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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쿠시나가르 Ⅰ

기자명 법보신문

“이제 마지막 여행을 떠날 때가 왔구나”

<사진설명>쿠시나가르에서 남서쪽으로 20km 떨어진 파바 마을에 위치한 춘다동산터. 붓다는 이곳에서 춘다로부터 멧돼지 고기 공양을 받았다.

“아난다야, 내일 아침 여행을 떠나기로 하자.”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예감한 붓다가 나지막한 소리로 아난다에게 말했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스승의 목소리와 표정이 왠지 보통 때완 다르게 느껴졌기에 아난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더구나 이번 여행은 붓다의 용태가 크게 나빠진 상태에서 떠나는 것이어서 마음 한 구석이 영 개운치 않았다. 점점 공양의 양이 줄었고, 어쩌다가 조금이라도 많이 드시는 날에는 어김없이 설사를 했기에 늘 걱정이 앞섰다. 장(臟)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면서도 개의치 않고 좌선에 들어 있는 스승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며칠 전, 산책길에서 붓다로부터 3개월 뒤 입멸에 들겠다는 통보를 받은 터라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무거웠다.

“아난다, 나의 정명(定命)은 이미 성숙되었다. 내 삶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대들을 남기고 나는 먼저 홀로 떠날 것이다. 내가 간 뒤에도 힘써 정진하여 진리와 규칙을 잘 지키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난다는 그 때 들었던 이 말씀이 자꾸 머리 속에 떠올라 밤잠을 설쳤다. 어쩌면 이번 여행이 붓다와의 마지막 여행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난다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해진 옷을 꿰매려 바느질을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이 산란한 터라 제대로 바느질이 되지 않았다. 바늘에 손가락을 찔려 피가 손가락 끝에 맺혔다. 아난다는 물끄러미 핏방울을 바라보다가 입으로 피를 빨았다. 그 순간 붓다의 목소리에 아난다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아난다야, 이제 그만 자두는 것이 좋겠다. 아침 일찍 떠나야 하지 않느냐. … 아난다야, 너는 참 오랫동안 시자로서 나를 잘 돌보아 주었다. 고맙구나. 너의 배려는 소홀하지도, 번잡스럽지도 않았고 철저했으며 성의가 넘쳤다. 카필라바스투에서 19살 난 너를 만난 후 꽤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나를 보살피느라 네게는 피해가 많았다. 이 점을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진을 늦추지 않는다면 너 역시 머잖아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

깨달을 것이라는 붓다의 수기(授記)가 내려졌는데도 아난다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지난 25년 동안 붓다의 곁을 지켜오는 동안 이토록 정겹게 들려오는 붓다의 음성을 열반을 앞둔 지금에서야 듣게 된 것이 못내 그의 슬픔을 더욱 복받치게 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바이샬리를 떠나가던 붓다와 제자들의 무리는 바이샬리 성이 아련하게 보이는 북쪽의 한 언덕에 이르러 걸음을 멈춘 뒤 오던 길을 되돌아보았다. 붓다는 바이샬리 성과 산책을 하며 정들었던 언덕, 탁발을 하기위해 자주 걸었던 거리 등을 아련한 눈길로 마치 기억에 새기려는 듯 찬찬히 바라보았다. 아마도 가장 정들었던 장소이자 애틋하게 여겼던 바이샬리를 떠나며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으리라. 붓다는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아난다야, 아마도 이것이 내가 바이샬리를 바라보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 바이샬리는 즐거운 곳이다. 내 마음에 들었던 곳이다.”

사실 붓다의 열반을 위한 여정은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마지막 하안거를 보내기 위해 라즈기르를 떠나 나란다, 파트나와 강가(Ganges)를 건너 바이샬리 암바팔리 동산을 거쳐 바이샬리 벨루바(Beluva)로 오기 전부터 차근차근 입멸에 들 준비를 시작해왔다. 입멸을 위한 준비 중 가장 중요하고 까다로운 문제는 입멸 장소를 어디로 정할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코살라 국이나 마가다 국, 바이샬리 등 어떤 곳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문제가 생길 것이 불 보듯 뻔했기에 마땅한 장소를 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붓다가 아난다에게 마지막 여행을 준비하라고 통보했을 때는 이미 자신의 열반지를 쿠시나가르(Kusinagar)로 정해놓은 뒤였다. 따라서 붓다의 마지막 여정은 북쪽 방향, 그러니까 쿠시나가르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붓다는 왜 자신의 입멸지로 쿠시나가르를 선택했을까. 예나 지금이나 쿠시나가르는 아주 작은 마을에 불과했고, 따라서 당시 대단한 사회적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붓다의 입멸지로는 적합하지 않았을텐데 굳이 이곳을 입멸지로 정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더구나 붓다의 제자들까지도 쿠시나가르가 입멸지로는 지나치게 협소하다며 다른 장소로 정해줄 것을 간청했지 않았는가. 물론 붓다는 제자들의 입멸 장소를 바꾸어야 한다는 간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붓다는 자신이 입멸한 후 사리를 둘러싼 주변 8대 강국의 분쟁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를 고민하던 붓다는 여덟 나라 중 어느 곳의 영토에도 속하지 않았던 쿠시나가라를 입멸 장소로 선택해야 사리를 둘러싼 분쟁을 조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처럼 입멸지로 쿠시나가르를 정하는 배경에 당시 인도의 정치 상황에 대한 붓다의 통찰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붓다 입멸 후 어느 나라도 사리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됨에 따라 공평하게 사리가 분배될 수 있었고, 크고 작은 분쟁을 겪고 있던 주변 8대국은 사리 분배를 계기로 되레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생과 사가 둘이 아니라지만, 생전 45년간 전법을 하며 중생을 구제했던 붓다가 입멸 후에도 평화를 지킨 셈이니 생사를 넘나든 붓다의 대자비가 놀라울 뿐이다.

