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장서도 ‘관세음보살’[br]“생존하면 불법 펴겠다” 서원
6.25 전장서도 ‘관세음보살’[br]“생존하면 불법 펴겠다” 서원
  • 채한기
  • 승인 2004.06.2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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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뭣꼬’ 30여년 如眞 유재설 거사
전국 재가선방서 수행 지도

불교계에서는 여진(如眞)거사로 알려져 있는 유재설 옹. 20대 불교와의 인연을 맺은 후 30대부터 원각회를 비롯해 전국불일회 사무총장과 부회장을 맡는가 하면 30여년의 수행 정진을 바탕으로 법련사, 백화도량 담선법회, 평촌 보림사 시민선원에서부터 지방 법회까지 두루 다니며 재가자들의 수행을 독려하고 지도해 왔다.
여진 거사가 이처럼 20대 청춘시절부터 포교와 수행에 매진한 연은 6.25전장에서 부처님께 약속한 서원에서 시작된다.
세속나이 18살 때 처남(여진 거사는 조혼했다)의 천수경 독경을 옆에서 지켜보고는 금새 따라하며 사경까지 해 냈던 여진 거사는 전생부터 남다른 불연이 있었던 듯 싶다. 그런 그가 아내 뱃속에 둔 아이를 두고 1951년 1.4후퇴 직전 군에 입대했다. 그의 나이 22살이었다.

전장에서 엄습해 오는 죽음의 공포. 더욱이 후방에 아내와 아이를 두고 온 청년 아버지로서의 생존 바람은 더욱 간절했을 것이다. 훈련하는 도중에도 ‘하나, 둘, 셋’ 대신 마음으로는 ‘관, 세, 음, 보, 살’을 염했고 전투시에도 ‘관세음보살’ 정진은 계속됐다. 1952년 9사단에 배속된 그는 당시 백마고지 전투에 참여했다. “동부전선에서 죽을 고비를 10번도 더 넘겼다”는 여진 거사는 이 때 서원을 세운다. “만약 부처님 가피로 전쟁터에서 살아남는다면 불법을 펴는데 내 여생을 바치겠다.”

여진 거사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살아 남았다. 당시 작전 하사관으로서 상황파악이나 명령 등을 유효 적절하게 해 아군의 희생을 적게 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무공훈장도 받았다.
제대 후 그는 부처님께 올린 약속을 하나씩 실천해 갔다. 1965년 원각회 총무를 10여년간 맡으며 청담 스님의 금강경과 신심명 강의를 비롯해 각종 대중법회를 주관하며 나름대로 공부에 매진했다. ‘여진’은 청담 스님이 주신 법명이다.

여진 거사는 수행원력을 다시 한 번 세웠다. “경전 공부를 하면서도 좌선은 하고 있었지만 화두는 받지 못했습니다.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받아 들어야 참선진의에 드는 것이기에 성철 스님을 찾아뵙기로 결심하고 도반 20명과 함께 해인사로 내려갔습니다.”

구산 스님 슬하서 ‘시심마’

21명의 재가자를 본 성철 스님의 첫마디는 “3,000원 내라”였다. 이 뜻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았던 여진 거사는 도반을 이끌고 법당에 가 3,000배를 올린 후 다시 큰 스님을 친견했다. “이번엔 목탁을 치며 3,000배를 하라.” 두말 않고 다시 법당으로 향했다. 6,000배를 끝냈으나 큰 스님은 “1,000배를 더 하라”고 명했다. 7,000배를 마치고서야 ‘마삼근(麻三斤)’화두를 받았다. 그 때 여진 거사의 나이는 41세. “참선을 하기에 좀 늦은 게 아닌 가도 생각했지만 지금부터라도 목숨 걸고 이생에 화두를 타파하자고 굳게 마음 먹었습니다.”

여진 거사는 성철 스님이 내린 ‘마삼근’화두를 지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화두를 받자 마자 성성하기는 어려운 일. ‘마삼근’화두는 마음처럼 지어지지만은 않았다고 술회한다. 이 때 서울 경복궁 앞에 유수의 사찰인 법련사가 들어섰다. 사찰 창건과 함께 구산 스님의 ‘수심결’강의가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여진 거사는 법련사와의 인연을 맺었다. ‘수심결’은 물론 ‘육조단경’까지 들으며 정진해 가자 현호 스님이 청을 해 왔다. 새롭게 조직된 불일회를 활성화시키는데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원각회를 이끈 경험이 있던 여진 거사는 쾌히 받아들여 전국불일회 사무총장을 맡았다. 불일회서 일을 보던 여진 거사를 구산 스님이 놓칠 리 없다.

기도 정진 기간이었던 어느 날 구산 스님이 여진 거사를 불러 물었다. “3일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저는 용맹정진을 하겠습니다.” 순간 그의 그릇을 알아 본 구산 스님은 “내 제자가 되라”며 재가상좌로 받아들인다. 이 때 구산 스님이 손수 글로 써 내려준 화두는 ‘ 是甚 (시심마)’였다. 지금도 여진 거사는 아침 예불 때 이 ‘시심마’앞에서 예를 올린다. 구산 스님의 여진 거사에 대한 각별한 마음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하루는 스님이 전화를 한 통 걸어오셨는데 송광사로 내려오라는 겁니다. 하시는 말씀이 무등산에 피가 흐르고 서울이 소란할 것이니 산사에 와 마음을 닦으라는 겁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5.18광주 사태였습니다.”

