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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쉬라바스티 Ⅰ

기자명 법보신문

붓다가 여름 안거 보내던 최상의 수행지

<사진설명>수닷타 장자가 붓다를 위해 세운 기원정사터.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 21번재 되는 해부터 입멸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해만 제외하고는 이곳에서 하안거를 보냈을 정도로 이곳을 좋아했다.

쉬라바스티(사위성)는 라즈기르와 함께 붓다 교화의 최대 중심지이다. 이곳은 강가(갠지스) 서북쪽에 위치한 코살라(Kosala)국의 수도였다. 지금의 행정구역은 우타르 쁘라데시 주(州) 사헤트-마헤트에 해당된다.

당시 코살라국은 마가다국과 함께 고대 북인도를 지배하던 16개국 중 가장 강력한 군주 국가였다. 코살라국은 매우 다혈질이고 호전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세운 국가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번영을 이룬 나라였다. 당시 코살라국에는 유물론적 사상 및 무소유를 주장하는 자이나교가 성행했으나 붓다가 이곳 쉬라바스티의 기원정사에서 무려 24회 가량의 안거를 지내면서 불교가 크게 번성했다.

붓다가 전 생애를 거쳐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이기에 쉬라바스티는 많은 경전에 등장하고, 자연히 일화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쉬라바스티는 사위성, 기원정사, 앙굴리말라, 수닷타 등 오늘날의 불자들에게 친숙한 일화들의 배경이 바로 이곳이다. 또 신라의 수도명인 서라벌의 어원이 쉬라바스티라는 주장도 학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붓다 입멸 이후 이곳에는 몇 세기 동안 기원정사를 중심으로 불교가 활발하게 유지되었지만 차츰 빛을 잃어가다가 12세기쯤 폐허가 된 것으로 발굴결과 밝혀지고 있다. 지금도 옛 유적들이 대부분 폐허 상태로 광활한 밀림 속에 벽돌들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 무상의 이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나마 최근에는 다소 정비가 되어 말끔한 모습을 되찾아가는 중이다.

쉬라바스티와 붓다의 인연은 수닷타(Sudatta) 장자로부터 시작된다. 수닷타 장자는 사업차 찾아갔던 라즈기르에서 ‘붓다, 깨달은 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붓다를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이 일어났을 정도의 타고난 불연(佛緣)의 소유자였다. 그는 죽림정사에 머물던 붓다를 만나 가르침을 듣고 귀의한 후 이곳에 절, 그러니까 저 유명한 기원정사를 지어 공양함으로써 붓다의 쉬라바스티 행을 인도한 당사자이다.

수닷타 장자가 세운 기원정사는 붓다가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이자, 가장 많은 설법을 한 곳이기도 하다. 현재 전해지는 경전 중 절반 이상이 기원정사에서 설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 21번째 되는 해부터 입멸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해만 제외하고는 이곳에서 하안거를 보냈을 정도로 이곳을 좋아했다. 기원정사란 제타(祗陀) 숲에 아나타핀디카(아나타핀타카는 급고독, 즉 ‘어려운 사람에게 먹을 것 등 물품을 제공해주는 이’라는 의미의 수닷타로 주로 불린다. 한문으로는 給孤獨) 장자가 설립한 ‘급고독원 정사’를 뜻한다. 기원정사가 설립되기까지에는 다음과 같은 감명 깊은 사연이 있다.

수닷타 장자는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나 자식이 없는 늙은이들을 불쌍히 여겨 여러모로 돌봐주는 장자였다. 장자란 길드(Guild)의 우두머리로 많은 동업자를 거느리고 무역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한 사람을 말한다. 수닷타도 그런 장자의 한 사람으로 쉬라바스티(사밧티)에 살면서 라즈기르에도 자주 방문하며 무역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라즈기르에서 붓다의 소문을 듣고 죽림정사로 찾아가 가르침을 듣고 그 자리에서 귀의, 불자가 되었다. 그리고는 붓다에게 쉬라바스티를 찾아줄 것을 청했다. 붓다는 장자의 청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붓다는 마가다국과 함께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코살라국에서도 가르침을 펼쳐나가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장자의 청을 받아들였다.

수닷타 장자는 쉬라바스티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붓다와 그 제자들이 머물 정사를 지을 땅을 찾아 나섰다. 찾는 땅은 도시에서 그다지 멀지 않으면서도 조용하고 사색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춘 곳이어야 했다. 물색 끝에 그런 조건을 갖춘 곳으로 눈에 띤 곳이 제타 왕자 소유의 숲이었다. 그는 제타 왕자를 찾아가 땅을 매각할 것을 청했다.

“왕자이시여, 승원을 짓도록 저 땅을 제게 팔아주십시오.”
“장자여, 나는 그것을 팔지 않겠다. 설령 금화로 온 땅을 다 덮는다면 몰라도 팔지 않겠다.”
팔아라, 팔지 않겠다, 옥신각신 하다가 그들은 끝내 대신들 앞에까지 나아가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대신들의 판결은 왕자가 이미 그 땅의 가치를 말했으므로 가치를 충족할 경우 팔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상도덕에 의한 재판이었다.

장자는 즉시 금화를 수레로 날라다가 지면에 깔기 시작했다. 첫 번째 날라 온 금화로는 아직 충분한 땅을 확보하지 못했으므로 수닷타는 계속해서 수레로 금화를 실어오도록 하인들에게 명령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왕자는 아무래도 예삿일이 아니라고 판단해 수닷타가 땅을 매입하려는 연유를 수소문했다. “붓다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저 장자가 저렇게까지 하는 것일까.”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왕자는 수닷타 장자를 불러 세웠다.

