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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좇다 참선 만나 평상심의 道 체득”

기자명 법보신문

참선수행 20년 법장 권영두 옹


생사를 해탈함이 쉬운 일 아닐세
사나운 소 코 꿰어 길들이듯 하게.
눈서리 찬 기운 뼛속까지 사무친 뒤
매화꽃 짙은 향기 코를 찌르리.
-황벽 희운


20년 넘게 참선수행에 전념하고 있는 권영두(75·법장) 옹. 그가 불법을 만난 것은 그야말로 기연(奇緣)이었다. 고향 영덕을 떠나 피붙이 하나 없는 서울로 올라온 것은 옹의 나이 열일곱 되던 해였다. 옹은 신문배달, 청소부, 외판원, 노점상 등 온갖 궂은 일을 마다않고 돈을 모았다. 또 밤이면 졸린 눈을 치켜뜨고 악착스레 공부해 마침내 대학에도 입학했다. 그러나 곧바로 터진 한국전쟁. 오랜 군복무를 해야 했던 그는 1957년 제대와 함께 사업에 뛰어들었다. 돈을 많이 벌어 학교를 세우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옹은 하루를 48시간 살 듯했고, 사업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불면의 밤과 술·담배 양도 늘어만 갔다.

그렇게 십수 년간 고생한 끝에 사업이 안정궤도에 오를 무렵, 그는 쓰러졌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해야 했다. 위가 온통 구멍이 나 더 이상 살기 어렵다는 진단결과였다. 두려움, 분노, 슬픔…. 그는 깊은 우물 속으로 떨어지는 조약돌마냥 절망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1975년 12월말 그는 수술을 받았고 기적적으로 소생했다. 그러나 옹을 기다린 것은 또 다른 절망이었다. 그의 동업자가 피땀 흘려 모은 사업자금을 몽땅 갖고 도망간 것이었다. 몇 달 뒤 이 사실을 안 그의 눈에는 불꽃이 튀었다.

50대에 참선…종달노사에게 사사

옹은 병든 몸을 이끌고 동업자를 찾아 각지를 떠돌았다. 가족의 만류도 소용없었다. 분노는 하루하루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동업자의 사촌동생을 만난 것은 그 후 몇 달이 지난 서울에서였다. 할 얘기가 있다는 사촌동생은 그에게 일요일 인현동 다방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리고 막상 만나 한다는 얘기가 오늘 삼보법회가 있으니 법문을 들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의였다. 옹은 기가 막혔다. 일말의 기대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는 와중에도 묘한 것은 분노만큼이나 궁금증도 동시에 컸다는 점이다. 옹은 한 번 들어보기로 했다. 무진장 스님의 법문, 처음 접하는 불교얘기였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폐부 속에서 천둥처럼 울러 퍼졌다.

77년 여름, 그는 ‘원수’를 찾아 헤매기를 포기하고 불교공부에 빠져들었다. ‘세상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니…, 나는 그동안 얼마나 미혹과 무명(無明)에 휩싸여 살았던고.’ 옹은 한의학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출판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몇 해가 흐른 어느 날 퇴근하는 버스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옛 동업자를 마주쳤다. 초췌한 몰골에 흔들리는 눈빛. 옹은 첫 눈에 그가 어떤 상태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옹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집으로 데려가 저녁을 대접하고 용돈까지 주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러나 고마운 건 오히려 옹이었다. 그로 인해 돈을 잃은 대신 불법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비심 덕일까. 83년 3월 옹은 삶의 두 번째 전환기를 맞았다. 재가간화선의 큰 지도법사였던 종달 이희익 노사를 만난 것이었다. 주변 법우들의 권유로 노사를 찾아간 옹은 그가 대선지식임을 한 눈에 직감했다. 동시에 참다운 행복이 어떤 것인지, 사람이 살아가며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노사는 “화두공부란 목마른 이가 물을 찾듯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절박하고 비장한 각오로 해야 한다”며 “무(無)자를 참구하라”고 했다. 점검은 매주 한 차례씩 이뤄졌다.

‘아침 좌선을 하지 않으면 하루를 굶고, 저녁 좌선을 하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겠다’는 결심을 평생 실천하게 된 것도 이 때부터다. 실제 훗날 평생의 도반이었던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는 아침저녁으로 좌선을 했다. 옹에게 참선공부는 물을 마시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이미 좋고 싫음의 차원을 넘어선 삶 자체였던 까닭이다.

