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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선풍 드날린 명안종사의 산실

기자명 법보신문

금정산 범어사 금어선원

성월 원력으로 선원 개원
경허-용성-동산-고암
역대 선지식 용맹정진

20세기 초 9개산문 열어
선찰대본산 자리매김
좌선-방선은 자유로워


<사진설명>역대 조사들이 걸었던 그 길을 납자들은 올해도 꿋꿋하게 걷고 있다.

방선 시간, 선원 동쪽에 있는 대나무 숲을 거닐다가 바람에 부딪치는 댓잎 소리에 활연히 마음이 열린 동산혜일 스님은 “서래의 밀지(西來蜜旨)가 안전(眼前)에 명명(明明)했다.”며 오도송을 읊었다.

그리고 그린 것이 몇 해던가
붓 끝이 닿는 곳에 살아 있는 고양이로다.
하루 종일 창 앞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고
밤이 되면 예전처럼 늙은 쥐를 잡는다

‘선찰대본산’ 범어사 금어선원은 동산혜일 스님이 조실로 주석하며 수많은 납자들을 제접했던 유서 깊은 도량이다. 11월 26일. 범어사에도 동안거가 시작됐다. 이번 안거에는 “꼭 확철대오하리라” 다짐한 27명 납자들이 금어선원에 가부좌를 틀었다. 동산 스님이 걸었던, 아니 역대 조사 스님들이 걸었던 그 길을 묵묵히 걷고자 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도량은 경허, 성월, 경산, 용성, 동산, 고암 스님 등이 정진했던 곳이 아닌가. 명안종사의 산실 금어선원과 인연을 맺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의상과 표훈 스님의 화엄사상을 받아들였던 범어사가 선종사찰로 거듭나는데는 성월일전 스님의 원력이 컸다. 범어사에 선원이 개설된 해는 1899년 겨울. 당시 범어사 주지 성월 스님은 선불교를 통한 승가의 기강을 세우고 국력을 강하게 하기 위해 범어사 산내암자인 금강암에서 임시 선회를 열고 12월에 금강선사를 개원했다.성월 스님을 포함한 수옹혜윤, 월송, 유운주, 휴진, 법능, 봉성 스님 등 총 7명이 9순(旬)의 안거를 나고 1900년 2월 15일 해제했다.

20세기에 접어들며 범어사에는 총 9개의 선원이 산문을 열었다. 안양선사, 내원선사, 계명선사, 원효선사, 안심료, 원응당, 승당, 대성선사에 이어 1910년 4월 10일 금어선원이 개설되면서 ‘선을 통해 달관하며, 선을 통해 견성하고, 선을 통해 성불에 이를 수 있다’는 선풍의 깃발을 휘날렸다.

이러한 대작불사의 중심에는 성월일전 스님이 있었기에 범어사의 중흥조라 추앙받지만 동산, 고암 스님 등의 대목(大木)에 가려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스님은 선사이면서 혁명가이며, 애국지사였다.

4세 때 천자문을 통달하고 10세 이전에 사서삼경을 독파한 오창호는 1885년 15세 되던 해 늦 가을 어머니를 따라 범어사에 갔다가 갑자기 환희로운 마음이 일어나 출가하고 싶다는 마음이 용솟음쳤다고 한다. 이를 허락할 리 없었던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창호는 부모도 모르게 홀로 범어사로 입산, 출가해 동산혜일이 되었다. 전세로부터 이어지는 불연이 아니고는 믿기 힘든 출가인연이 아닐 수 없다.

스님 세연 30때 되는 봄철. 새벽에 일어나 막 세수를 하려던 찰나 절 앞 건너 산봉우리에서 꿩이 푸드득 날아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소리를 듣고 10여년 동안 품었던 의단(疑團)이 무너졌다.

산 창가에 종소리 끊어지고
돌틈에 흐르는 물 고요하네.
홀연히 산의 잡된 소리가
모두 잠들면 바로 고향이라네.

지효 스님 또한 우리에게는 익숙치 않지만 금어선원이 배출한 큰 스님 중 한 사람이다.
동산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지효 스님은 1966년부터 72년까지 천축사 무문관에 들어 당시 관음·제선 스님과 함께 6년 동안 두문불출하면서 정진했다. 범어사 주지 소임을 맡아 가람수호에도 남다른 열의를 보였던 스님은 1978년 종단 원로로 추대된 이후 현직의 번거로움을 털기 위해 일체의 소임을 사양한 후 동화사와 해인사 선원에서 납자들을 제접했다.

1982년 지효 스님은 당시 종신 수도원이었던 범어사 극락암에 입방, 외부출입 없이 정진해 출세간의 존경을 받기도 했다.
27명의 선객은 이제 동산, 성월, 고암 스님 앞에 놓였던 그 은산철벽을 마주할 것이다.
그 은산철벽을 뚫는 것은 선객의 인연과 정진의 힘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러기에 범어사 정진은 다른 선원과는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바로 자율정진이다.

새벽 2시에서 오후 10시 취침할 때 까지 공양 시간 이외에는 정진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본인의 능력에 따라 몇 시간이고 정진할 수도 있으며 방선도 자유롭다. 좌선, 방선 시간을 규정해 놓고 대중이 함께 움직이는 일반적인 선원의 모습과는 다르다. 옆 사람을 위해 방선을 할 때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예법만 지키면 되는 것이다.

<사진설명>올 동안거에는 27명의 납자들이 선원에 방부를 들었다.

범어사 조실 스님이 정진납자들에게 화두를 직접 내리고 있으며 음력 12월 1일부터 성도일인 8일까지, 이 기간에는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하는 장좌불와를 해야만 한다.
선찰대본산의 자존심과 기상이 배어있는 금어선원의 선풍은 올 동안거에도 살아쿰틀거리고 있다.
부산=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금어선원 청규

대중화합 깨면 선원서 추출
서릿발 규정 1910년 만들어

금어선원의 청규는 1910년 제정된 서릿발 같은 ‘범어사내원선원청규’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총 14개 항목에 달하는 청규는 규범과 선원 소임을 명확하게 규정한다. ‘총림의 진정한 목적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하여 장양성태(長養聖胎)하고 속불혜명(續佛慧命)하며 국가에 보은하고 광세제민에 주력할 것’을 다짐하는 1항에서부터 일제강점기 시절 국력회복의 의지에 힘썼던 선방 대중의 기백이 엿보인다.

3항에는 조당과 원주를 선정할 때에는 선원의 대중이 참여한 가운데 공천을 통해 정해야 하며 그 밖의 소임은 당해 선원에서 선정한다고 명기했다. 4항에는 선원에 입방을 하고자 할 때는 조당과 열중과 원주 등 3인이 협의하여 결정하되 반드시 발심납자를 받아야 한다고 되어있다.

이외에도 선학참중은 내명을 성찰할 것이며 동정에 귀를 기울이지 말 것이며 태만하지 말 것이며 방선 후라도 난잡하게 웃고 떠들지 말 것이며 소란을 피우거나 대중의 화합을 깨는 사람은 선원에서 추출할 것이라고 못박고 있다.

또한 긴요한 일 없이는 남의 방에 함부로 출입하지 말 것이며, 해제를 한 후 타지에 나가더라도 참선납자라는 위상을 항상 염두에 두고 행동하며 본선원의 증서를 갖추고 다닐 것이며, 특별한 일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모든 선사의 대중이 협의하여 아무런 허물이 없도록 처리한다고 적시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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