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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의 절망 끝에도 관음은 계셨습니다”

기자명 법보신문
  • 수행
  • 입력 2004.11.09 10:00
  • 댓글 0

신행수기-관세음보살이 다시 주신 생명 상

월광 「불광」이 창간 30주년을 기념해 실시한 신행수기 공모에서 신화규(47·無碍性) 씨의 ‘관세음보살님께서 다시 주신 생명’이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뇌종양이라는 극한의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희망과 자비의 마음을 잃지 않았던 연꽃 같은 삶. 본지는 「불광」과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 이 글을 2회에 걸쳐 전면 게재한다. 편집자

내소사에 들어서는 순간, 천여 년을 거슬러 올라온 것처럼 세상살이의 시끄러움은 없다. 일주문을 지남과 동시에 날려 보내지 않았나 싶다. 이 곳의 모든 것들은 기본이 몇백년이다. 그래서 그런지 낯설지 않고 정다운 느낌, 오래 전에 와 봤던 곳에 다시 온 느낌이다. 혹시 전생에 이 곳에서 수행하는 복을 누리지는 않았었는지….
유명한 대웅전의 문살무늬, 천년된 나무의 웅장함, 그런 것들을 일일이 따지지 않더라도 그냥 편안하고 좋은 느낌, 이 자리가 바로 내 자리가 아닐까 싶다. 도량석 도시는 스님의 목탁소리에 잠을 깨어 상쾌한 공기와 천년가람의 숨결을 느끼며 들어선 빛바랜 대웅전의 새벽예불. 수술 후 처음으로 혼자 나선 여행길이다.

극심한 두통…알고보니 뇌종양

포교사가 된 지 1년이 되어가지만 아직 제대로 되지 않은 공부에 사람들 앞에서 포교사라고 말하기가 부끄럽기 그지없다. 끝이 없기만 한 부처님 공부, 하지만 운명적인 이 길이기에 나는 기꺼이 이 일을 천직으로 알고 공부하고 싶다. 관세음보살님께서 다시 주신 나머지 인생은 회향하는 의미로 한 알의 의미 있는 씨앗의 역할을 하고 싶다.

6년 전 전철역 계단에서 갑자기 어지럽고 다리에 힘이 풀려 굴러 떨어진 후로 매일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너무 심해서 한 움큼의 진통제로 생활하다가 그것도 안 되자 새벽이면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술을 마시고서야 잠들 수 있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엄마 역할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병명을 몰라 정신병원에 입원하기 직전, MRI를 찍고서야 뇌종양이라는 병으로 판명이 되었다. 급히 수술하지 않으면 혹이 너무 커서 죽는다는 담당의사의 말에 그냥 담담하게 말했다. “선생님 수술 한 번 하나요? 아니면 두 번 하나요?”

뇌수술은 성공해도 기본이 두 번이고 두 번 하고도 결국은 죽은 가까운 친구의 남편을 지켜보았었기 때문에 두 번의 수술이라면 하지 않고 그냥 전국에 있는 기도처에서 원 없이 기도나 하다 죽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때 당시의 상황은 혹이 너무 커서 신경을 누르기 때문에 모든 기능이 정지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먹을 수도 없고 대소변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까지 됐었다. 팔과 다리가 마비되어 걸을 수도, 집안일도 할 수 없었다. 옷을 뒤집어 입거나 거꾸로 입어도 무엇이 잘못됐는지 판단이 안 될 정도로 심한 상태였다. 그 때의 심정으로는 그냥 정확한 병명을 알았으니 됐고, 그냥 그대로 죽어도 이 고통만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제부터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이곳에서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래서 노느니 염불한다고 108염주를 손에 들고 돌리기 시작했다. ‘관세음보살님 살려 주세요’라는 말도 ‘아이들을 부탁해요’라는 원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무심의 마음으로 ‘저는 인연 따라 따르겠습니다. 관세음보살님 뜻대로 하세요.’ 하는 마음으로 염주를 계속 돌렸다.

그 순간 가슴 속으로 치닫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가슴가득 차지한 그 무엇! 그 후로는 두려움도 고통도 없어졌다. 막연한 두려움에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가족들이 계속 설득하고 있던 중이었다. 제일 두려운 것은 수술 후 얼마일지 모르는 막연한 시간 동안 여러모로 나로 인해 고통 받을 가족들을 생각하니 ‘그냥 이대로 조용히 눈감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었다.

염주를 돌리다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선명한 관세음보살님께서 금빛 찬란하게 나타나셔서 땀을 흘리며 더워서 쩔쩔매는 나에게 시원한 냉기를 주시며, “덥지? 내가 시원하게 해줄게 걱정하지 마라.”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것이었다. 그 후론 아무 두려움이 없이 즐겁게 생활할 수 있었다.

“관음보살님, 뜻대로 하세요”

아이들 선생님께도 전화해서 숙제나 준비물이 제대로 되지 않더라도 엄마가 없어서 그러니 이해 해달라는 부탁까지 해놓고 이것저것 언제까지일지 모르는 빈 자리를 최대한 줄이려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수술을 위해 머리를 깎았지만 주위사람들에게 “두상이 이쁘냐, 미우냐?”고 농담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다. 다니던 절의 스님과 신도들이 오셔서 어떤 위로의 말을 할지 몰라 쩔쩔매실 때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반드시 살 거고 다시 살아나면 부처님 일을 할 거예요.” 하고 말씀드렸더니, “보살님은 앞으로 공부 많이 하실 거예요.” 하신다.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그 때는 몰랐었다.

“신화규씨 정신이 드세요. 제 말을 알아 들으시겠으면 눈을 떠 보세요.” 그 말을 듣고 눈을 떴다. 여러 줄로 묶여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나를 둘러싸고 서있는 많은 사람들, 담당의사들과 간호사, 가족들이었다. 눈을 뜬 나에게 의사선생님들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가’ 하는 판단을 여러 가지로 시험해보았다. ‘이름이 뭐라든가, 오른손으로 악수를 하자든가, 왼발을 들어 보라든가’라는 물음에 평상시와 같이 웃으면서 자신 있게 대답하고 하라는 대로 정확하게 하자 모두들 살았다고 박수를 치며 좋아하셨다.

그 때까지는 그냥 원래 예상 했던 대로 6시간의 수술 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 곳은 신경외과 중환자실이었고 나는 20시간의 생사를 가르는 대수술 끝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감동은 남다른 것이었던 것이다.

남편의 말로는 예상된 6시간이 지나고 12시간이 지나도 수술이 끝났다는 불은 안 꺼지고 아침 8시에 첫 번째로 들어간 사람이 저녁때가 되도 소식이 없더니 새벽이 되자 담당의사가 가족들을 소집해놓고 지혈이 안 되니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단다. 그 말을 듣고 남편은 달리 방법이 없어 자기는 부처님도 믿지 않고 하나님도 안 믿고 기도 할 데도 없어서 나에게, “당신은 할 수 있다. 당신은 할 수 있으니 당신의 의지로 꼭 일어나”라고 기도했단다.

수술대 위의 기적

수혈이 40봉 이상은 위험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서 계속 70봉 정도의 수혈을 하고 있을 때 지혈이 되었고, 의사선생님은 자기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서 기다렸을 뿐 말로만 듣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놀라워하셨다.
내가 부처님을 믿는 것을 모르니까 남들이 말하는 신이라는 게 정말 있나 보다고 해서, 나는 조용히 자신 있게 “이건 신의 기적이 아니라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천주교를 믿는 시어머님께도 기독교를 믿는 친구에게도 누구에게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라고….

신화규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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