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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 현장을 찾아서1 - 日 아미산 유물은 한국 장승

  • 교계
  • 입력 2004.08.1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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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적답사회(회장 조영록)는 지난 8월 중국 아미산, 낙산대불 등을 비롯해 신라 무상스님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불교유적지 등을 답사하고 돌아왔다. 이에 본지는 보광 동국대 불교대학장 스님을 비롯해 해주 불교학과 교수 스님, 조영록·이종찬 동국대 명예교수 등 석학의 눈을 통해 중국불교와 관련해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부분이나 간과했던 부분을 4회에 걸쳐 게재한다.



필자에게는 아미산에 가고싶은 남다른 이유가 있었다. 일본에서 유학 도중 일중우호한시협회(日中友好漢詩協會) 회장을 맡고 있던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교수로부터 중국 아미산에 료우관(良寬)의 시비(詩碑)를 세운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을 들어 보니 1825년 12월에 니이가다(新潟) 해안에서 어부가 2미터 이상의 기둥과 같은 나무토막을 건졌는데, 거기에는 사람 얼굴모양의 조각과 '아미산하교'(蛾眉山下橋)라고 하는 문구가 새겨져있었다.

이것은 중국의 아미산에서 온 것으로 알려져서 많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탁본을 하여 나누어 가졌으며, 중국의 아미산을 그리워하여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 시대는 에도(江戶) 말기라서 강한 쇄국정책으로 지식인들은 중국에 대한 동경심이 높았다.

특히 아미산은 이백의 '아미산월가'(峨眉山月歌)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불교인들은 보현보살도량으로 반드시 한번은 순례하고 싶었던 성지이기도 하였다. 이 때 일본 조동종의 승려이며, 많은 시를 남겼던 료우관(良寬)(1758∼1831)이 1826년에 '제아미산대교항'(題蛾眉山大橋杭)이란 시를 지었다고 한다. 즉



어느 때에 낙성하였는지 모르겠지만(不知落成何年代 )/서법이 아름답고 씩씩하며 또한 청신하구나(書法遵美且淸新 )/아미산 아래에 있던 다리가 분명한데(分明我眉山下橋 )/일본의 미야가와 해변까지 흘러왔구나(流寄日本宮川浜 )

이 시는 점차 유명해져서 일본인들 사이에 많이 회자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야나기다 교수를 비롯한 일본의 지성인들이 모인 일중한시협회에서는 료우관 스님의 시비를 만들어 6000킬로미터나 되는 물길을 따라 가서 아미산에 그 비석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벤트는 일본의 각종 신문과 TV에서 크게 다뤄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기부금을 내어 1990년에 완성되어 현장인 아미산에서 세워지게 되었다.

그런데 필자가 아미산하교의 사진과 실물을 확인하고 깜짝 놀란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어디서든지 흔히 볼 수 있는 장승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꿔주기로 마음을 먹고 장승에 대하여 조사한 결과 아미산의 보현보살신앙과 우리나라의 장승의 관련성을 찾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부터 장승이 있어왔으나 그 역할은 이정표, 마을수호신, 불법수호신, 사찰의 경계표지 등 참으로 다양하였다. 그런데 1742년 오겸(吳謙)이 찬술한 『의종금감(醫宗金鑑)』에 의하면, 송나라 진종(眞宗) 때에 승상인 王旦(왕단)(?∼1017)의 외동아들이 천연두에 걸렸으나 아미산신인의 설법을 듣고 나았다고 한다. 이후부터 아미산은 천연두를 치료하는 신앙의 성지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 아미산신인(峨眉山神人)의 이름은 천모선랑 또는 삼교선녀(三橋仙女) 등으로 불리웠으며, 아미산의 다리 입구에 살았기 때문에 이곳에는 천연두신이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는 바로 보현보살의 화현으로 천연두를 방지하는 방두신(防痘神)으로 신봉되어왔다. 이러한 아미산보현보살의 신앙이 방두신앙(防痘信仰)으로 신봉되면서 우리나라에도 전해졌다. 이미 마을마다 모셔져 있던 장승신앙과 결합하게 되어 보현신앙이 방두장승으로 습합된 것으로 보인다.

천연두가 창궐하던 17, 18세기경에는 우리나라에 아미산으로 불리워진 곳이 110여개소나 되었다. 심지어 궁중에까지 전해져 경복궁의 교태전 뒤에는 가산을 만들어 아미산이라고 이름을 붙여 태자들의 건강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1825년 니가다해변에서 발견된 아미산하교의 장승은 중국의 것이 아니라 설악산 아미산의 장승이 수해로 유실되어 일본에 표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 필자는 1991년 일본인도학불교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여 그 잘못을 지적한 바가 있었다. 그러므로 중국의 아미산에 세워진 시비를 확인하고 싶었던 참이었다. 가서보니 아미산 중턱 청음각(淸音閣) 밑에 아미산교각이 있으며, 그 옆에 비석을 세워둔 것을 보고 서로간의 문화적인 인식차이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보광스님(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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