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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미얀마의 관문 수도 양곤

기자명 법보신문

‘불안한 평화’ 속
어린아이 출가 물결은
佛緣주려는 ‘부모사랑’

미얀마의 수도 양곤의 더위는 상상을 불허했다. 도착 시간이 자정을 넘겼는데도 섭씨 30도는 족히 돼 보였다. 공항 입구를 벗어나자 더운 열기는 피부를 뚫고 들어와 아예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한 낮의 태양이 남긴 폭염의 잔해가 질기게도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팥죽 같은 땀이 연신 바닥으로 흘렀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뜨거운 열기도 이국(異國)의 풍물에 오히려 갈수록 광채를 발하는 나의 눈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난생 처음 보는 풍경과 말, 그리고 사람들.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해 오감(五感)은 오히려 명징하게 깨어났다.

<사진설명>미얀마의 수도 양곤 시내에서 바라본 쉐라곤파고다 전경. 시내에서 유일하게 빛을 발하는 곳이다.

바람결에 묻어 온 독특한 향은 줄곧 코를 진하게 자극했다. 열대 과일의 향인지, 미얀마 음식의 향인지 알 수 없는 그 내음. 마늘 냄새를 통해 한국에 와 있음을 실감한다는 외국인들의 말이 실감이 났다. 코를 통해 비로소 미얀마에 와 있다는 사실을 확연히 인식하게 된 것이다.

양곤은 인구 500만이 살고 있는 거대한 도시다. 과거에는 다곤, 랭군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바간, 바고, 만달레이 등 미얀마 역사의 중심이었던 고대 도시와 달리 조그만 남부의 항구에 불과했던 이곳이 수도로 자리 잡은 것은 근세 이후의 일이다. 양곤은 미얀마어로 ‘싸움이 끝난 곳’이라는, 평화의 의미를 담고 있다. 아마도 영국과 일본에 의해 당했던 처절했던 식민지배, 그 고통을 잊고자 하는 바람이었으리라. 그러나 미얀마 현실은 평화와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1988년 유혈이 낭자했던 민중봉기. 감금돼 있는 세계적 인권지도자 아웅산 수지. 갈수록 공고해지는 군부독재. 쌓이는 국민들의 불만.

핸드폰·자가용이 부의 상징

바람 앞의 촛불이랄까, 아니면 태풍 전야라고나 할까. 양곤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싸움이 아주 끝나지는 않은 듯 싶다. 공항 입구를 빠져 나오자 환한 웃음을 머금은 미얀마인들이 짐부터 받아 챙겼다. 그 모습이 어찌나 따뜻한지 마치 고향의 친구를 만난 듯 포근하기 이를 데 없다. 한국말이 너무도 유창해 물어보니 한국과의 인연들이 모두들 남다르다.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적게는 5년, 많게는 8년을 살았다는데, 이들의 인연도 미얀마가 아닌 한국에서 맺어진 것이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쪽빛 하늘과 울긋불긋한 가을 산이 보고 싶다”며 한국의 근황을 물어오는 이들의 말 속에는 그리움이 진득이도 묻어있다.

이들은 미얀마에서 탄탄한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모두들 한국에서 적지 않은 돈을 모은 데다, 사업 수완까지 익혀 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핸드폰과 자가용을 소유하고 있었고 작은 사업과 무역을 하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버스 편이 없는 공항에 마중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자가용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흘렀다. ‘과연 굴러나 갈까’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자동차들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고물들이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쓰던 트럭과 버스가 아직까지 굴러다니는데, 트럭의 경우 뚜껑이 없어 엔진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것이 태반이다. 시내를 오가는 택시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고장 나지 않고 목적지까지 가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될 만큼 모든 것이 열악했다. 에어콘이 없어 유리창 바람으로 폭염을 달래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매연이다. 이들 차량이 내 뿜는 매연은 호흡이 불가능할 정도다. 각종 차량에서 쏟아진 시커먼 연기가 배기통을 통해 공기 중에 뿌려지는데 이를 참고 사는 미얀마 사람들의 인내력이 되레 놀라울 지경이다. 이렇게 형편없어 보이는 차량도 가격은 만만치 않다. 새차는 수억 원을 호가하고 있고, 5~6년 정도 지난 중고차의 가격도 적게는 수백만원에서 많게는 수천만원에 이른다고 한다. 중·고등학교 교사의 월급이 공식적으로 우리 돈 만원에 불과하다고 하니, 자동차의 가격 수준에 눈이 다 휘둥그레질 정도다. 그러나 정비 기술 하나만큼은 세계적인 수준이라니, 비웃어야 할지 칭찬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가난한 절살림… 손님은 극진히

