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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죽어가는 사람의 여섯 번째 반응 : 수용

기자명 법보신문

어떤 고통도 직시하는 지혜 가져야

마지막까지 죽음을 거부하거나 분노를 표하기 때문에 다섯 번째 수용 혹은 순응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임종환자들이 많다. 불가피한 죽음을 피하려는 저항이 강하면 강할수록, 죽음이 임박했음을 부정하는 심경이 강하면 강할수록, 죽음을 품위있게 또 평온하게 맞이하기가 어려워진다. 죽어가는 당사자가 다가오는 죽음에 순응하지 않으면 남아있는 가족 역시 힘들어진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 ‘난 더 이상 안되겠어’ 라고 말하면서 저항을 멈추기도 한다. 임종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수용할 경우 육체적 통증과 정신적 고통도 점점 줄어들게 되고 차분히 자기 삶을 뒤돌아보면서 정리할 여유도 생기게 된다.

임종환자는 ‘죽어야 하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더 이상 부정하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고 우울해 하지도 않는 단계로 들어가기도 한다. 고통이 지나가고 몸부림이 끝나가면서 ‘머나먼 여정을 떠나기 전에 취하는 마지막 휴식의 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임종환자는 이 때 일종의 수용과 평안의 단계에 접어듬에 따라 그의 관심세계는 한층 좁아진다.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하기도 하고 때로는 방문객을 달가와 하지도 않으며 사람이 찾아와도 대화할 기분이 나지 않는 때가 많다.

이 무렵 의사소통 방식은 언어보다도 표정이나 몸짓 등 무언의 대화로 바뀐다. 병실에 들어와 앉으라는 신호도 눈짓이나 손짓으로 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지 손을 꼬옥 잡으면서 잠자코 곁에 있어 달라는 신호를 하기도 한다. 임종환자 앞에서 침착할 줄 아는 사람에게 이와 같은 침묵의 순간이야말로 가장 뜻 깊은 대화가 이루어지는 시간이 된다. 죽음을 앞둔 말기환자에게 결코 혼자가 아니고 최후의 순간까지 곁에 있겠다는 믿음을 전해주는 사랑이 요구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죽어가는 사람의 아홉 가지 반응 가운데 처음 다섯 가지 반응과 여섯 번째 수용은 크게 차이가 난다. 처음 다섯 가지 반응과 마지막 세 가지 반응의 분기점이 바로 당사자가 임박한 죽음을 수용하느냐 여부에 달려있다.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은 죽음을 수용하느냐 여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죽음 앞에서 한없이 절망하거나, 죽음을 두려워만 하거나,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지 화를 내거나, 혹은 마지막 순간까지 슬픔에만 젖어있다면, 자기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삶을 마감하는 셈이므로, 결코 밝은 모습으로 편안하게 임종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죽는 사람의 경우 또한 그는 삶 역시 그렇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죽음은 바로 삶의 거울이므로, 삶과 죽음은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 혹은 죽음을 겪을 경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어떤 사람은 한층 성숙해지고, 어떤 사람은 더 무너지는 것일까. 가장 중요한 차이는 바로 죽음이든 고통이든 그것을 직시해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지혜에 달려있다. “왜 나만 죽어야 하는가” “왜 나만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죽음이나 고통이 바로 삶이 존재하는 방식임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만 죽는 것도 아니고, 자신만 고통당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고, 누구든지 고통을 당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왜 나라고 고통을 받아서는 안되는가” “왜 나라고 죽어서는 안되는가” 라는 반응 속에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어떤 고통을 갑자기 당할 때, 그로부터 도망가고자 하는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번쯤 있음직하다. 그 상황을 인정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고통의 무게는 한층 커졌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알콜 중독자가 치유되기 시작하는 시점은 바로 자기가 알콜 중독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부터 라고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사형수나 마찬가지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죽음의 치유 가능성은 엿보인다. 평소에 죽음 준비를 전혀 하지 않다가, 갑자기 닥친 죽음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죽는다면, 그 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이다. 죽음을 평소 건강할 때 수용해 준비한다면, 살아있을 적부터 치유는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 발짝 더 나아가기만 하면 죽음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한림대 철학과 오진탁 교수
jtoh@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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