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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위대한 여정

기자명 법보신문

강가〈갠지스〉에서 生滅의 흐름을 보았네

다섯 비구 머무는
바라나시 향해
진리의 첫
수레바퀴가 구르다


<사진설명.강가(Ganes)의 일출! 인도인들에게 이 성스러운 강은 삶 그 자체이자 세상을 윤회시키는 힘의 원천이다. >

우루벨라에서 함께 고행했던 다섯 명의 도반을 교화하기 위해 붓다는 바라나시를 향해 출발했다. 걸음걸이가 무겁지는 않았지만 약 300킬로미터에 이르는 머나먼 길을 나서는지라 그의 표정에는 약간의 비장한 기운마저 흘렀다. 하긴, 어찌 비장하지 않을 수 있으랴. 오랜 고민 끝에 전법의 대 결단을 내리기는 했지만 이를 알아들을 이가 얼마나 있을 것이며, 또 있더라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가르침을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걱정이 줄곧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전법의 결단을 내린 이상 그런 문제에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마음을 단단히 추스린 붓다는 한 발짝씩 바라나시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붓다에 의해 진리의 수레바퀴가 막 구르는 순간, 적막 같은 고요가 밀려들었다. 산천도 온갖 짐승과 새들도 숨소리를 죽여 이 경건한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적막강산, 장엄한 여정의 시작에 초목산천조차 경의를 표하는 것이리라. 붓다는 자신의 첫, 그리고 긴 여정을 라즈기르와 나란다를 거쳐 파트나, 그리고 강가(Ganges)를 건너 바라나시에 이른 후 사르나트로 가는 순으로 이어가기로 했다.
비록 일체의 위신력과 능력을 갖춘 붓다였지만 천리에 가까운 길을 걷는다는 것은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작열하는 태양, 때때로 무섭게 휘몰아치는 비바람, 밤낮 없이 덤벼드는 들짐승과 날짐승들, 그리고 고독과 지루함이 가져다주는 난관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고향 카필라바스투처럼 멀리 산이라도 보인다면 그래도 좀 나을 것이지만 끝없이 펼쳐진 평원과 지평선의 한없는 이어짐은 뜨거운 날씨만큼이나 심신을 지치게 할 것이 분명했다.

<사진설명.인도인들은 강가(Ganes)에서 목욕하면 모든 죄를 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곳에서는 종종 순례객들이 목욕하는 물 위로 타다 남은 시체가 떠다니는 웃지 못할 장면이 벌어지곤 한다.>

그러나 붓다의 표정에는 이를 개의하는 흔적이 일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발가락이 부르트고 물집이 잡혔다 터지기를 계속했지만 그런 정도가 장애가 될 수는 없었다. 어떻게 이 깨달음을, 이 진리를 전할 것인가에 골똘한 그에게 그런 조건들은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때때로 마주치는 들짐승과 날짐승들은 길벗이 되어주었고, 세찬 비바람은 더위를 식혀주는 청량제 역할을 해 주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적막과 고독은 자신의 깨달음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귀중한 시간에 다름 아니었다.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 어디부터가 하늘이고 땅인지의 경계가 모호한 지평선이 이뤄내는 조화는 지루함을 더하는 장애가 아니라 되레 진리의 시공관적 본질을 읽어내는 공부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기실, 붓다에게 있어 천지만물 가운데 어찌 의미 없는 것이 있을 수 있으랴. 불교학자들 가운데서 붓다의 깨달음이 사실상 수자타 처녀가 공양한 우유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미죽(Yogurt)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거의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지 않은가.

붓다는 걷다가 배가 고프면 가장 가까운 민가에 들러 탁발을 했다. 때때로 탁발이 제대로 되지 못할 때면 굶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밤이 되면 이슬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쉬었고, 폭염이 내리쬘 땐 나무 아래 그늘을 찾았다. 입고 있던 옷가지는 조금씩 남루해져 갔지만 최고의 진리, 완전한 지혜를 성취한 그가 뿜어내는 상서로운 기운은 갈수록 알 수 없는 힘을 더해갔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일단 풍기는 면모에서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어느 날, 붓다는 한낮의 불볕더위를 피해 나무그늘을 찾아 들어갔다. 마침 지나가던 벌거숭이 수행자가 나무 밑에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다가왔다. 나체 수행자 집단에 속해 있던 그는 붓다가 자신과 같은 수행을 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와 살펴보자 나무 아래에 앉아 잠시 쉬며 명상에 잠겨 있는 붓다의 모습은 그가 이제까지 보아온 다른 수행자들과는 크게 달랐다. 옷가지는 해졌지만 용모는 뚜렷하게 밝았으며, 맑고 깨끗한 피부, 평온하고 고요하게 가라앉은 표정, 게다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운 기운이 뿜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벗이여, 그대는 출가하여 누구를 따르는가? 그대의 스승은 누구며 어떤 교의를 믿는가?”
“나는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났다네. 갈망은 사라지고, 내 마음은 스스로 이룩한 지혜를 통해 자유롭게 되었으니, 내 누구를 스승이라고 할 수 있겠나. 벗이여, 세상이 내 스승이라네. 나는 세상에 홀로 있으며, 홀로 남아 있을 걸세.”(‘싯다르타의 길’에서 인용)

