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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쉬라바스티 Ⅱ

기자명 법보신문

희대의 살인마도 교화시킨 자비의 땅

<사진설명>수닷타 장자의 집터. 신심이 매우 뛰어났던 수닷타 장자는 붓다를 위해 쉬라바스티에 기원정사를 설립했다.

기원정사터의 여러 유적들 중에서도 특히 한국 불자들의 눈에 띄는 것은 『금강경』 설법지로 추정되는 법단(일종의 강단)과 5백 비구들이 둘러앉아 법문을 들었을 그 주변의 승원터이다. 두루 알다시피 『금강경』은 한국불교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경전이고, 대표종단인 조계종의 소의경전이기도 해, 이 유적이 한국 불자들에게 주는 감동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유적이 있겠는가마는, 중생심이란 게 어디 그런가.

『금강경』 설법터에 와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이가 있다면, 다름 아닌 수부티(Subhuti, 수보리)이다. 수부티는 사밧티의 브라만 가문 출신으로 공(空)과 무상(無常)의 도리를 가장 잘 깨달아 해공제일(解空第一)의 칭호를 받은 붓다의 10대 제자 중 한 분이다.

이곳에 서니 옛 『금강경』을 설하던 장면이 마치 본 적이나 있는 듯 생생히 떠오른다. 붓다와 수부티가 묻고 답하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개안(開眼)의 경계에서 본다면 삼라만상 그대로가 대법문이듯이, 탁발하고 발 씻는 붓다의 일상적 행위가 그대로 사자후인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 붓다와 수부티가 벌이는 노련한 연극이라니! 비구들에게 깨달음의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지혜를 전해주기 위해 모르는 듯 묻는 수부티의, 그리고 아는 줄 알면서도 모르는 이에게 알려주듯 자상하게 법을 설하는 붓다의 저 모습이야말로 대자대비의 전형이 아니고 무엇이랴!

<사진설명>기원정사 내 금강경 설법터. 맨왼쪽 법단이 바로 붓다가 금강경을 설법했던 자리.

붓다가 기원정사에 머물 때, 주로 거주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코삼바쿠티(Kosambakuti) 사원터를 비롯하여 우물, 여러 제자들의 이름이 붙어 있는 스투파 등 기원정사터 내에는 온갖 유적들이 즐비하다. 코삼바쿠티와 같이 붓다가 직접 머물렀던, 그러니까 붓다의 체취가 어려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금박이 칠해져 있다. 이는 불교유적에 금박 붙이는 것을 커다란 공덕으로 여기는 미얀마 등 남방불교 계통 불자들의 붓다를 향한 간절한 존경의 흔적들에 다름 아니다. 사실 이런 흔적들은 붓다 유적지 거의 대부분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기도 하다.

코살라국 프라세나짓(파사익) 왕이 머물던 사밧티(사위성)는 기원정사에서 약 2킬로미터 남짓 떨어져 있다. 거리가 가까워 훗날 붓다의 큰 후원자가 되는 프라세나짓 왕과 붓다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이곳 기원정사에서 이루어졌다. 이 장면을 경전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기원정사가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아 프라세나짓 왕이 붓다의 소문을 듣고 기원정사를 방문했다. 막상 붓다를 대면하고 보니 아직 젊은 청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붓다여, 당신이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분입니까?”
“대왕이시여, 그렇습니다. 만일 이 세상에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이가 있다면 그가 바로 나입니다.”
“그렇지만 붓다여,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으며 그 이름을 세상에 떨치고 있는 사문이나 바라문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이라도 스스로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나이도 어린 그대이겠습니까?”
“대왕이시여, 젊다고 해서 얕봐서는 안됩니다. 세상에는 어리다는 이유로 경시해서는 안되는 것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크샤트리아는 젊다고 얕봐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뱀은 작다는 이유로 가볍게 봐서는 안됩니다. 불은 작다고 해서 경시해서는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비구는 젊은 나이를 이유로 멸시돼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붓다의 말에 크게 수긍한 프라세나짓 왕은 이후 붓다에 귀의했다.

아함부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이 광경은 젊은 날(약 37세 안팎)의 붓다가 나이 많은 국왕을 대하며 얼마나 당당하게 자신의 법을 펼쳤는가를 생생히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사밧티에서 행해진 붓다의 설법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붓다의 가르침이야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그 중에서도 삼보에 관한 설법 내용은 불교에서 귀의의 대상을 정한 설법이라는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

어느 날 붓다가 비구들을 모아 놓고 인도의 옛 신화를 들려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만일 홀로 있으며 두려움으로 머리털이 곤두설 듯한 경우가 있으면 그 때에는 나를 억념(憶念)하는 것이 좋다. ‘저 세존은 여래이시고 공양 받을만한 분, 널리 깨달으신 분, 지혜와 실천을 겸비하신 분, 깨달았으며 세상의 존경을 받을만한 분이시다’라고. 그렇게 하면 공포를 없앨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나를 억념하지 못할 때에는 법(法, 가르침)을 억념하는 것이 좋다. ‘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다. 현재에 과보로 있는 것, 때를 거르지 않는 것, 와서 보라고 할 수 있는 것, 안온으로 잘 이끄는 것’이라고.