어찌됐던 미얀마에서의 첫밤은 샨졍이라는 사찰에서 보내기로 했다. 미얀마 불교를 제대로 체험하기 위해, 하루 밤 정도는 반드시 사찰에서 묵을 필요가 있다는 대중의 의견이 모아졌기 때문이다. 양곤 시내에 위치한 샨졍은 미얀마를 구성하고 있는 8대 종족(까친, 꺼야, 꺼인, 친, 라카인, 몬, 샨, 버마) 가운데 하나인 샨족이 세운 절이다. 양곤으로 공부하러 오는 샨족 출신의 스님들 대부분이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데 같은 민족에 대한 끈끈한 정과 뜨거운 우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마냥 호의적으로 볼 수만은 없는 측면도 있다. 여러 민족으로 갈려 대립과 반목으로 고생하고 있는 미얀마의 실타래처럼 얽힌 어두운 현실을 드러내는 한 단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진설명>샨졍에서 묵었던 숙소. 절 안 건물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미얀마는 남방 불교의 특징을 원형대로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따라서 부처님 당시, 또는 초기 불교시대의 승단의 모습이 잘 유지되고 있다. 이를테면 가람 배치에 있어 대승의 새로운 전통에 익숙한 우리네 절은 부처님의 공간인 탑과 스님의 공간인 승원이 함께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미얀마는 이를 철저히 분리하고 있다. 미얀마에서 부처님을 모신 공간을 탑이라는 뜻의 ‘페이야’라고 부르는데 탑을 중심으로 수많은 불상이 배치된 거대한 참배의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이에 반해 스님들의 공간인 승원은 ‘졍’이라 불리며 우리의 강원 같은 형태로 운영되며 수백 명의 스님들이 함께 모여 수행 정진하고 있다.

샨졍은 공항에서 대략 40~50분 거리에 있었다. 공항에서 양곤으로 들어가는 길은 전시행정이라는 비난이 있을 정로도 아름다운 길로 소문이 나 있었지만 밤이 너무 깊은 관계로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다. 아니 차에 오르자마자 여독이 온몸으로 일시에 퍼져 눈이 절로 감겼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다만 늦은 저녁이라 그런지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은 허파를 적실만큼 시원했다.

절에 도착하니 어둠이 한창 무르익은 시각이었지만 주지 스님의 환대는 대단했다. 2층의 아담한 요사에 잠자리를 마련해 줬는데 오랜 여행기간에 지친 심신의 피로가 모두 풀리는 듯 편안했다. 정을 담뿍 담은 우유를 섞은 따뜻한 홍차를 받아든 순간 몸보다 마음이 먼저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편안히 쉬셨습니까?”
온화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주지 우둔다라 스님(40)의 이웃집 아저씨 같은 털털한 말소리에 정신이 맑게 개였다. 태양은 어둠을 몰아내고 벌써 주변을 빛으로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다. 스님이 정성껏 마련해 준 아침 공양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그제야 사찰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법당과 소임자 스님이 거주하는 요사채, 그 옆으로 강원과 스님들의 숙소. 절을 품은 터가 그리 넓지는 않지만 짙푸른 숲이 둘러싸인 경내의 아담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 마음마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건기(비가 오지 않는 기간)라서 그런지 주변이 너무 맑고 명징해, 시력이 좋아진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눈 가는데로 둘러보니, 아름다움의 절정은 절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었다. 작은 골목길로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절로 통하는 길목이다. 길지는 않지만 20~30m를 훌쩍 넘는 거대한 대나무와 열대 나무가 사이좋게 줄을 지어 바람에 살랑대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더구나 그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한가롭게 경전을 외우는 스님들의 모습이라니.

정겨움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모아 물감으로 풀어놓은 듯 아름다운 조화에 눈에 이슬 같은 눈물이라도 맺힐 것 같다. 100여 명에 가까운 스님들이 가사를 빨아 대나무로 만든 빨래 걸이에 길게 늘어 논 모습은 부처님 당시의 모습을 보는 듯 작은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눈길 닿는 곳마다 가난은 숨길 수 없이 드러나 있었다. 절을 구성하고 있는 건물들은 하나같이 생기를 잃고 있었다. 건물들은 보수한지 한참이나 된 듯, 쇠락해 있었고, 페인트가 벗겨져 검게 핀 곰팡이를 가득 안고 있었다. 물이 흐르는 곳엔 어김없이 녹색의 이끼류가 피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안쓰럽게 했다. 그나마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건물은 우리가 묵었던 손님용 요사채 하나에 불과했다.


출가 거쳐야 불이익 없어

새벽에 일어나 죽을 먹고 좌선에 들었던 스님들이 탁발을 나갔다 돌아왔다. 자세히 보니 이제 겨우 5~6살이나 됐음직한 어린 스님들도 끼어있다. 사진기를 들이미니 자연스럽게 자세까지 잡아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살가운지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손끝으로 흐른다.

듣고 보니 미얀마에서는 어린 나이에 출가하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한다. 출가를 할 때는 얼굴과 몸에 온갖 치장을 하고 절에 들어오는데 이를 ‘신쀼’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출가는 10살 전후의 아이들이 대상인데 가끔은 너무 일찍 절로 보내지는 바람에 똥오줌을 못 가리는 일도 종종 있다고 한다. ‘신쀼’는 철저히 개인의 자유에 달려있다. 그러나 미얀마에서는 이 의식을 치러야 비로소 하나의 인격체로 대접 받을 수 있다. 또 나중에 환속하더라도 결혼이나 취직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기 때문에 ‘신쀼’는 사실상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미얀마의 통과의례라 할 수 있다.

<사진설명>샨졍으로 출가한 어린 사미승. 카메라를 들이밀자 포즈를 잡아주는 모습이 천진스럽다.

이날은 아침부터 아이들을 예쁘게 치장하고 절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스님에게 가사를 공양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어릴 때부터 아이에게 불교와 인연을 맺게 해 선업(善業)을 쌓게 하려는 부모의 배려가 깔려있다고 한다.

“사람 몸 받고 태어나기 어렵다는 말이 있지요. 미얀마에서는 자식이 출가하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생각합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식에게 얼마나 깊은 신심을 심어주는냐에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떠날 채비를 하며 산디마 스님은 미얀마 부모들의 유별난 자식 사랑을 이렇게 설명했다.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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