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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에 만난 사람-청사 안광석 옹

  • 사회
  • 입력 2004.08.1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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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만해는 義人 전형 보인 선지식'

전각의 명인으로 익히 알려진 청사 안광석(晴斯 安光碩, 87) 옹은 한 때 수행의 길을 걷던 스님이었다. 1938년 부산 범어사에서 출가한 옹은 우연히 그곳 범어사에서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 스님을 만났다. 스님의 인품에 매료된 옹은 이후 서울과 범어사를 오가며 스님을 자주 친견했고 한동안 성북동 심우장에서 머물며 만해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3.1절을 얼마 앞둔 2월 22일 일산 자택에서 안광석 옹을 만나 만해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안 옹은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만해 스님과 관련된 일만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만해의 말투와 몸 동작까지도 잊지 않고 있었다. 옹이 가장 먼저 꺼낸 얘기는 만해 스님과 함께 부산 기장에서 척판암에 오를 때의 일이었다.

1943년 음력 9월 14일, 옹은 범어사 내원암에 내려와 있던 스님을 모시고 척판암을 향하고 있었다. 석양이 뉘엿뉘엿 기울고 초저녁 달이 뜰 무렵 사람들이 옹달샘에 모여 물을 퍼가고 있었다. '대희(당시 옹의 법명)야, 사람들이 무엇을 하느냐' '가뭄 때문에 물을 뜨러 올라온 모양입니다.' 이를 한참 굽어보면 만해는 즉흥시를 읊었다.



물장수 물만 퍼갈 줄 알았더니

밤새도록 담궈둔 달까지 퍼가는구나.

이후(以後)란 일러두거라

물장수 물만 퍼가거라.



당시 건강이 악화돼가고 있던 만해 스님이 척판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 중. 적막한 산사에 달빛만이 방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만해가 다시 시를 읊조렸다.



오! 공산(空山)의 적막이여.

어디서 한가한 근심을 가져오는가.

차라리 두견성(杜鵑聲)도 없이

오! 공산의 적막이여.



옹은 만해 스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시였다고 회상한다. 또 시적 감수성뿐 아니라 『불교대전』을 편찬할 정도의 해박한 불교이해와 뛰어난 직관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고 말한다.

'스님은 견성한 선사였고 뛰어나 학승이었으며 한 시대를 이끌어간 선각자였지. 그런 분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어. 본질을 꿰뚫어보고 아는 것은 반드시 실천했던 분이었으니까.'

이후 옹은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 올라와 만해 스님에게서 수학을 했다. 당시 심우장에는 최범술, 김법린 등 10여 명이 공부를 하고 있었고, 스님은 제자들을 가르치거나 참선수행을 했다고 한다.

'스님은 체구는 작았지만 목소리가 쩌렁쩌렁했어. 하지만 사람들과 말할 때면 오른손으로 아래턱을 잡고 말씀을 하셨지. 고문을 심하게 당해 후유증으로 턱을 몹시 떠셨기 때문이었어. 스님께서는 만년에 제자들에게 주로 불교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어. 특히 원효대사를 존경했던 만해 스님은 제자들에게 원효를 공부할 것을 늘 권하시고는 했지.'

옹은 만해 스님이 생활고와 일본 경찰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한번은 옹이 만해 스님을 모시고 조계사에 들렀다가 심우장으로 돌아갈 때였다. 성북동 고개에 이르렀을 때 마침 육당 최남선이 만해 스님을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그런데 스님은 '내가 아는 육당은 죽어 장송한지 오래'라며 철저하게 외면했다. 머쓱해진 육당은 돌아서서 도망치듯 성북동 고개를 넘어갔고, 스님은 그의 머리 끝이 안보일 때까지 합장을 하고 서 있었다.

'스님, 인사도 안 받더니 합장은 왜 하십니까?'

'귀신한테는 합장을 하는 법이지. 민족이랑 정신이랑 다 팔아먹었으니 그것이 산 사람인가 죽은 사람이지.'

오척 키에 다부진 인상, 의가 아니면 죽어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격. 안광석 옹이 기억하는 만해 스님의 모습이다.

스님의 입적을 지켜보았는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구순을 바라보는 옹은 갑자기 통곡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범어사에 그 소식을 들었어. 천붕지탁지변(天崩地坼之變)이라,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듯했지. 그 길로 바로 서울로 올라왔지만 이미 장례식은 끝났어. 하지만 일제 때문에 묘도 제대로 못쓴 것을 보고 또 한번 마음이 찢어지는 듯 했지.'

평소 새기고 파는데 남다른 재능이 있었던 옹은 동산 스님의 소개로 만해 스님과 더불어 33인의 민족대표 중 한 분이었던 위창 오세창 선생으로부터 전각기술을 전수 받았다. 이후 그는 화두 대신 철필을 잡고 마음의 수행을 계속해 왔다. 전각에 대한 명성이 높아지면서 그가 새긴 인장을 갖고 싶어하는 유명인들도 늘어갔다. 심지어 이승만에서부터 김영삼에 이르기까지 역대 대통령들이 비서관을 시켜 자신의 인장을 새겨달라는 요청을 해왔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끝까지 바른 정치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인 사람들에게는 한 획도 허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스승의 그 제자였던 것이다.

'한 평생 만해 스님을 잊지 않고 그 분처럼 살려고 노력했지. 그 분은 내게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신 진정한 선지식이었어.'

형형한 만해 스님의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는 옹은 요즘 세태에 대한 지적도 잊지 않았다.

'만해 스님은 수많은 글을 쓰고 강연을 했지만 그 말과 행동이 어그러진 것을 보지 못했어. 그러나 요즘 책임 있는 사람들 중에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이 영 다른 것을 많이 보곤 하지. 그래선 아무 것도 안돼.'

옹은 '만해 스님은 승려로서 시인으로서 지성인으로서 가장 성실하게 살아가신 분'이라며 '만해는 바르게 살려는 모든 사람들의 영원한 이정표'라고 강조했다.



이재형·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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