“장자여, 이제 그만 하시오. 남은 땅은 내가 보시할 수 있게 해주시요.”
왕자에게도 귀의할 마음이 일어나고 있음을 간파한 수닷타 장자는 나머지 땅을 왕자에게 양보했다. 확보한 땅에 수닷타 장자가 방사와 모든 설비를 갖춘 정사를 세우자, 왕자는 나머지 땅에 정사로 들어가는 정문을 세웠다. 기원정사는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사진설명>현재 보수가 진행중인 기원정사터

수닷타 장자는 신심이 매우 뛰어난 불자였다. 붓다의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남아 전해지고, 그 가르침으로 인해 많은 불자들이 귀의할 수 있게 된 것은 사실 수닷타 장자의 불가사의한 신심에 힘입은 바 크다. 역사적으로 수닷타 장자처럼 붓다에게 헌신적인 불자는 없었다. 그는 거의 매일 세 차례 기원정사를 찾아 붓다에게 공양예배를 올렸다. 아침에는 잘 쑨 쌀죽을, 점심에는 그날에 맞는 음식을, 저녁때는 꽃이나 향, 향수 등을 올리고 설법을 들었다. 그는 단 한번이라도 빈손으로 정사를 찾은 일이 없었다. 모든 재산을 보시해 몹시 가난해졌지만, 가져갈 것이 없으면 흙과 물이라도 퍼 정사의 꽃과 나무를 가꿨다. 파산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보시와 정진이 계속되자, 마침내 제석천이 감동해 신통력으로 과거 수닷타 장자로부터 큰 돈을 빌려간 후 갚지 않고 있던 장사꾼으로 하여금 빚을 갚도록 해, 수닷타 장자는 다시 부자가 되었다.

붓다 역시 수닷타 장자의 신심을 높이 평가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보시와 공양을 했지만 일찍이 수닷타 장자처럼 신심을 내어 공양한 자는 없었다. 그는 공양을 하되 구하고 비는 마음을 갖지 않고 소원을 빈 적이 없다. 왜냐하면 공양을 올릴 때 그의 마음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일으킨 것으로 그 공덕을 삼았기 때문이니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기원정사터의 첫 인상은 포근함과 평화로움이다. 땅의 기운이 편안하고 바람의 기운이 상쾌한 것이 수행 장소로는 더 없이 좋아 보인다. 정사의 터에 들어선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 예서 수행하면 수행이 잘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여러 성지를 순례했지만 이곳처럼 아늑한 곳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붓다가 이곳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고 가장 많은 설법을 한 데는 이런 환경도 한 몫을 했으리라.

정사터 곳곳에는 붉은 빛 벽돌로 이뤄진 각종 스투파와 승원 터가 즐비하다. 각각의 유적마다 이름이 있지만, 종류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지금도 벽돌을 만들어 쌓고 있으니, 물론 고증에 의한 것이겠지만, 이 모습이 예전의 그것과 같은 것인가엔 의문이 든다.

정사터 중앙 부분에는 아난다의 보리수가 우뚝 서 있다. 이곳의 상징물처럼 된 아난다의 보리수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붓다가 우기 석 달 뿐만 아니라 늘 이곳에 머물기를 바라던 사람들의 바람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아난다가 붓다가 정각을 이룬 보드가야의 보리수 묘목을 이곳에 옮겨심기를 붓다에게 청했고, 붓다의 허락이 내려지자 신통제일 목갈라야나가 공중으로 날아 보드가야에서 묘목을 옮겨와 이곳에 심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이후 이 나무는 이곳을 찾거나 머무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붓다를 대신하는 귀의처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아난다의 보리수’로 불려졌고 이후 붓다는 이 나무에 축복을 내렸으며, 종종 나무 아래에서 선정에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동남아시아권에서 온 듯한 일단의 불자들이 보리수 그늘 아래 모여 앉아 경건한 자세로 독경을 하며 기도를 올리고 있다. 그 옆으로 차례를 기다리는 불자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보니 이곳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귀의 대상으로 기능하고 있다.

기수급고독원의 기수(祗樹)에서 보듯 수닷타 장자가 이곳에 처음 지은 사원, 간다쿠티(Gandhakuti, 香殿)는 본래 7층 규모의 목조건물이었다. 기원정사의 중심 건물지라고 할 수 있는 이곳은 붓다가 생모 마야데비를 교화하기 위해 도리천에 올랐던 동안 붓다를 그리워한 코살라국 프라세나짓(파사익) 왕에 의해 조성된 전단향 불상이 모셔져 있던 곳이기도 하다.

법현의 『불국기』는 “…연등을 계속 밝혀 나날이 그치지를 않았다. 그런데 쥐가 등의 기둥을 갉아 먹어 바람에 번개(幡蓋)에 불이 붙고, 드디어 정사에 옮겨 붙어 7층 건물이 다 타버렸다. 그리하여 국왕과 백성들은 모두 전단향 불상이 타버렸다고 크게 슬퍼하였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 동쪽의 작은 정사의 문을 열자 홀연히 전단향불 본상이 보였다.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여 함께 정사를 고쳐 벽돌로 2층 건물을 지어 상을 제자리에 옮겼다”라고 적고 있다.

지금은 건물 터만이 남아 있지만, 붓다 당시에는 이 건물만을 기원정사로 불렀을 만큼 기원정사터의 으뜸 유적이다. urubell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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