등을 초래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과학도 이런 자기 욕망과 편리의 극대화를 추구한다면 더 많은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국불교의 과제와 대안

황우석 : 한국불교에 대해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지만 최근 한국불교는 여성중심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것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남자불자들의 대부분은 사회활동을 한다는 핑계로 신행활동에 있어 여성 불자들에 비해 미진했던 것이 사실이다. 사회활동을 많이 하는 남성 불자들이 늘어난다면 우리 사회가 좀 더 맑고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슈미트하우젠 : 아직 한국불교를 접할 기회가 적어 문제와 대안을 제시하기란 힘들다. 그러나 2002년 인도철학회에서 개최한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하면서 한국을 처음 방문했고 이 기간동안 조계사에서 대학입시를 위한 기도법회가 열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 장면을 목격하고 한국불교의 인상이 상당히 기복 불교적 성격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초기불교에는 기복의 모습이 많이 나타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오늘날 모든 종교현상을 자신의 학문적 잣대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것이다. 자칫 불교를 알맹이 없는 껍데기 불교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헬레나 : 초기불교에서 기복적인 요소가 부정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슈미트하우젠 : 그렇지만은 않다. 신앙행위들은 불교라는 종교의 기본적인 토대로, 해탈과 열반으로 나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다만 불자라고 하면 불교의 기본윤리인 오계를 지켜야 하는 만큼 이러한 신행 형태 또한 불교의 오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할 것이다.

그로스 : 한국의 불교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유학생들을 통해 한국불교의 전통에 대해 이야기들은 적이 있다. 한국불교는 1000년 이상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만 외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불교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불교가 또는 한국불교학이 세계화 될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들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슈미트하우젠 : 한국불교를 세계화하기 방법으로 몇가지를 제안하고 쉽다. 우선 한국불교와 관련된 논문이나 저술을 영문으로 발간해야 한다. 이는 아무리 탁월한 논문이 있어도 다른 나라에서 읽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듯 세계 불교학계의 보편어로 자리잡은 영어로 한국불교학의 성과를 알려야 한다.

또 세계적인 권위자들에게서 한국 학생들이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는 그 옛날 한국이나 일본 스님들이 불교를 배우기 위해 중국이나 인도로 갔듯 수많은 학술잡지와 필사본을 접할 수 있는 곳에서 공부할 때 보다 빨리 국제적인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범어와 팔리어를 완벽하게 습득하는 것이 필요하다. 굳이 인도불교를 전공하지 않고 중국불교나 한국불교를 공부하더라도 불교원전어에 대한 이해는 불교를 보다 폭넓고 깊이 있게 연구할 수 있도록 하는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정리=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