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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황금의 나라에 첫 발을 딛다

기자명 법보신문

진신사리 갈망했던
보석같은 탑의 왕국
신심만이 이 땅의 희망

2004년 10월 30일. 새벽 4시 30분에 눈을 떴다. 미지의 나라 미얀마로 떠난다는 기대감에 평소 출근길을 괴롭히던 수마(睡魔)도 이날은 맥을 추지 못했다. 오랜만에 쌉쌀한 새벽 공기를 허파 가득 들이 마셨다. 머리 속이 물가의 바람 같은 청량감으로 찰랑거린다. 공항은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아침부터 어디로들 떠나는지. 일상에서 벗어난 편안함에 마음은 한없이 늘어져 스치는 모든 인연들이 오래된 동료인양 친근하기만 하다.

<사진설명>미얀마의 하루는 승가의 거리탁발로 시작된다. 주민들은 정성껏 마련한 그날의 첫 음식을 공양올리며 고단한 또 하루를 희망으로 연다.

일행은 공항 한켠에 상기된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미얀마로 떠날 사람은 나를 포함해 모두 7명. 성지순례 일행치고는 그야말로 조촐한 인원이다. 간단한 상견례가 끝나자 바로 수속에 들어갔다. 미얀마로 가는 길은 불교의 나라 태국을 경유했다. 하늘 길이 열려 있기는 하지만 비행기 편이 많지 않은데다, 여행경비를 조금이라도 아끼고자 하는 마음은 이심전심(以心傳心). 여기에다 미얀마 비행기를 타보지 못한데서 오는 두려움도 솔직히 작용했다.

“기자 신분 철저히 감춰라”

썰물처럼 밀려왔다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여행에 대한 즐거운 상념에 잠기는 것도 잠시, 여행 준비를 전담하다시피 한 최오균 씨를 통해 미얀마 현지 사정을 자세히 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순간 부풀어 오른 마음이 바람 빠지듯 잦아든다. 미얀마는 군부독재로 외국인에 대한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 최근 총리가 군부에 의해 감금되는 국가 중대 사태가 일어나 미얀마로 떠나는 여행객들의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는 설명이다. 게다가 나를 향해서는 기자라는 신분이 밝혀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충고를 잊지 않는다. 순간 나는 찬바람이라도 쏘인 듯 머리칼이 쭈뼛거렸다. 이내 밀려드는 불안감이라니….

최오균씨는 아픈 부인을 위해 잘 나가던 회사를 과감하게 정리하고 수년간에 걸쳐 세계 50개국을 배낭 하나에 의지해 답사한 명실상부한 여행 전문가. 그러니 그의 말을 어찌 허투루 들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쩌랴. 종군기자의 마음으로 버틸밖에. 순간 나도 모르게 분주하게 손을 움직여 기자 신분증을 배낭 깊숙이 숨기고, 기자 수첩의 겉표지를 뜯어냈다. 두툼하게 담아왔던 명함을 모두 쓰레기통에 처박은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만약 잠입취재라는 오해라도 사게 되면 한국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우스개 소리로만 들리지는 않았다. 덕분에 이후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이름과 주소를 적어주는 일이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 더구나 표지없는 맨살의 수첩은 14일에 걸친 여정동안 너덜너덜한 걸레가 돼 버려 혹여 취재 내용이 분실되지 않을까 내내 불안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걱정을 모두 덜은 것은 아니었다. 디지털 장비를 병적으로 싫어한다는 미얀마 관리들이 배낭에 든 최신형 노트북과 디지털 카메라를 어떻게 생각할는지. 미얀마에 도착해 공항을 벗어나기까지 불안은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자비에 기대는 수밖에….

이윽고 거대한 몸체의 비행기는 땅을 박차고 하늘로 기지개를 켰다. 출발이다. 앞으로 방콕을 경유해 미얀마 양곤까지는 10시간 이상이 걸리는 대장정이다. 태국의 전통 의상을 입은 스튜어디스의 미소를 머금은 합장에 마음은 아늑하게 아래로 무너져 내린다. 이윽고 가벼운 긴장과 흥분, 그리고 알 수 없는 애수(哀愁)마저 겹쳐 기분이 이상야릇하다. 동그란 창 밖으로 내다본 하늘은 강렬한 태양에 황금빛으로 찬란했다.

여행이 시작되기 전, 미얀마에 대한 정보는 제로에 가까웠다. 위파사나 붐을 타고 미얀마에 대한 소식들이 귀를 넘어 들어왔지만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인도-네팔의 부처님 8대 성지, 태국의 불교유적 등 익히 알려진 유적에 대한 대중성에 매몰 돼 진실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이는 불안정한 정치 상황과 불편한 교통편으로 쉽게 개방을 허락하지 않는 미얀마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크게 잘못된 일만은 아니다.

