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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선대법회 고 우 스님 법문

기자명 법보신문

해탈문 여는 열쇠는 연기

본지가 후원하는 ‘범어사 설선 대법회’ 세 번째 법석이 3월 19일 범어사 보제루에서 열렸다. 초봄의 기운을 타고 범어사를 찾아온 4천여 명의 사부대중을 위해 범어사는 설법전에 대형 스크린을 추가로 설치하며 대중을 위한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날 ‘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 참선수행’이라는 주제로 법문을 설한 봉화 각화사 선덕 고우 스님은 “본래성불이라는 정견을 바로 세우고 연기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조금씩 스스로를 맑히려는 노력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편집자주

선(禪)을 놓고 저는 말을 하려하고 여러분들은 들으려 합니다. 말하는 사람이 있고 듣는 사람이 있다는 전제하에 선을 말한다면 이미 그르친 것입니다. 그것은 ‘말’(馬)을 보고 ‘사슴’(鹿)이라고 하는 것처럼 입을 떼는 순간 저는 여러분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선에는 주관과 객관이 따로 없고, 우리는 모두 본래 완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자리는 말로는 해석할 수도, 전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부처라 해도, 중생이라 해도, 번뇌라 해도, 지혜라 해도, 구속되어 있다 해도, 해탈해 있다 해도 모두 다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묵묵히 있다고만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조금이라도 선에 접근할 수 있도록 언어를 빌려 방편으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분이라 하는데 여기서 궁금증이 하나 생깁니다. 깨달은 분과 우리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부처님 가르침을 기준으로 볼 때 우리는 그 가르침의 효능을 제대로 발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바로 그 차이를 알면 불교의 궁극적인 핵심과 좀 점에 제가 말씀드렸던 ‘본래 완성’ ‘본래 성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과 우리가 다른 것 중 하나가 우리는 형상만 쳐다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형상에만 머물고 있는 우리는 좋다 나쁘다, 이것은 우수하다 열등하다, 귀하다 천하다며 분별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분별은 귀와 눈, 입 등을 통해서 시작되고 그로인해 자신을 학대하고 있습니다. 자기만 학대하면 그래도 괜찮은데 주변에 있는 가까운 사람도 함께 학대를 하니 더 큰 문제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요? 앞집은 그랜저인데 우리는 왜 티코냐? 옆집 애는 서울대 다니는데 너는 왜 이 모양이냐? 이것은 자기와 주변 사람까지 학대하는 겁니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도 그런 식으로 우열을 따지고 취사선택하면서 국가는 국가대로, 사회는 사회대로, 세계는 세계대로 주변 사람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그러니 지구상에 전쟁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은 ‘남의 허물을 보지 말고 자신의 허물을 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허물을 보면 밖에서 학대하는 동기유발을 일으키더라도 절대로 자신을 학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남이 나를 화나게 만들더라도 내가 화내는 것은 결국 내 몫이니, 남이 나를 화나게 하는 그 허물을 보지 말고 ‘화를 내는 자기 허물을 보라’는 것입니다.

법회를 시작하면서 반야심경을 하셨는데 ‘오온개공’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공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해 보라고 하니까 이런 말을 합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공을 보면 허망하기만 한데 무슨 재미로 이 세상을 살아 갑니까?” ‘허망’이나 ‘공허’는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과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그 ‘공’을 이해하려면 ‘연기’를 알아야만 합니다.

여기 이 보제루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재료가 섞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재료 중에서 무엇을 갖고 ‘보제루’라 하겠습니까? 나무를 보고 ‘보제루’라 할 수 있습니까? 이 기둥을 집이라고 하겠습니까? 기왓장을 집이라고 하겠습니까? 그저 다 조화롭게 모여 있으니 ‘보제루’라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보제루’도 실제로 없는 것이고 이름일 뿐입니다. 세월이 흘러 이 보제루가 허물어지면 단지 보제루를 구성했던 재료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보제루’도 실체가 없다는 소리입니다.

