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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상카시아 Ⅰ

기자명 법보신문

하늘과 사바세계가 이어진 정토

<사진설명>붓다가 도리천에서 어머니 마야레비와 천신들을 교화한 후 다시 내려온 곳이라 전해지는 상카시아의 언덕배기에 조그만 힌두사원이 단출하게 서있다.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때는 공식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이다. 그러나 불교전래를 반드시 북방전래로만 한정지을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사료에 의하면, 한반도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372년보다 훨씬 이전이다. 특히 불교 남래설(南來說)은, 아직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상당한 신빙성을 갖고 있다. 남래설은 가락국 김수로왕과 결혼한 천축국(인도) 공주 허황옥의 이야기로 일반에도 제법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나오는 관련 내용을 정리하면 대략 이렇다.

“16살의 야유타국(야오디야) 공주 허황옥은 하늘이 내린 가락국 왕을 찾아가 배필이 되라는 부모의 분부를 받들어 기원 후 48년에 20여명의 수행원과 함께 붉은 돛을 단 큰 배를 타고 장장 2만5천리의 긴 항해 끝에 남해의 별포 나룻목에 도착한다. 영접을 받으며 상륙한 다음 비달치 고개에서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 신령에게 고하는 의식을 치르고는 장유사(長遊寺) 고개를 넘어 수로왕이 기다리고 있는 행궁으로 가 첫 만남을 갖는다. 하늘이 내린 황금 알에서 태어나 배필도 하늘이 점지해 줄 것으로 믿고 있던 수로왕은 허황옥을 하늘이 보내준 배필로 여겨 반갑게 맞이한다. 둘은 2박 3일에 걸친 결혼식을 마치고 왕궁으로 돌아와 140년을 해로하면서 아들 10명과 딸 2명을 두었다. 자녀 중 둘째와 셋째는 왕비와 같은 허씨 성을 따르게 하여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된다. 아들 가운데 7명은 지리산에 들어가 선불이 되었다.”

이 이야기를 놓고, 그 시대에 그렇게 긴 바닷길을 배를 타고 올 수 있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이도 있고, 허황옥이 싣고 온 파사석탑과 쌍물고기 문양은 후대에 조작된 것이라는 시비를 제기하는 이도 있다. 그렇더라도 이 기록을 그냥 무시하기에는 여러가지 정황이 너무나 뚜렷하다. 「가락국기」의 핵심은 허황옥이 기원전 3세기 경 인도 강가(갠지스) 중류에서 크게 번성했던 태양조 불교국 아요디야에서 왔다는 설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설로만 볼 수 없음은 이후 가락국의 이름이 인도에서 불교와 관련된 지명으로 통용되는 가야로 정해진 것을 들 수 있겠다. 이것은 불교 남래설을 뒷받침해주는 매우 뚜렷한 전거 중의 하나이다. 특히 허황옥이 가져왔다는 파사석탑의 돌이 국내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이라고 하고, 탑의 모양새 또한 초기 인도의 스투파와 흡사한 것은 남래설이 가설의 범주를 넘어섰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라고 할 것이다. 수로왕릉에 새겨져 있는 쌍어문(雙魚紋)이 고대 인도지역에서 유행하던 문양이라는 점도 소홀히 넘겨선 안될 부분이다.

