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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 스님〈상〉

기자명 법보신문

10년간 맨발 고행 감내한 ‘인욕보살’

청담(靑潭) 스님은 한국불교정화운동의 화신(化身)이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불타올랐던 한국불교정화운동의 한복판에 서서 “성불(成佛)을 한생 미루더라도 불교정화만은 반드시 이루겠다”고 서원했던 분이 바로 청담 스님.

청담 스님은 190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농업학교를 마친 후 2차에 걸쳐 출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친구였던 박생광(朴生光) 화백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송운사(松雲寺)의 아끼모도 준까 스님 문하에서 6개월을 수행했다. 그러나 일본불교의 승풍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곧바로 귀국, 25세에 경남 고성 연화산에 있는 옥천사에서 남경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 득도했고, 순호(淳浩)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 후 스님은 서울 개운사의 대원강원 박한영 스님 문하에서 수학했고 이어 만공선사 문하에서 수행, 금강산을 거쳐 묘향산에서 깨달음을 얻고 만공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해방 후, 스님은 한국불교정화운동에 뛰어들었고 기어이 청정비구종단의 기틀을 확고히 세웠다. 스님은 한국불교 대표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의 총무원장, 종회의장, 장로원장, 동국학원 이사장, 선학원 이사장, 종정까지 지내시고 1971년 11월 15일, 세수 70세, 법랍 45세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오직 불교정화의 완성을 향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어찌보면 청담 스님의 화두는 ‘불교정화’였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불교 정화의 화신

스님은 속가에 늙으신 홀어머님과 아내, 딸 하나를 두고 삭발 출가했었다. 훗날 스님이 깨달음을 얻은 ‘도인스님’으로 알려지자 고향인 진주의 불교신도들이 스님을 찾아뵙고 간청, 진주의 연화사 초청법회에서 설법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초청법회가 끝나고 스님은 아들의 설법을 들으러 온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옛 속가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늙은 어미의 유언을 들어 달라.”
어머니의 이 말씀을 차마 거역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이 어미의 마지막 유언으로 알고 이 한가지 부탁만은 꼭 들어다오. …오늘 밤, 이씨 가문의 대(代)를 이을 씨 하나만 심어놓고 가거라….”

그러나 그것은 늙은신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이라고 해서 들어줄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었다. 스님은 단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노모의 마지막 유언은 차라리 절규에 가까웠고, 결국은 절망적인 통곡으로 이어졌다.

스님은 검푸른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옛날 목련존자는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지옥에 내려가 그 무서운 지옥고를 견디면서 어머니를 구해냈다고 하거늘 나는 살아있는 늙은 어머니의 소원 한가지를 들어주지 못한단 말인가!

어머니 모셔다 삭발 출가시켜

결국 스님은, 지옥에 갈 각오를 하고 옛부인이 자고 있는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 하룻밤의 파계를 참회하기 위해 장장 10년 세월동안 엄동설한에도 맨발의 고행을 감내했다. 그러면서 늘 이렇게 다짐했다.

“지옥에 갈 각오로 파계했던 몸, 이만한 고통이야 달게 받아야지….”

지옥에 떨어질 각오를 하고 마지막 효도행(孝道行)을 하느라 감행한 파계였건만, 참으로 기구한 인연이었던가. 하룻밤 파계로 태어난 아이는 이씨 가문의 대(代)를 이을 아들이 아니라 또 딸이었으니, 청담 스님은 늙으신 어머니의 소원도 이루어드리지 못한 채 막중한 파계의 죄만 짓게 된 셈이었다. 그래서 청담 스님의 참회 고행은 더더욱 처절하고 냉혹했다.

스님이 된 아들은 파계까지 시켜가면서 대(代)를 이을 아들을 낳을 기회를 만들어주었건만 또 딸을 낳은 며느리를 시어머니는 몹시 원망하고 미워했다. 그리하여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말씀이 아니었다. 속가의 이 비극적인 소식은 바람결에 실려 스님의 귀에까지 들려오게 마련이었다.
스님은 진주 속가로 가서 늙으신 어머니를 직지사로 모시고 와 삭발 출가시켜 드렸다.

“그동안 쌓으신 업장, 노후 염불공덕으로나마 씻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속가의 어머니는 성인(成仁) 노비구니스님이 되어 염불공덕을 쌓은 후 며느리와 뜨거운 화해 끝에 열반에 들었다.

그리고 그 후 하룻밤 파계로 얻은 둘째 딸은 성철 스님의 권유로 삭발 출가하여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거목으로 커서 수많은 중량급 후학들을 길러내고 있는 저 유명한 수원 봉녕사의 노비구니 묘엄 스님이 되었다.

그리고 청담 스님의 옛 속가 부인도 청담 스님 열반 후 따님 묘엄이 모셔다 삭발 출가시켜 드렸으니, 결국 청담 스님 집에서만 네 식구가 삭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인욕제일 청담 스님”

1950년대 한국불교계에 정화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었을 때, 불교정화운동에 참여했던 스님들은 동산 스님, 청담 스님, 효봉 스님, 금오 스님 등 기라성 같은 청정비구스님들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청담 스님은 초강경파.

이 무렵 한국불교계에서는 “설법제일 하동산, 정진제일 이효봉, 인욕제일 이청담, 지계제일 정전강”이라는 유행어가 생길 정도로 청담 스님은 어떤 어려움, 어떤 수모, 어떤 고통도 기꺼이 잘 견디어 내고, 어떤 경우에도 신경질을 부리거나 화를 내는 일이 없었다.

만일 불교정화운동 때 청담 스님의 그 철저한 인욕바라밀이 없어다면, 아마도 불교정화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청담 스님은 불교정화운동을 위해, 하나에서 열까지 참고 견디고, 견디고 참아내면서 인욕바라밀로 시종일관, 끝까지 정화운동을 밀어붙여 결국 정화운동 성공의 기틀을 마련한 셈이었다.

“만일 그때 청담 스님이 그 처절한 인욕을 실천하지 않았더라면 자체 내에서 분관과 반목이 일어나 정화운동은 실패했을 것이다.”
후학의 이 한마디 증언은 청담 스님이 얼마만큼 철저한 인욕보살이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윤청광〈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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