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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상〉

기자명 법보신문

친일승려 맞서 조선불교 지킨 고승


<사진설명>한영 스님은 한일합방 이후 친일 승려들에 맞서 조선불교를 끝까지 지켰다.

영호 박한영(映湖 朴漢永) 스님은 1870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나 19세에 전주 위봉사에서 출가, 26세 때에는 설유 처명스님의 법을 이어 영호(映湖)라는 법호를 얻고 석전(石顚)이라는 시호(詩號)를 얻었다.

“100년 후 보고 인재 키워야”

1910년 한일합방 후 우리불교를 일본불교에 합종하려는 친일승려들에 맞서 조선불교를 끝까지 지켰고, 서울 안암동 개운사에 대원불교강원(大圓佛敎講院)을 세워 청담, 운허, 조정현 등 걸출한 승려들을 배출했으며 서정주, 신석정, 조지훈, 김달진, 김어수 등 기라성 같은 한국의 대표시인들을 길러냈다.

조선불교최고지도자인 교정(敎正)으로 추대되었고, 불교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우리 불교계의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전심전력하다가 1948년 전북 내장사에서 세수 79세, 법랍 61세로 열반에 들었다.

한영스님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합병 된 후 망국의 한을 안고 서울 안암동 개운사에 불교강원을 세웠다. 이름하여 대원불교강원(大圓佛敎講院). 조선불교를 조선불교 답게 지키고 살리는 길도 인재양성에 달려있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일도 인재양성에 달려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한영스님은 조선불교계에서 선교(禪敎) 양종에 달통한 분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었고 특히 교학에는 불교경전은 물론 유교, 도교, 역사, 천문, 지리까지 훤히 꿰뚫고 있어서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선비, 오세창, 정인보, 최남선, 변영로, 홍명희, 권동진, 여귀형 등이 수시로 한영스님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이렇게 유명한 분이 강원을 열었다고 하니 팔도강산 곳곳에서 젊은 학인들이 개운사로 모여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개운사의 대원강원에는 30여명에서 40명에 이르는 학인들이 북적거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 많은 젊은 학인들을 먹이고 재우는 일이 보통일이 아니었다. 잠자리가 좁으니 칠성각까지 학인들 숙소로 이용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뭐니뭐니해도 먹이는 일이었다. 당시 대원강원에 공부하러 오려면 일인당 매월 쌀 소두 세말씩을 가져오게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학비를 따로 받는게 아니라 자기가 한달 먹을 식량을 자기가 짊어지고 와서 공부하면 되었다.

그러나 일인당 한달에 가져와야 하는 쌀 소두 세말이 제대로 들어오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니 강원에서는 늘 식량이 모자라기 일쑤였으나 그렇다고 어느 사찰에서 도와주는 일도 없었다. 모두가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이었으니 가정에서나 사찰에서나 넉넉한 밥을 먹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었다.

식량만 모자란 게 아니었다. 40여 명의 젊은 학인들이 무섭게 먹어 대는 판이라 강원에는 그야말로 소금, 간장, 된장, 고춧가루, 시래기, 깨소금, 식초, 빨랫비누 등 무어 한가지인들 남아나는 게 별로 없었다.



<사진설명>한영 스님의 부도.

“돈 한가지면 다 해결되느니라”

대원강원 공양간 살림을 맡고 있던 공양주 법공은 견디다 견디다 못해 어느날 한영스님께 담판을 하게 되었다.

“스님, 강원 문을 그만 닫고 학인들을 모두 돌려 보내주십시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매월 내기로 되어 있는 식량조차 가져오지 않으니, 쌀도 없지요, 장작도 없지요, 소금도 없지요, 간장도 없지요, 된장도 없지요, 깨소금도 없지요, 식초도 없지요, 하다 못해 묵은 김치도 다 떨어지고 없으니 무슨 수로 학인들 밥을 해먹일 수 있겠습니까?”
“허 그 녀석 참 뭐가 그리 없는 게 많다고 잘도 주워 세는구나 그래. 내가 보기에는 한가지 만 있으면 되겠구먼”
“아이구 아닙니다요 스님. 정말이지 하나에서 열까지 모조리 다 없다니까요 스님.”
“야 인석아, 옛날 선비 얘기 듣지두 못했냐? 없는 게 많다고 수십 가지를 주워 셌지만 그거 모두 다 돈 한 가지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게야 이 멍청한 녀석아!”
한영스님은 벽장을 열고 아주 소중히 간직해오던 옛날 책 한권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싸들고 효자동에 있던 최남선의 사설 도서관 일남각으로 갔다.

“여보시게 육당, 그대가 이 책을 꼭 갖고 싶다고 하셨겠다? 오늘은 그 소원을 성취하게 되었으니 돈 3십 원만 나에게 주시고 이 전적을 갖도록 하시게.”
한영스님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귀중한 옛 전적을 육당 최남선에게 강매(?)해서 그 돈으로 대원강원 학인들의 허기를 달래 주었다.

문전박대에도 “바위굴틈서 자자”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한영스님의 제자사랑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육당 최남선은 뒷날 스님 모르게 그 옛 전적을 다시 개운사로 가지고 와서 그 자리에 그대로 넣어두게 했다. 물론 이 일을 나중에 알고 한영스님이 노발대발 하셨지만, 육당 최남선은 한영스님을 부모님 모시듯 극진히 모셨다. 어디 그뿐이었으랴. 육당 최남선은 한영스님을 모시고 금강산, 묘향산, 한라산 등 팔도강산 유람을 여러 번 다녀오기도 했는데 한번은 한영스님과 함께 금강산 장안사에 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한 일도 있었다.

당시 한영스님은 조선불교임제종 교정이셨으니 지금으로 말하면 종정스님이신 셈이었다. 영호스님과 최남선은 등산객 차림으로 금강산 장안사에 당도했는데 영호스님이 법당참배를 마친 뒤 종무소에 들러 객실 한 칸을 부탁했다. 그러나 이 노스님이 이 나라 불교계 최고의 어른이신 교정스님인줄 모르는 장안사 종무소 승려는 일언지하에 객실이 없다고 문전박대를 했다.

그러나 영호스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대로 물러나와 어디 바위굴 틈에서라도 하룻밤 지내자는 게 아닌가. 공무(公務)로 온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금강산 유람객으로 왔으니 교정이라는 신분을 굳이 밝힐 필요가 없다는 게 한영스님의 고집이었다.

그러나 육당 최남선이 참지 못하고 종무소에 가서 대성 일갈, “바로 저 노스님이 조선불교 교정이신데, 세상에 그래 객실 한 칸 없다고 문전박대를 할 수 있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장안사가 발칵 뒤집힌 건 물론이었고 그 바람에 교정스님이 동찬노숙을 가까스로 면하게 되었다. 아마도 육당 최남선이 밝히지 않았다면, 영호스님은 그대로 바위굴을 찾아 동찬노숙을 기꺼이 즐겼으리라.

윤청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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