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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Well-Being과 Well-Dying

기자명 법보신문
‘잘 산다’는 곧 ‘잘 죽는다’

삶과 죽음 둘이 아니다



잘 죽는다, 잘 산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할까.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으므로,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 유행하는 단어가 바로 ‘Well-Being’이다. 웰빙은 바로 ‘잘 사는 것’ 혹은 행복을 뜻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잘 사는 것일까. 웰빙은 잘 죽는 것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웰빙을 단지 자기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문제에만 국한시켜도 될까.

우리의 삶에는 사회적 출세라든가 경제적 재산 등 세속적 성취가 중요시된다. 하지만 세속적으로 아무리 성공했다 해도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음의 길을 편안히 떠나는 데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 세속적인 가치는 삶에만 통용되는 제한된 가치만 지녔을 뿐이다.

최근 사회 지도층 인사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삶을 마감해 사회에 충격을 준 일이 있듯이, 평생 세속적인 성공만을 도모하는 사람이 죽을 때 편안하지 못한 모습으로 임종하는 사례가 많이 있다. 사회적 출세만 지향했을 뿐이지, 죽는 방식이라든가 죽음 이후를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을 것이므로,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들이 잘 산다는 말을 잘 죽는다는 말과 연결시켜 받아들이기 어려울 듯싶다. 그만큼 우리는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을 하나로 이해하기보다 별개로 생각한다는 뜻. 그러나 불교 혹은 생사학의 입장에서 보면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므로, ‘Well-Being’은 ‘Well-Dying’과 다른 것일 수 없다. 다시 말해 잘 산다는 말의 의미는 곧 잘 죽는다는 의미이어야 한다.

죽는 순간, 누구나 두 가지 질문에 접하게 된다. : 첫째 어떤 삶을 살았는가. 둘째 죽는 순간 어떤 마음을 지녔는가. 첫째 질문은 세속적 성취를 묻는 질문이 아니다. 삶의 시간 동안 영혼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주위 사람에게 사랑을 얼마나 베풀었는지, 어떤 인간인지 묻는 것이다. 둘째 질문의 경우, ‘죽음은 성장의 마지막 단계’라는 말이 있듯이, 죽음이란 관문에 당해서 마음에 흔들림 없었을 정도로 영혼이 성숙했는지, 얼마나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에 임했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이다. 두 가지 질문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서로 다르지 않는 질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Well-Being’을 ‘Well-Dying’의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웰빙을 세속적 풍요의 관점에서 보아서는 안 된다. ‘Well-Being’에서 ‘Well-Dying’이 빠진다면, ‘Well-Being’은 ‘Well-Being’이 아니라 ‘Ill-Being’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세속적인 것을 전적으로 무시하자는 말은 아니다. 사회에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세속적인 것을 무시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다만 세속적인 성취에 지나치게 빠져들지 말고, 어느 정도 한계를 그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 모두에 통용되는 가치는 없는가. 물론 양쪽에 통용되는 것이 있다. 우리가 죽을 때 세속적인 성취를 포함해 육신을 벗어놓은 채 영혼만이 홀로 죽음의 길을 떠난다. 죽음의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신용카드, 사회적 신분, 경제적 능력에 의지할 수 없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영혼뿐이다.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를 말한다. 살아있을 때 삶을 영위하는 주인공도, 죽음의 길을 떠나는 주인공도 바로 우리 마음이라는 뜻. 따라서 죽는 순간 세속적 성취나 육신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 자기 마음을 어떻게 썼느냐, 혹은 영혼을 얼마나 성장시켰느냐 하는 것만이 의미 있다.『금강경』에서 “그 어디에도 머무름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고 말하면서, 마음공부를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삶의 시간 동안 자기 영혼을 성장시켜 죽는 순간 흔들림 없이, 아무 애착 없이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삶과 죽음을 통해 여행을 하는 것, 이 세상 사바세계가 고통을 받으면서 살 수 밖에 없는 감인 세계인 까닭 역시 자기의 영혼을 성장시키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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