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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융기의 2박3일 1만배 도전기

기자명 법보신문

“1만배 했는데 뭐는 못하겠어요”

“얘들아, 다섯 시 반이야! 갈 때 됐는데 일어나야지.”
지영(13)이는 엄마 목소리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벌써 새벽이라니…. 아! 내가 왜 이걸 시작했지. 확 그만둘까. 안돼, 그래도 어제 3600배나 했는데….’

지영이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눈은 떴지만 여전히 그만둘까 하는 유혹과 갈등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곧 동생 융기(12)도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씻는 둥 마는 둥 세수를 한 두 남매는 꾸역꾸역 아침식사를 마쳤다. 새벽 6시, 드디어 출발. 둘은 아빠 민병흥(53·현진) 씨 차에 올랐다. 엄마 오애자(47·보문월) 씨도 애들과 같이 절을 하려 집을 나섰다.

주변 격려 속 자발적 시작

처음 지영이와 융기가 2박3일간 1만배를 하겠다고 했을 때 애들 못지않게 긴장한 건 부모다. 지난 주 일요일 절에 다녀오더니 아이들이 뜬금없이 1만배를 하겠다고 선언한 거다.

“이제 중학생이 되잖아요. 정리할 것도 있고 계획도 세워야 하고요.”
“난, 그냥요!”

나이에 비해 의젓한 지영이와 지기 싫어하는 융기의 답변이었다.

‘어른도 힘든 1만배를 설마 애들이….’ 민 씨 부부는 허락하면서도 반신반의했다. 또 한편으로는 저러다가 무릎 관절을 다치는 게 아닐까 걱정도 됐지만 ‘절을 제대로 하면 오히려 무릎이 튼튼해진다’는 법왕정사 청견 스님의 말을 무조건 믿고 따르기로 했다.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절수행을 지도하고 있는 스님이 경험으로 하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수행하는 자세와 생활습관은 부모가 자식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자 평생의 자산’이라는 스님의 말씀이 그들 부부의 마음을 움직였다.

일주일이 지나고 설을 며칠 앞둔 2월 4일, 둘은 정말 1만배에 들어갔다. 그리고 첫날 지영이는 3600배를, 융기는 오히려 누나보다 많은 3700배를 각각 마치고 돌아온 것이다. 둘은 젖은 솜 마냥 지쳐있었고,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다음날 포기하지 않고 용케 일어나 또다시 법당으로 향했다.

사실 지영이와 융기의 남다른 불심은 민 씨 부부의 영향이 자못 크다. 신행단체서 만나 결혼한 이들 부부는 혼수품으로 예물 대신 한글대장경을 구입했을 정도로 신심이 돈독하다. 현재 성북구 공무원인 남편 민 씨는 25년째 매일 조석으로 『천수경』과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은 물론 108배와 아미타불 염불을 2000~3000번 가량 염한다. 이에 뒤질세라 인천에서 미용학원원장으로 있는 아내 오 씨 또한 왕복 3시간의 출퇴근 시간을 이용해 매일 염불과 『금강경』 독송을 생활화하고 있다.

향 싼 종이에서 향내 나듯 부모가 이러다보니 아이들 또한 남다르다. 타종교 일색인 학교에서도 지영이는 불자임을 당당히 밝힐 뿐 아니라 힘든 일이나 시험이 있을 때면 경전을 읽고 기도를 드리곤 한다. 융기는 한 술 더 떠 첫돌이 되기 전부터 반가부좌를 하더니 지금도 항상 반가부좌로 앉는다. 또 융기가 막 걷기 시작할 무렵 낙산사 홍련암에 갔었는데 사람들이 많아 법당 안으로 들어갈 수 없자 아장아장 걷던 융기가 갑자기 질퍽한 땅바닥에서 부처님을 향해 삼배를 해 주변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두 남매가 군자동 법왕정사에 도착했을 때는 약 7시. 첫날보다 1시간이나 늦었다. 지영이와 융기는 엄마를 따라 서둘러 좌복을 깔고 그 위에 하얀 수건을 펼쳤다. 300배를 하고 10분씩 쉬기로 한 후 또다시 절의 대장정에 올랐다.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은 뒤 머리를 바닥에 대고 손을 들어올리는 동작을 반복하는 절. 둘은 한 배 한 배 정성껏 절을 하고자 했다. 하지만 전날 무리한 탓인지 맘처럼 몸이 쉽게 따라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힘겨움은 처음부터 시작됐다. 특히 운동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지영이에게는 한 배 한 배가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지영이는 이를 꽉 물었다. 50배 100배가 넘어가면서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고, 나중에는 굵은 땀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끝이 없을 것 같던 고통은 절의 횟수가 더할수록 오히려 익숙해져 갔다. 지영이의 동작이 빨라지자 누나에 맞춰 다소 느리게 절을 하던 융기의 절속도도 덩달아 빨라졌다.