붓다의 유적을 기행하면서 돌연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를 거론하는 것은 지금 찾아가는 상카시아(Sankasya·현지명 Sankisa)가 허황옥의 고향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상카시아의 위치가 강가(갠지스)의 중류쯤에 위치해 있는 것도 그렇거니와, 현지 석가족들에게 확인한 결과 옛날 이 지역에 세워진 나라의 공주가 배를 타고 동방으로 시집을 가서 불교를 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미처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이것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인도와 한국은 사돈의 나라가 되는 셈이다. 더구나 상카시아 지역은 오늘날 샤카족이 폭넓게 분포해 사는 곳(22개소)으로 허황옥이 샤카족일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다. 파사석탑의 재질이 이 지역에서 나오는 돌의 재질과 일치한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 것을 감안해볼 때 한국불교계는 이와 관련된 조사와 연구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그것은 불교의 한반도 전래 역사를 최소한 200년 이상 끌어올릴 수 있는 일이며, 동시에 한국불교의 뿌리를 찾는 의미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사르나트 박물관과 기타 유적들을 주마간산 격으로 돌아본 후 서둘러 바라나시의 기차역으로 달려간다. 다음 순례지인 상카시아로 가기 위해서다. 짐은 모두 버스편으로 미리 출발을 시켰으니 모처럼 간편한 차림이 되었다. 사르나트에서 바라나시의 갠지스 호텔까지는 지프차로, 호텔에서 기차역까지는 릭샤(Ricksaw)를 이용했다. 릭샤를 끄는 이들은 한결같이 마르고 늙었으며 초췌했는데, 놀라운 사실은 글쎄 이들의 나이가 40대 안팎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 일이 힘들고 그러다보니 40대에 대부분 죽는다고 하니, 같은 40대로서 몹시 서글퍼진다. 가이드로부터 릭샤꾼 이야기를 들은 후에는 가슴속이 짠해져 한동안 관음정근을 했다. 그런 통에 지저분한, 그러나 사람 사는 맛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바라나시 거리를 피부로 느끼며 살펴보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삶의 가치에 대해 가슴깊이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으니, 실보다 득이 많으리라.

바라나시 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 30분. 그러나 3시에 예정된 기차는 아무리 기다려도 올 줄을 모른다. 인도의 시간개념이야 본래 그런 것으로 정평이 난 것이지만 비교적 정확하다는 기차까지도 이렇게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니 씁쓸하다. 이것 또한 인도를 느끼고 알아가는 과정이려니 생각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오가는 인도사람들과 눈인사도 나누고, 플랫홈까지 따라 들어온 걸인들과의 실랑이도 재미삼아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듯 마음을 조금만 바꾸어도 여유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니. 저런, 저런! 때마침 철길 건너편에서 스물 남짓한 젊은 청년이 바지를 내리고는 우리 쪽을 향해 서서 오줌을 누고 있다. 놀라운 것은 적나라하게 성기를 드러내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을 보는 그 청년보다 그런 광경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 무덤덤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다. 그 중에는 20대나 30대의 여성들도 있었지만 ‘무슨 일이 있느냐’는 듯이 바라보는 눈길이 되레 신기하다.

칸푸르(Kanpur) 행 기차에 올라탄 시간은 오후 4시. 1시간 반 정도 기다렸으니, 이 정도는 아주 양호한 경우란다. 기차는 1등 칸과 3등 칸이 고루 섞여 있는 것이었는데, 우리 일행이 탄 칸은 고급 칸에 해당하는 침대칸이다. 지금부터 기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약 7시간 정도이니 졸음은 이 기차에서 해결해야 한다. 피곤함을 쫓기 위해 한 잔에 3루피 하는 ‘짜이(Chai)’ 차를 시켜 마셨다. 짜이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금방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동행 김재일 법사의 명법문이 기차 안에서 시작됐다. 열변을 토하는 김 법사의 사자후에 순례 일행들은 시간가는 줄 모른다. 잠시 화장실에 들르기 위해 옆 칸으로 가보니 3등 칸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짐과 사람이 뒤엉켜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형국이라니! 인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삶의 모습 중 하나라기에 찬찬히 살펴보았다. 자신들을 훔쳐보는 이국인의 눈길이 싫지 않은 듯 환하게 웃는 그들과 어색한 미소로 인사를 나눴다.