마지막 여정에 오른 붓다의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때론 곧 죽음을 맞을 것 같은 고통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난다는 어쩔 줄 모르고 눈물을 보일 뿐이었다. 어느날 밤, 붓다가 다시 한번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때 아난다가 슬픔을 머금고 붓다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스승이시여, 당신께서 병으로 고통받을 때마다 제 몸과 마음은 굳어가고 있습니다. 눈앞이 캄캄하고 마음이 어지러워집니다. 하물며 스승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승가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인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다만, 스승께서 아무런 말씀도 남기지 않은 채 가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조금은 마음이 놓입니다.”

“아난다, 승가가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

“스승께서 생존해 계시는 한, 제자들은 어느 때라도 스승을 찾아 묻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승께서 떠나고 없다면 누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까?”

“아난다야, 나는 이미 어떤 것도 감추거나 비밀로 두지 않고 모든 가르침과 계율을 알려주었다. 나는 그대들이 스스로 해탈과 행복을 위해 알아야 할 것을 가르쳤다. 또 나는 승가가 나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고 믿고 있다. 그러니 내가 승가를 위해 어떤 것을 남기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붓다는 자신이 길을 가리키는 사람일 뿐 통치자도 법전도 아님을 강조했다. 어떤 권위도 위임받은 바 없으니 남길 것도 없다고 말했다. 또한 몸이 아픈 것은 여든 살에 이른 노인의 몸이 얼기설기 엮어 겨우 굴러가는 낡은 수레와 같은 것이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되레 위로했다. 그리고는 오직 진리에 의지하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 정진할 것이며, 지금까지 자신이 가르친 진리와 계율을 모든 행동의 기준으로 삼으라고 당부했다.

며칠 뒤 쿠시나가르에서 남서쪽으로 20킬로미터 쯤 떨어진 파바(Fazilnagar) 마을에 도착한 붓다의 일행은 대장장이(연금술사, 또는 철물점 운영자로 알려지기도 함) 춘다(Chunda)의 소유지인 망고 숲에 거처를 정하기로 하고 잠시 머물렀다. 붓다와 그의 제자들이 자신의 소유인 망고 숲에 도착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춘다는 한 걸음에 붓다에게 달려갔다. 소문으로만 듣던 위대한 스승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환희심이 넘쳤기 때문이다. 붓다의 왕림 소문을 듣고 꽤 많은 사람들이 망고 숲으로 모여들었다.

<사진설명>춘다동산에서 바라본 ‘파바 마을’ 전경.

붓다는 그들을 향해 설법을 했다. 너무도 자상하고 쉽게 진리를 설하는 붓다에게 청중들은 한없는 경배를 올렸다. 붓다의 설법을 듣고 더욱 공경하는 마음을 낸 춘다는 다음 날 점심 공양을 자신의 집에서 올릴 수 있기를 간곡히 청했다.

장(臟)이 좋지 않아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할 지경에 있음을 잘 알면서도 붓다는 춘다의 요청을 기쁜 마음으로 수락했다. 몸이 아프다고 해서 공양의 복덕을 지으려는 재가자의 간절한 마음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인천의 스승이자 복전으로서 승가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준 것이다.

붓다와 제자들을 위해 공양을 준비하는 춘다의 마음은 한없이 기뻤다. 마련한 여러 음식 중에는 당시 고급 요리에 속했던 멧돼지 고기 요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음날, 공양을 위해 자신의 집에 도착한 붓다 일행을 위해 춘다는 정성껏 마련한 음식을 내놓았다. 먼저 붓다에게 공양을 올리고, 차례로 제자들 앞에 음식이 차려졌다. 춘다가 정성을 다해 올리는 한 음식을 지켜본 붓다는 그 재료가 무엇인가를 물었다. 멧돼지 고기임을 안 붓다는 대부분 채식을 주식으로 삼았던 제자들이 멧돼지 고기를 잘 소화할 수 없을 것이 염려돼 잠시 고민을 했다. 정성껏 마련한 멧돼지 고기를 우리 모두가 사양할 경우 정성을 다한 춘다의 마음에 상처를 안기게 될 것이고, 그렇다고 이 고기를 모두 수용할 경우 기름투성이 고기를 소화하기 힘든 제자들 상당수가 고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붓다는 춘다를 향해 말했다.
“춘다여, 나와 제자들을 위해 이 음식을 마련하느라 고생이 많았을 것이오. 그러나 이 특별한 요리는 수행자에게 잘 맞지 않습니다. 그대가 원한다면 내게는 이 음식을 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제자들에게는 주지 말아주십시오.” 춘다는 잠시 당황했지만, 붓다만이라도 정성껏 마련한 음식을 드시겠다는 것이 기뻤다.

공양을 마친 붓다는 갈망과 집착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관대함과 보시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침을 설한 후 춘다의 집을 나섰다. urubell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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