50대 중반에 참선을 처음 시작한 그는 굳어진 뼈마디를 어루만지며 이를 악다물고 결가부좌를 했다. 그럼에도 참구해야 할 ‘무’는 미꾸라지마냥 이리저리 빠져나가고 오만가지 망상만이 머리 속을 헤집고 다녔다. 한 달 뒤 그는 스승 앞에 처음 앉았다. 그의 머리 속에는 온갖 생각들이 부지런히 오고갔다. ‘유(有)의 반대라고 말할까, 전혀 아무 것도 없는 상태라고 할까, 아니면 무엇이든지 존재하다가 없어진다고 할까, 공(空)과 같은 것이라고 말해야겠다.’ 그가 말을 막 꺼내려는 순간 스승은 손을 휘저으며 “다음주에 와서 다시 내놓으라”고 했다. “화두는 알아맞히려 하지도 말고, 헤아리지도 말고, 그저 모기가 무쇠로 만든 소에게 덤벼들 듯이 목숨을 내어 놓고 계속 뚫으면 마침내 몸뚱이까지 들어갈 때가 있으리라”는 게 스승의 가르침이었다.

아내 보낸 날에도 아침저녁 참선

옹은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무’를 참구해 나갔다. 전문서적을 다뤄야 했던 탓에 원고청탁이나 교정 등 하나에서 열까지 그가 모든 것을 맡아해야 했지만 화두만은 놓지 않았다. 오히려 길거리나 버스 안은 물론 화장실 등이 그에게는 최적의 도량이었다. 옹은 일상에서 ‘무’자를 떼어놓지 않았다. 하지만 스승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다시 한 달, 두 달, 일년이 지나갔다. 저리던 다리와 발목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단전의 심호흡도 깊어졌건만 스승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마침내 1년 반이 되던 초가을 그는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무’자를 크게 외치고 경계를 더욱 큰소리로 내질렀다. 스승은 그제서야 빙긋이 웃으며 ‘날아가는 비행기를 멈춤’ 이런 글귀를 적어주며 “이제는 이것을 새롭게 참구하고 경계를 가져오라” 했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어떻게 날아가는 비행기를 멈추게 한단 말인가.’ 옹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매일 비행기 멈추기를 참구해 결국 두 달만에 스승으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도록 했다. 이어 ‘손을 쓰지 않고 호미자루를 잡으라’ ‘이천 소가 여물을 먹으니 제주도 말이 배부르다’ ‘사람이 다리 위를 지날 때 다리는 흐르는데 물은 흐르지 않는구나’ ‘천길 물 속의 자갈을 손에 물을 묻히지 않고 끄집어내는 솜씨’ 등 잇따라 화두를 내놓았고, 옹은 이를 타파하기 위해 적게는 며칠에서 많게는 몇 달씩 참구해야 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후 스승은 비로소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무문관』 제1칙의 ‘조주구자(趙州狗子)’를 공부하라고 했다. 선종 최후의 공안집이라는 『무문관』, 그 중에서도 ‘조주무자’는 팔만사천법문이 이 한 칙으로 모두 통한다는 화두였다. 옹은 발심을 해 참구하면 참구할수록 마치 벌겋게 단 쇳덩이를 삼킨 듯 갑갑함과 괴로움이 더해갔다. 그러나 죽을지언정 멈추지 않겠다는 각오로 달려들었다. 이렇게 화두 하나하나를 타파하며 『무문관』의 마지막 화두인 48칙 ‘건봉일로(乾峯一路)’까지 모두 마쳤을 때는 공부를 시작한지 비로소 7년이 흐른 뒤였다.

“나 같은 둔재는 너무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크게 깨치지 못하고 정해진 단계별로 투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 같은 둔재도 부지런히 노력만 하면 흐르는 세월이 약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매년 수백권씩 선서(禪書) 보시도

90년 6월 스승이 입적한 뒤에도 옹은 도반들과 더불어 화두공부를 계속했다. 그리고 그 공부는 옹을 완전히 딴 사람으로 바꿔 놓았다. 경천동지할 신통력보다도 더 뛰어나고, 어떤 일에도 흔들림 없어 마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평상심’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선을 알게 된 게 너무 고맙고 고마워 대학교, 교도소, 군대 등에 선과 관련된 서적을 매년 수백 권씩 보시해오고 있다. 특히 지난 여름에는 자신의 수행체험을 담은 『생활 속의 좌선수련 20년』(운주사 간)을 펴내기도 했다.

옹이 기거하고 있는 은평구 정안헌(正眼軒)을 떠나오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자유로우시냐고, 또 행복하시냐고…. 우문(愚問)이었다. 옹이 손을 꼭 잡으며 무문 선사의 게송을 나직이 들려주었다.

봄에는 백화가 만발하고 가을엔 달 밝다
여름엔 선들 바람 불고 겨울엔 눈 내리니
쓸데없는 생각만 마음에 두지 않으면
이 세상 언제나 한결같이 좋은 시절일세.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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