여러분 잘 보십시오. 손가락 A와 B가 의지를 해서 만든 삼각형을 C라고 이름해 봅니다. 이 C는 A와 B가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A와 B가 없어지면 C(삼각형)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A와 B가 없어진 겁니다. 그래서 C는 그냥 이름 뿐 입니다. 그래서 이 C를 우리는 공이라고 합니다. 실체가 없다라 하기도 하고 무아라고 합니다. 이 몸뚱이도 60조의 세포가 모여 있는 덩어리라 하는데 이 60조 덩어리 중 어느 세포를 갖고 ‘나’라고 얘기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또 “실체가 없으니 너무 허망한 것이 아닙니까?” 라고 반문합니다. ‘나’가 없다 하지만 ‘나’가 있지요? 여러분 지금 이렇게 앉아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라 하는 겁니다. 태어나는 것도, 성장하는 것도, 병들어 죽는 것도 공입니다. 손가락 A와 B가 없어져서, 나무기둥과 기와가 없어져서 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가 공이라는 것입니다.

이 도리를 이해만 해도 자신을 괴롭히는 학대는 하지 않습니다. 이 도리를 체득하면 분별을 하지 않는 삶을 사니 대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수행을 해서 그렇게 된다고 생각이 드실지 모르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제가 방금 설명을 드린 그 사실에 대해 우리가 체득하지 못해서 그렇지 체득해 보면 본래 우리는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행을 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래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이 사실은 굉장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래 부처님과 같이 살고 행하면 운문 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매일매일 좋은 날’이 되는 것입니다. 유정무정이 다 그렇게 본래 이토록 위대하게 존재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를 학대하고 있습니다. 이 도리를 모르고 그러는 것이니 얼마나 억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능엄경』에 손가락과 달 얘기가 나옵니다. 여러분들도 많이 들어보셨듯이 “달을 보아야지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진리가 달이고 손가락은 진리를 보라고 가르치는 방편입니다. 그래서 수행방편에다가 생활을 맞추는 것은 어떻게 보면 손가락에 달을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역순이지만 남방불교에서는 이렇게 해서 사실 달을 보기도 합니다.

우리 선불교는 아예 달을 말합니다. 손가락을 통한 일상생활이 아니라 달을 통한 일상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만 공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연기와 공을 보고 일상생활에서도 ‘공 도리’에 기반한 삶을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오늘 제 얘기를 듣고 내 존재원리가 그렇게 위대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이해를 한다면 오늘부터 화내는 것을 부끄럽게 느껴야 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작은 것부터 시작을 하자는 겁니다. 이른바 ‘달 불교’ 한다는 한국불교가 ‘손가락 불교’를 하는 다른 나라보다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출가해 보니 이런 말이 있더군요. “도인은 멀리서 봐야 도인이지 가까이서 보면 도인이 아니다.” 이것은 정말 아닙니다. 도인은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이 도인입니다. 여러분들도 도인입니다. 깨달음은 정진하는 도중 인연이 닿으면 찾아옵니다. 수행을 하며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삶에 무게를 두십시오. 깨달음으로 가는 여정에 올라서되 환상을 갖지는 마십시오.

연기와 공을 이해하고 이것을 생활하며 체험해 가는 것이 공부요, 수행입니다. 이 길을 가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좋은 날’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부산지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사진= 주영미 기자

고우 스님은

1937년 성주에서 태어난 고우 스님은 20살 때 청암사 수도암에서 법희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관응 스님으로부터 『기신론』을, 고봉 스님으로부터 『금강경』을, 혼해 스님으로부터 『원각경』을 배운 후 축서사, 김용사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했다.
1968년부터 1969년까지 문경 봉암사에 선원을 재건해 조계종립 특별선원의 기틀을 다졌다. 봉화 각화사 태백선원장을 지낸 스님은 현재 각화사 서암에 주석하고 있다.

[질의응답]

<사진설명>‘깨달음’은 시절인연이 닿으면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고우 스님의 법문을 통해 ‘반야’의 마음자리 하나를 보았을 것이다.

“성성적적하면 매일 매일 좋은 날”
- 화랑 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Q: 간화선과 묵조선에서 말하는 본래성불은 어떻게 다릅니까?