여진 거사는 갖고 있던 재산(?)을 처분 해 송광사로 아내와 함께 내려가 ‘조계산장’을 마련하고는 수행에 들어갔다. 송광사로 내려간 지 6개월쯤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조금이라도 경계가 나타나면 구산 스님을 뵈어 왔지만 여느 날과는 다른 감흥이 있었던 터라 아침밥 먹고 곧장 스님께 달려갔다. “앞뒤가 끊어지면서 분별도 끊어지는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스님은 손수 쓰신 글 한 점을 여진거사에게 건넸다. ‘노서입각’(老鼠入角). 늙은 쥐가 뿔 속에 들어가 꼼짝 못하고 갇힌 상태다. 여진 거사는 정진하고 또 정진해 갔다. 구산 스님의 큰 그늘에서 6년을 수행하던 여진 거사는 그러나 1983년 12월 구산 스님이 열반에 들자 아내와 함께 곧바로 상경했다.

하루 10분이라도 앉아라

이 때부터 여진거사의 행보는 전국을 향했다. 법련사, 보림사, 백화도량 등 유수의 도량에서 재가불자를 위한 참선법문은 물론 수행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불일회만도 인천, 온양, 여수, 진해, 창원 법회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인천에서 10년이고 온양에서만도 8년이다. ‘불법을 펴는데 남은 여생을 바치겠다’는 전장에서의 서원을 실천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수행은 ‘스님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풍토를 감안하면 여진 거사의 이러한 노력은 실로 값진 것이었다. 수행을 하려 해도 지도조차 받기 어려웠던 8,90년대에 여진 거사는 재가자들의 수행고양을 위해 묵묵히 애써 왔던 것이다. 현재 불고있는 수행열풍은 여진 거사와 같은 재가불자들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75세인 지금도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6시까지 좌선에 들고 있다. 아침 공양 후 7시께 모락산에 올라 포행과 좌선을 겸하고는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다시 오후 정진이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저녁 8시 1시간 동안 정진한 후 9시에 이르러 잠자리에 든다.
“수행이 아니고서는 부처님 법을 체득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여진 거사는 “하루 10분이라도 좌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행을 하려면 신심(信心), 분심(奮心), 의심(疑心) 삼요(三要)를 발해야 합니다. 옛 선사들은 큰 의심이 있어야 크게 깨닫는다고 했습니다.”
참선 지도에 있어서는 지도자들마다 약간씩 다른데 여진 거사는 보조 스님이나 구산 스님의 가르침을 잇고 있다.
“바깥 경계가 공(空)해지고 안 경계가 성성(惺惺)해야 합니다. 화두와 의심도 하나가 되어야 성적등지(惺寂等持)를 이룰 수 있습니다. 화두만 있고 의심이 없어도 옳지 않고, 의심만 있고 화두가 없어도 옳지 않습니다.“
여진 거사가 전하는 ‘성적등지’는 선가에서 말하는 ‘성성적적(惺惺寂寂)’과 맥을 같이 한다. 여진 거사는 화두를 들어도 번뇌 망상이 밀려드는 도거(掉擧, 혹은 산란 散亂)를 애써 진정시키고 나면 혼침(昏沈)과 무기에 떨어지기 쉽다고 한다. 여진 거사는 도거가 사라지면 공적(空寂)하게 되고, 혼침과 무기서 벗어나면 성성(惺惺)하게 되는데 공적과 성성, 성성과 공적이 함께 이뤄질 때 성적등지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이쯤 되어야 비로소 화두가 온전히 들린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간절하게 해야 합니다. 정말 성심을 다하고 다해서 간절하게 화두를 들면 소식은 있습니다. 다만 한 소식 한 소식에 머물지 말고 경계가 나타날 때마다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은 스님들이 재가자들의 점검을 위해 애쓰고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아직도 체계적으로 이뤄지는데는 역부족인 듯 싶습니다.”

숲 속의 한 고목 보는 듯

불자들이 “수행을 한 후로 사람이 달라졌다”는 말을 할 때 가장 보람 있다는 여진 거사는 지금도 서초동 청룡사와 경기도 오산선원서 참선지도와 법문을 하고 있다. 여진 거사는 숲 속의 한 그루 고목과 같았다. 도편수가 기둥으로 쓰든 안 쓰든 관여하지 않고 그저 한 그루 나무로 존재하며 숲을 이루고 있는 느낌 그대로였다.

催殘枯木倚寒林하니 幾度逢春不變心고
樵客遇之猶不顧커니 人那得苦追尋고

“베고 버려진 고목이 또한 찬 나무를 의지하니 몇 번이나 봄을 만나도 마음 변치 않았던고. 나뭇꾼도 오히려 돌아보지 않거늘 편수(片手)가 이를 어찌 간절히 추심할까보냐.”(대매법상 게송)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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