좌석 위쪽 2층 침대칸으로 올라가 한 두 시간쯤 눈을 붙였을까. “칸푸르 역에 거의 다왔으니 내릴 준비를 하라”는 가이드의 졸음기가 잔뜩 밴 호통소리에 단잠을 멈췄다.
밤 11시에 도착한 칸푸르 역은 복잡하고 몹시 지저분하다. 도시 전체가 매연으로 가득 차 있다. 퀘퀘한 밤공기가 되레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오토릭샤를 타고 그 탁한 공기를 가르며 이 지역에서는 최고급이라는 랜드마크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20분. 내일 아침 6시에 상카시아로 출발하기 위해 씻는 둥 마는 둥 하룻밤을 보냈다.

붓다가 도리천에서 『화엄경』 「천궁계품」을 설해 어머니 마야데비와 천신들을 교화한 후 다시 내려오신 곳, 상카시아까지 도착하려면 이곳에서도 버스로 무려 네다섯 시간은 더 가야 한다니, 인도 땅은 참 끝없이도 넓다. 상카시아의 위치는 우타르프라데쉬 주(州) 카나우즈(Kannauj)의 북서쪽 약 80킬로미터, 파크나(Pakhna) 역으로부터 11.3킬로미터 지점이다.

<사진설명>붓다가 도리천에서 하강한 자리에 새겨진 발자욱과 양옆으로 호위해서 내려온 천신들의 발자욱.

<사진설명>붓다가 도리천에서 내려온 당시의 장면을 묘사한 부조.

버스를 타고 광활한 들판을 지나서 상카시아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30분. 언덕 위에 있는 계단 터를 향해 올랐다. 붓다가 도리천에서 내려오신 그 성스러운 장소에 막 도착한 것이다. 너무나 외진 곳에 위치해 있어 불교 순례자들도 잘 들르지 않는 곳, 그래서인지 순례 일행의 출현을 보고도 몰려드는 사람이 드물다. 모처럼 만나는 한적한 성지인 셈이다.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성의 동쪽 20여리 되는 곳에 대가람이 있다. 규모가 광대한데, 조각은 정수를 다했고 부처님의 존상은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고 상카시아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널찍한 공지에 외로이 서 있는 아쇼카 석주, 그 옆으로 작은 언덕과 언덕 정상부에 지어진 조그만 힌두사원이 단출하게 서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언덕 위에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는 발자국 세 짝을 새긴 돌조각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이 조각은 붓다가 도리천에서 하강할 때 양 옆으로 범천과 제석천이 호위를 해서 내려온 것을 상징한 것으로 그 가치가 대단한 것인데, 저렇듯 방치돼 있으니 불경스러운 일이다. 붓다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경은 아쇼카 석주 옆에 세워진 작은 사원에 모셔진 부조에 표현되어 있는데, 그 솜씨가 대단한 것 같지는 않다.

오늘날 상카시아의 초라한 모습과는 정반대로 과거 붓다가 도리천에서 하강할 때의 광경은 화려하기 비길 데가 없었다. 법현의 『불국기』는 당시의 장엄한 광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도리천상으로부터 동쪽을 향해 내려오셨다. 부처님은 신족통으로 3도(道)의 보계(寶階)를 만들어 가운데 칠보의 계단으로 내려오시고, 범천왕은 백은(白銀)의 계단을 만들어 우측에서 흰 불자(拂子)를 손에 쥐고 내려왔으며, 제석천은 자금(紫金·지금의 수정)의 계단을 만들어 좌측에서 칠보의 일산(日傘)을 들고 내려오는데, 모든 하늘 천신들은 무수히 부처님을 따랐다.”

붓다가 도리천으로부터 내려오는 하강지를 상카시아로 선택한 이유는 이곳이 다른 어떤 곳보다도 깨끗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늘과 사바세계를 연결하는 성지로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샤카무니 붓다뿐만이 아니라 이전의 모든 붓다들도 이곳을 통해 하늘로부터 하강하였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이런 이유로 상카시아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경외의 장소로 여겨졌다.
urubell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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