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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사·정자사 - “무애행 함부로 말라”

기자명 법보신문

중국불교 성지 기행-영은사·정자사

영명선사 일갈 생생

<사진설명>중추절 휴가 때에는 하루 10만여명이 영은사를 참배한다. 대웅보전.

<사진설명>영명연수 선사가 세운 육화탑

<사진설명>영은사 비래봉 암벽에는 330여개의 조각상이 있다.

<사진설명>정자사에 모신 영명연수선사 진영.

<사진설명>순례단은 정자사에서 영명 선사의 ‘지계’정신을 다시한번 되새겼다.

<사진설명>영은사 5백나한전.

중국 7대고도의 하나인 절강성의 성도(城都) 항주는 산과 강, 호수가 한데 어울린 예쁜 도시다. 13세기 무렵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폴로는 항주를 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 칭송했을 만큼 도시는 단아한 멋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로 손꼽히는 ‘서호’는 자연과 인간이 빚은 예술품이라 할 만큼 화려한 자태를 머금고 있다. 이처럼 아름다운 도시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입적한 중국 선사가 한명 있다. “함부로 무애행을 하자 말라”고 일갈했던 영명연수 선사다.

영명연수 선사(905-975년)는 절강 여항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불교를 믿고 살생을 경계하며 방생을 실천했던 스님은 한 때 여항의 창고지기와 화정진 수비대장을 담당했었지만 그의 나이 30살에 옥책사 취암선사를 따라 출가한 후 천태덕소 국사로부터 선지를 깨닫고 법안종의 제3조가 되었다. 매일 108참회를 했던 스님은 하루에 아미타불을 10만번씩 독송했다고 한다.

영명연수 선사는 당나라 말 선종이 폐단에 빠지자 “선사들의 가슴 속에는 선에 대한 이해도 없고, 옳고 그름이 분명하지도 않다”고 일침을 가하며 『종경록』을 편찬했다. 이 책은 모두 100권 80여만자로 되어 있으며 대승불교의 경론 60부와 중국 인도의 성현 300인의 저서를 비롯해 선승의 어록과 계율서, 속서 등을 인용 방증했다.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고 온갖 것이 다 법’임을 드러내 보인 역저다. 이 외에도 『만선동귀집』, 『유심결』, 『신서안양부』, 『정혜상자』, 『경세』등을 저술했는데 모두 전해지고 있다.

서호 입구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영명연수 선사가 창건한 정자사(淨慈寺)가 자리하고 있다. 앞으로는 석조산을 마주하고 있으며 남평산 혜일봉 아래에 위치해 있다. ‘정자사지’에 따르면 954년 오월국 충의왕이 영명연수 선사를 위해 지은 사찰이라 한다. 원래 이름은 ‘혜일영명원’이었지만 송나라 때 ‘정자사’라 이름한 사찰로 1,0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사찰 가람은 그리 크지 않지만 이곳은 영명연수 선사가 자신의 법을 유감없이 펼쳐 보인 자리다. 선사가 선객들을 향해 아니 중국 승가를 향해 던진 일갈이 생생히 들려오는 듯 하다.
“진실로 말한다. 참다운 깨달음은 없고 빈 화두만 배워서 걸음걸음에 유(有)를 행하되 입으로는 공(空)을 말하며, 자신의 업력은 책망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인과가 없으니 술 마시고 고기 먹는 것이 깨달음에 장애가 되지 않고 도둑질하고 간음하는 것이 지혜에 방해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사람은 불법을 만났으나 죽어서 아비지옥에 떨어진다. 스스로 참회하고 제도하지 않으면 백천의 부처님들이 나타나실지라도 너를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

영명연수 선사가 무애행을 허락한 구절은 이렇다.

“만일 심장과 간을 베어도 목석과 같을 수 있는 도력이 있다면 고기를 먹고 술 마실 자격이 있을 것이다. 남녀를 보되 죽은 시체와 같이 보인다면 음행을 해도 되고 재물이나 보물을 보되 흙과 돌같이 볼 수 있다면 도둑질 하라. 비록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섣불리 그런 행동에 마음을 내어서는 안 되며 단지 한량없는 성인의 몸을 증득한 뒤에 비로소 세상의 좋고 나쁨에 걸림없는 무애행을 하라.”

뼛속을 애는 찬바람 같은 일갈이다. 정자사에는 영명연수 선사의 부도탑이 있지만 공개되지 않아 순례단은 참배할 수 없었다. 그러나 40명의 스님들이 법안종의 가풍을 그대로 이으며 수행하고 있다는 전언을 들으며 선사의 법이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영명연수 선사와 인연이 깊은 대가람이 항주에는 또 하나 있다. 중추절 휴가 때면 하루 10만여명이 참배하는 영은사다.

영은사는 326년 인도의 고승 혜리 스님이 세운 사찰로 중국 선종 10대 사찰 중 하나로 꼽힌다. 역사 이래 가람이 제일 클 때는 스님 3,000여명이 상주하고 있었으며 9루, 18각, 72전이었다고 한다.

영명연수 선사는 북송 건륭 원년(960년)오월국 충의왕으로부터 영은사 중수를 맡아줄 것을 요청 받은 후 대작불사를 이뤘는데 불전과 불당이 1300여칸이나 되었으며 영은사는 이 때 크게 일어났다. 현 영은사는 19세기 초엽에 복원된 것이다. 지금도 복원불사가 진행중에 있으며 불사가 회향되면 현 규모의 12배가 된다고 한다.

영은사는 운림선사(云林禪寺)라고도 한다. 천왕전에 ‘운림선사’(云林禪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는 강희황제가 쓴 글씨다. 영은사가 운림선사가 된 사연은 이렇다.

강희제가 남쪽 지방을 순찰하던 중 항주에 들렀을 때 주지 스님이 현판 글씨를 부탁했다. 글자의 비례를 미처 고려하지 못한 강희제는 우(雨)자를 너무 크게 썼다. (일설에는 항주 북고봉에 오른 강희제가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붓을 잘못 놀려서 첫 자를 잘못 쓰자 신하게 귀뜸했다고 전해진다.) 황제가 당황하자 옆에 있던 신하 한 명이 눈치를 채고 ‘운림선사’라고 쓰면 된다고 귀뜸했다. 황제가 ‘운림선사’라 쓴 후 “구름이 숲을 이뤄 령을 만든 절”이라 설명을 하니 모든 신하들과 스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영은사’는 ‘운림선사’라고 불리게 됐다고 한다.

현 대웅보전에는 중국에서 제일 큰 목불이 모셔져 있다. 높이 24.8m의 석가모니 좌상은 1952년 정강미술대학 교수와 예술인들이 합작해 조성했다.

영은사가 마주한 산이 비래봉이다. 혜리 스님이 처음에 이 산을 보고 인도 영취산과 비슷하다고 해 ‘비래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비래봉 암벽에는 오, 송, 원(10-14세기)대에 조성된 석불 330여기가 조각돼 있다.

영은사 스님들은 오존 8시부터 10시까지는 교학을 공부하고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는 염불과 참선, 독경 등을 한다.

영은사와 정자사를 참배하며 영명연수 선사의 ‘지계정신’을 다시한번 가슴에 새겼다면 항주 순례는 큰 보람으로 남을 것이다. 중국 항주=채한기 기자
penshoot@beo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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