“내가 왜 시작했지” 후회도

300배 뒤의 꿀 같은 휴식, 하지만 땀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절을 시작했다. 300배, 300배, 또 300배….

“어쩜, 꼬마들이 저렇게 절을 잘한담?”
“대단한 아이들이네!”

법당에 들른 사람들은 이들 남매를 보고 연신 감탄했다. 고요한 법당에 두 남매와 엄마 오 씨의 반복된 동작이 한없이 이어지고 있다.

지영이의 장래희망은 역사학자다. 글짓기로 곧잘 상을 받았던 지영이는 한때 문학가를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중국의 역사왜곡을 지켜보며 바꿨다. 훌륭한 역사학자가 돼 중국과 일본의 잘못을 세계에 알리고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겠다는 계획이다. 반면 융기는 사업가가 꿈이다. 돈을 많이 벌어서 불쌍한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게 그의 야무진 포부다. 법당의 시계바늘이 지영이와 융기의 땀방울과 함께 더디게 흘러갔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도 막바지로 치달았다. 두 남매의 동작이 눈에 띄게 느려졌지만 전날보다 훨씬 많은 숫자인 4000배를 이미 넘어서고 있었다.


매일 수행하는 부모영향 커

“얘들아, 많이 힘들어도 조금만 더하자. 그럼 내일은 쉽게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거야.”

엄마의 격려가 큰 힘이 됐다.

‘그래, 시작했으니 언젠가는 끝나겠지.’ 지영이와 융기는 안간힘을 썼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한다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할 것 같았다. 온 몸이 돌덩이라도 되가는 것 마냥 무거워왔다. 그렇게 해는 지고 집으로 돌아올 무렵 지영이는 4200배, 융기는 4300배까지 할 수 있었다.

다음날 새벽 6시, 두 남매는 또다시 부처님 앞에 섰다. 1만배까지 남은 횟수는 지영이가 2200배, 융기가 2000배. 몸이 힘든 건 여전했지만 마음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1만배의 고지가 눈앞에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두 남매는 끊임없이 바위를 산위로 밀어 올리는 시지포스처럼 땀방울로 한 배 한 배 그 수를 더해갔다. 그리고 오후 2시, 마침내 지영이와 융기는 마지막 1만 번째 절을 올렸다.

“열심히 공부할 거예요. 1만배도 했는데 못할 게 뭐가 있겠어요.”(지영)
“그냥, 끝낸 거지요, 뭐.”(융기)
“안쓰럽고 대견합니다. 우리 아이지만 자랑스럽네요.”(엄마 오애자 씨)
“우리 부부가 아이들 가질 때부터 발원한 게 있습니다. 불법의 도리 깨우쳐 나라와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말이죠. 정말 그렇게 될 것도 같은데요. 허허”(아빠 민병흥 씨)

만배를 마친 두 남매. 그 때 갑자기 융기가 청견 스님께 부탁이 있다며 들어주실 수 있느냐고 물었다.

“뭔데?” “스님, 저기에 한 번 앉아보고 싶어요.” “그러려무나.”

스님은 기특한지 흔쾌히 승낙했고 융기는 스님이 평소 법문하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돌연 옆에 있는 죽비를 잡아들었다.

“탁~탁~탁~, 탁~탁~탁~”

고요하던 법당은 금세 죽비소리로 가득찼다. 모두들 깜짝 놀랐지만 스님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번져 나왔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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