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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죽어가는 사람의 여섯 번째 반응 : 수용의 사례

기자명 법보신문

죽음 받아들이면 편안한 임종 맞이해

정순자 씨는 차분하고 지적인 여성이었다. 병명은 장암 말기였는데 이미 암세포가 복강 내에 다 퍼져 있는 상태였고 장루 수술을 하여 인공항문을 차고 있었다. 항암 치료를 해보아도 별 반응이 없었다. 장암의 진전상태에 대해 그녀 자신과 가족이 잘 알고 있었다. 호스피스에 의뢰될 때 예상되는 잔여수명은 2,3개월 정도였다. 54세인 그녀는 어려서부터 건강하여 잔병치레도 없었다고 한다.

지난봄부터 갑자기 소화도 되지 않고 속이 더부룩해지는 것이 아무래도 몸이 좀 이상해지는 것 같아 혼자 병원에 찾아갔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몇 가지 검사를 해보고 며칠이 지나 결과를 보러 갔더니 의사가 남편과 함께 오라고 말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으나 각오는 되어 있으니 자기에게 직접 말해 달라고 독촉하자 의사는 마지못해 알려 주었다. 수술을 해 인공항문을 달았지만 잔여수명은 3개월뿐이었다. 차분한 그녀는 며칠간 숙고를 거듭해 자신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 들였고 남은 시간 동안 자기 삶을 매듭짓고 죽음을 준비해서 미련 없이 떠나고자 했다.

그녀에게는 자녀가 세 명 있었다. 결혼을 앞둔 딸이 첫째, 둘째가 대학생, 세째가 고3짜리 막내아들이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있어서 오랫동안 사업을 함께 해온 동업자, 친구, 연인, 그리고 신앙생활을 함께 하는 교우이기도 했다. 로타리 클럽을 비롯해 부부가 함께 회원으로 가입한 모임만 해도 10개가 넘는다. 서로 자신의 삶을 깊숙이 나누면서 살아왔으므로 그녀의 와병은 남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딸은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언제나 강하시고 집안의 모든 일을 흔들림 없이 주관해 오셨기에 마치 거대한 나무가 뿌리채 뽑히는 느낌이예요. 엄마가 쓰러진다는 건 지금까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어요. 믿어지지가 않아요.” 칠십이 넘은 시어머니 역시 며느리의 병을 걱정해 초조해 하면서 ‘나 원 참’ 만 연발하셨다.

이런 상황에서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현실을 가장 잘 직시하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정순자씨 자신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죽음을 준비하고 삶을 정리하기 위해 몇가지 문제를 남편과 의논하고자 했다. 그러나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면 남편은 도무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남편하고는 30년간 함께 잘 살았어요. 서로 대화도 통하지요. 이번만은 내가 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도 남편은 자꾸 살 수 있다고만 하니 짜증이 나요. 그 심정이 이해가 되기는 하지만 죽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난데, 이 상황에서 내가 남편을 이해해야 됩니까, 남편이 나를 이해해야 됩니까? 무언가 앞뒤가 바뀌었다는 느낌이예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당사자가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정순자씨의 경우 역으로 당사자는 자신의 죽음을 수용하고 있지만 가족은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 가족이 말기환자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오히려 당사자에게 부담까지 주는 상황인 것이다. 호스피스 봉사자가 그녀의 남편에게 연락해 사무실에서 만났더니 “집사람이 저렇게 될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부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던데 아냐고 물었더니, 그는 한숨을 푹 쉬더니 아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지 잘 알고 있지만, 막상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 그것이 현실화될까봐 두려워 이야기를 애써 회피했다는 것이다.

며칠 뒤 정순자씨 집을 호스피스 봉사자가 방문했더니 그녀가 말했다. “남편과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했어요. 이제는 속이 시원합니다. 이젠 죽어도 괜찮아요.” 그녀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고 이제 가족들도 호응을 하니까 무슨 이야기든지 부담 없이 할 수 있었다. 죽음을 가족보다도 먼저 수용한 그녀는 남편마저 설득한 다음 서로 마음 속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편안한 마음으로 여행을 떠났다.

한림대 철학과 오진탁 교수
jtoh@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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