또한 만일 법도 염할 수 없을 때에는 승가를 억념하는 것이 좋다.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잘 행하는 이들의 모임, 바르게 행하는 이들의 모임이어서 존경할 만하고 공양할 만하며 합장할 만한 이 세상의 최상의 복전’이라고. 그러면 그대들의 공포도 불안도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이다.

쉬라바스티에서 보인 붓다의 삶이 불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이렇듯 매우 의미심장하다. 다시 말해 불교의 교리체계나 신앙체계의 기본은 사실상 이곳 쉬라바스티에서 본격적으로 형성되고 정립되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 것이다.

쉬라바스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적은 기원정사터 외에도 폐허가 된 사밧티 성터에 남아 있는 앙굴리마라 스투파와 수닷타 장자의 집터 등이 있다. 기원정사에서 마헤트로 가는 길을 따라 약 1킬로미터 가량 가다가 널찍한 공지 위에 세워진 앙굴리마라 스투파 역시 컨닝햄에 의해 발굴돼 그 위치가 확인됐다. 앙굴리마라가 자신의 부인을 능욕했다는 오해를 한 그의 브라만 스승이 앙굴리마라를 파멸시킬 목적으로 살인을 사주한 것을 천진스레 믿고 무려 99명을 살해한 뒤 마지막 100명 째에 붓다를 만나서 교화된 인물이다.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참회한 후 승단에 귀의, 제자가 된 앙굴리마라는 그 누구든 잘못을 진정으로 참회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승단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다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상징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앙굴리마라 사건은 당시 인도에서 비구의 위상을 규정짓는 의미도 갖고 있다. 희대의 살인마를 처벌하기 위해 손수 병사를 이끌고 나온 프라세나짓 왕이 붓다에게 살인범의 양도를 요청하자 붓다는 ‘이미 출가하여 나의 제자가 되었으므로 내줄 수 없다’고 거절하고, 외려 프라세나짓 왕에게 앙굴리마라를 봉양하라고 권했던 것이다. 붓다는 앙굴리마라를 통해 출가사문을 세속의 권력이 함부로 할 수 없음을 단호히 천명한 것이다.

<사진설명>인도 측에서 고대 카빌라바스투라고 주장하는 피프라하와 유적지.

앙굴리마라 스투파에서 불과 100미터 떨어진 곳에는 수닷타 장자의 집터가 있다. 현재는 캇치치 오두막이라고 불리는데, AD 1∼2세기의 쿠산왕조로부터 AD 12세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증축이 이뤄졌다. 오두막이라고 부르기에는 그 규모가 웅장하고 집 중앙부위에 만들어진 화려한 벽돌계단은 거상(巨商) 수닷타의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한다. 현재 발굴돼 있는 집터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하니 원래의 집터는 더 크고 넓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은 수닷타 장자의 집터에서 기원을 올리고 기념사진을 찍으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때문에 기도와 촬영에 정신이 없다고 한다. 사실 벽돌로 이뤄진 작은 언덕 같은 것이어서 이렇다할 볼거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무려나, 그들이 이곳에서 행운을 얻어 부자가 된다면 수닷타처럼 살겠다는 서원까지 세웠기를 바랄 뿐이다.

이밖에도, 앞서 상카시아 순례에서 언급한 것처럼 쉬라바스티 유적지에서 발람쁘르로 가는 길목 약 1킬로미터 되는 지점에 거대한 스투파, 즉 천불화현터가 자리하고 있다. 알다시피 이곳은 붓다가 수많은 이적을 보인 곳으로, 오라자드(Oraghad)라고도 불린다. 이야기거리가 많아 불교 미술가들에게 좋은 소재거리를 제공하는 곳이기도 하다.

경전에는 프라세나짓 왕이 붓다가 기적을 드러낸 장소에 자그마한 정사를 건립하였고, 이후 데바닷타가 이곳에 머물고 있던 붓다를 살해할 목적으로 열 손가락의 손톱에 각각 독을 바른 채 붓다의 몸에 상처를 내고자 하였으나 갑자기 데바닷타가 앉아 있는 못가의 나무 밑 땅이 저절로 꺼지면서 무서운 불꽃이 일었고, 그 불에 그슬리면서 죄를 뉘우친 데바닷타가 ‘나무 붓다’를 외치면서 땅속으로 꺼져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천불화현터 길 건너편에는 작은 연못과 언덕의 흔적이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urubell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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