<사진설명>백발의 긴 머리를 곱게 땋은 노불자가 온통 황금으로 칠해진 짜익티요 사원에서 철야기도를 하고 있다. 미얀마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가장 폐쇄적인 극빈국

따지고 보면 미얀마는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다. 뱅갈만과 안다만해 동쪽 해안에 자리 잡고 있는 미얀마는 한반도 3배, 남한의 7배에 이르는 거대한 나라다. 동남쪽으로 태국과 라오스, 북으로 중국과 접해있으며, 북서쪽으로 방글라데시, 인도와 접해있다. 한때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을 두 번이나 점령해 전륜성왕의 징표인 흰 코끼리를 빼앗은 동남아 강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북한과 함께 가장 폐쇄적인 나라로 알려져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불과 270달러. 그 흔한 고속도로도 하나 없는 그야말로 세계 극빈국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미얀마의 낙후된 현대화는 가공되지 않은 원석처럼, 세속화에 물들지 않은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회색의 빌딩 대신 거대한 탑과 사원이 전국토를 에워싸고 부처님 가르침이 산소 마냥 대지에 스며있다. 미얀마가 부처님 당시의 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보존하고 있는 지구상에 남아있는 유일한 땅, 즉 불국토라 불리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자신들의 역사를 불교와 연관지으려는 미얀마 사람들의 마음 씀이 조금은 유별나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나기도 전인 기원전 9세기, 석가족의 일파가 미얀마로 이주해 최초의 왕조 더가웅을 세웠고, 부처님이 500나한을 이끌고 미얀마를 방문, 때가 되면 이 땅에 불교가 크게 융성할 것이라 수기했다는 내용을 그들은 자랑스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로 믿고 있다. 허나 미얀마가 역사를 기록으로 남긴 시기는 불과 서기 10세기 전후, 또 석가모니 부처님이 북인도 지방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는 역사라기보다 설화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이방인 맞은건 어두운 공항

그러나 이런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부처님 진신사리에 얽힌 미얀마의 애잔한 역사. 그 의미를 알게 된다면 설화마저도 역사로 믿고 싶은 그들의 눈물이 조금은 이해가 될 듯도 싶다. 미얀마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얻게 된 것은 1948년. 대영박물관에 보관돼 있던 인도 산치 대탑의 진신사리가 인도의 독립과 함께 반환되면서부터다. 당시 반환 소식을 들은 미얀마 초대 수상 우노는 부랴부랴 인도로 달려가 사리 분배를 요청했다. 눈물을 곁들인 호소와 읍소 끝에 인도 네루 수상은 결국 사리 분할을 승낙했고, 미얀마는 이를 국보로 지정, 종교성 금고에 지금껏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사리 이운에는 군대가 동원됐으며, 정부는 이날을 휴일로 선포했다. 국민들은 모두 거리에 쏟아져 나와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 이 일로 우노 수상이 국민적인 영웅이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미얀마가 진신사리를 얻기 위해 보낸 세월은 무려 1000년이다. 서기 1056년 남부 지방의 타톤 왕조를 무너뜨리고 미얀마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 왕조를 세운 바간의 야노라타왕이 진신사리를 얻고자 원력을 세운 이후 왕과 왕조를 이어가며 계속됐다. 당시 야노라타왕은 통일 왕조를 세운 힘을 바탕으로 중국과 스리랑카에 잇따라 부처님 치사리를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차가운 거절. 비록 미얀마를 통일했지만 대적하기에 당시 중국의 송 제국은 너무나 강대했고, 스리랑카는 너무나 멀리 있었다. 다행히 스리랑카로부터 모조 치사리를 얻기는 했지만 이것이 전부였다. 그 후로도 역대 왕과 왕조들은 진신사리를 얻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미얀마는 사리와 인연이 없었다. 사리를 가지고 있는 중국과 인도는 미얀마가 상대하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나라였던 탓이다.

얼마나 잠을 잤을까? 곧 공항에 착륙한다는 안내 방송에 비로소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방콕에서 미얀마 항공으로 갈아탄 지 대략 1시간은 지난 듯싶다. 양곤은 미얀마의 수도. 그러나 하늘에서 본 도시는 어두웠다. 간신히 켜진 불빛도 가물거리기는 마찬가지. 땅에 내리기도 전 그들의 궁색한 가난에 가슴이 먼저 아렸다. 문득 어릴 적 기억들이 쏟아져 내렸다.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하던 외할머니, 저녁이면 불빛 한점 없이 캄캄했던 산골 외갓집. 마치 우리네 산골 어디쯤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면 지나친 억측이었을까.

<사진설명>여자아이처럼 예쁜 얼굴의 초등학생 형제. 얼굴에 얼룩이 진 이유는 나무가루로 만든 '다나까'라는 피부보호제를 발랐기 때문이다. 마치 분장한 배우들처럼 천진한 웃음이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밍글라돈 공항은 명색은 국제공항이지만 형편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전산화되지 않은 수작업에 입국수속은 지루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걱정과 달리 노트북과 디지털 카메라가 너무나 쉽게 통과됐다는 것이다. 무사히 공항을 빠져 나오자 더운 열기가 후끈 얼굴을 달군다. 우리나라의 60∼70년대 시골에서나 보았음직한 낡은 차량들이 마른기침을 간신히 토해내며 공항으로 들어온다. 미얀마의 관문 양곤은 이렇게 이방인을 맞았다.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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