붓다로부터 생소한 답변을 들은 이 수행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떠났다. 그로서는 처음 듣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진설명.바라나시로 가는 길에 건너게 된 다리. 붓다는 이 강을 걸어서 건넜다.>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 제자들을 찾아 어려운 여정을 떠나는 붓다의 모습이란 진정한 스승이 사라진 오늘날 값진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마하보디 대탑에서 수계식을 마친 우리 일행은 오전 10시 경 숙소인 로터스 니코 호텔을 나섰다. 목적지인 바라나시에는 오후 9시 30분 경 도착예정이니 무려 12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야한다. 12시간 버스를 타야 한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순례 일행 중 일부는 비명을 닮은 탄성을 내기도 했다. 아마도 눈앞이 캄캄해진 모양이다. 그러나 붓다는 이 길을 맨발로 걸었다는 순례단장 김재일 법사(동산반야회)의 ‘일갈’에 분위기는 일순간 숙연해진다.
왕복 2차선의 길이 트럭으로 가득 메워져 있다. 트럭 행렬의 앞과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한번 행렬이 멈춰서면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다. 말 그대로 길 없는 길이다. 그러나 짜증을 내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태연하게 차에서 내려 온갖 잡담을 늘어놓고 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만만디란 중국인이 아니라 인도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더 적당하다고 해도 틀리지 않으리라. 다행히 우리 버스의 운전기사와 조수가 베테랑들이어서 능숙한 끼어들기로 시간을 단축하고 있다. 때론 갓길을 내달리기도 하고 중앙선을 넘나들기도 한다. 아찔한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더위에 지치고, 덜컹거리는 버스에 시달리기를 얼마나 더 해야 할 것인가. 당장 서울행 비행기를 구해달라는 거사도 있고, 체력이 달려 아예 버스 좌석에 누워버린 보살도 나타났다. 지루함을 덜기 위해 노래도 부르고, 길가에 우물이 있는 민가가 나타나면 내려서 몸을 적시기도 했지만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 이 길을 무려 3개월에 걸쳐 걸었던 붓다에 비한다면 버스를 탄 우리들은 호강을 하는 것이란 생각으로 힘겨운 순간을 견디고 있다.
강가, 우리에게는 갠지스란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이 강은 붓다가 바라나시로 오기까지 함께 해온 거대한 강줄기이다. 특히 바라나시의 강가에는 연평균 100만에 달하는 순례자들이 모여들어 목욕재계를 한다. 바라나시의 강가에는 붓다가 전법을 위해 건너려는 과정에서 생긴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온다.

긴 여정 끝에 바라나시의 강가에 이른 붓다는 강을 건너기 위해 한 나룻배를 세웠다. 사공에게 ‘수행자여서 가진 돈은 없지만 저 건너까지 건네 달라’고 부탁하자, 사공은 ‘돈이 없으면 누구든 배를 태워줄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거듭 부탁을 했지만 사공은 막무가내였다. 이에 붓다는 혀를 쯧쯧 차면서 ‘큰 복을 지을 기회를 스스로 내차는구나. 지혜의 눈이 없으면 어리석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고 이른 후 강물 위를 성큼성큼 걸어서 건넜다. 바다처럼 넓은 강물 위를 걷는 붓다를 본 사공은 아연실색했다. 뒤늦게 위대한 수행자에게 보시해 복을 지을 기회를 잃은 것을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것을 어쩌랴. 훗날 사람들은 붓다가 이때 걸어서 강가를 건넌 것을 두고 붓다의 첫 번째의 이적이라고 부르고 있다.

밤늦게 바라나시의 숙소 타즈 갠지스 호텔에 여장을 푼 순례 일행은 곧바로 숙면에 들었다. 내일 새벽 저 유명한 강가의 일출을 보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잠을 자 두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에서다.
새벽 다섯 시, 기상과 함께 릭샤를 타고 강가로 달려갔다. 복잡한 시내 여기저기에 우유통 같은 것을 들고 나선 행렬이 즐비하다. 강가의 물, 즉 성수를 담기 위한 그릇이란다. 이른 새벽인데도 강가에 도착하니 명동거리처럼 사람들로 붐빈다. 벌써 화장을 시작한 듯 연기가 치솟고 퀘퀘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말로만 듣던 강가에서의 화장, 또 그 바로 아래에서의 목욕이라는 아이러니한 장면들이 눈앞에서 실제로 펼쳐지고 있다. 삶과 죽음이 함께하는 공간, 이것만으로도 이곳은 성지의 요건을 갖추고도 남음이 있다.

배를 한 척 빌려 타고 강가의 한 가운데로 들어갔다. 동쪽 하늘이 붉어지는 것을 보니 곧 해가 솟을 조짐이다. 드디어 일출! 바다처럼 펼쳐진 강가를 붉은 태양 빛 한 줄기가 갈라놓고 있다. 특이한 장면이다. 빛이 물결에 번지지 않고 레이저 선처럼 뻗쳐질 수 있다니!
2600여 년 전 붓다도 걸었을 비단결처럼 곱디고운 강가의 백사장을 맨발로 걸으며, 나도 모르게 한 편의 시를 읊조리고 있다.

바랄 게 무엇이겠는가,
덧없이 흘러가는 강물인 것을.
살아 움직임과 죽어 흐트러짐
그 틈새 비집는 욕망이
저 강가의 물로 이어졌음을
이 순간 보고 있네.
저 강가를 흐르는 건
물결이 아니라 생멸이라는 것을.

-졸시, ‘강가, 생멸의 강’
urubell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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