A: 모든 삼라만상은 항상 고귀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깨달아야 한다고 일러 준 것인데 이해를 못하니까 할 수 없이 자기가 의심을 하는 것이다. 의심이 생겨서 성성한 것이 성취가 되면 적적이 따라오게 된다. 그래서 간화는 성성적적이다.

묵조는 불안한 마음을 찾아 안으로 비춰보니까(회광반조) 괴로운 마음이 없다는 것을 체득해 가는 것이다. 혜가 스님처럼 뿌리까지 없다는 것을 보고서야 적적이 성취가 되고 성성이 성립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중국 선사들이 적적만 하고 있던 때 대혜 스님이 이를 ‘묵조선’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묵조선이 비록 화두를 안 들고 하는 공부라도 성성적적이 되면 그것도 불교다.

‘본래성불’을 정말로 믿고 진심으로 공부하면 된다. 상근기, 하근기를 논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묵조선, 간화선의 우열은 없다.

Q: 선 수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삼매의 경지를 우리가 어떻게 일상생활에서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A: 일과 하나가 되는 것을 삼매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삼매는 성성은 거의 없고 적적만 있다. 그러면 생활하고는 완전히 분리되어 버린다. 불교 삼매는 적적성성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생활하면서도 삼매를 성취해 깨달음으로 갈 수 있다. 화두를 들고 의심하고 있는 것이 성성이다. 거기에는 다른 생각이 끼어들지 않고 오직 의심만 하고 있기 때문에 적적이 성취되는 것이다. 행주좌와에 “그게 무슨 소리지?”라며 의심을 이어갈 때 일상생활 모두가 좌선이다. 적이 손바닥이면 성은 손등이다. 두 개가 아니고 하나가 될 때 주관과 객관을 뛰어넘어 전부 평등하고 자유자재할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이 굉장히 평화롭고 매일 좋은 날이 될 수 있다.

Q: 돈오와 점수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A: 중국에서 신수 스님은 돈오점수이고 육조 스님은 돈오돈수이다. 한국의 선종은 육조 스님의 뿌리가 들어와 있다. 송광사에서 돈오점수하시는 분도 육조 스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돈오돈수, 돈오점수는 보조 스님 이후에 나누어졌으나 결국 뿌리는 같은 것이다. 자신에게 맞는 공부를 하는 것이 좋다.

“수행법 취사 이전에 정견을 세워라”
- 질문자 조 명 제 연구원 (일본 교토대 대학원 문학연구과)

Q: 대혜 스님의 『서장』은 실제 그 대상이 주로 사대부를 중심으로 하는 지식층이었습니다. ‘간화선 대중화’라는 주제에 맞게 재가불자들을 위한 선의 대중화와 수행의 단계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주셨으면 합니다.

A: 한방울의 맑은 물이 모여 큰 연못을 맑힐 수 있다. ‘정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참선, 염불, 봉사 등을 수행하며 자신을 정화해 가면 누구든지 성취할 수 있다.

부처님 법은 연기이므로 연기에 대한 이해를 집중적으로 하며 삶에서 실천하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도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힘의 한계를 느끼고 자포자기하기 보다는 스스로 조금씩 맑혀가는 노력이 중요하다. 행복감을 느끼면 열심히 하게 되고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면 그 일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나의 경험이다. 나도 이것을 발견 못할 때는 하루에도 열두 번 속가에 가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런데 이것(연기)을 이해하고 나니까 행복하고 자부심도 느낀다. 부처님 법을 실천하고, 생활화하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꼭 명심하고 여러분들도 함께 노력해주기를 당부한다.

Q: 지식정보화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구조나 조건이 충분하더라도 어느 사회, 국가에서든지 개별 존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면 본래의 마음자리를 사회적 관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해야 되겠습니까?

A: 생활도 편리해지고, 물질도 풍부해졌지만 더 불안하고 각박한 이유는 모든 행복의 조건을 밖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책임 있는 분야는 정치이다. 이제 투표하지 말자는 운동을 하고 싶을 정도로 정치 분야가 끝없이 분열하고 있다.

인류의 갈등, 대립, 투쟁을 종식시켜 정말 잘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불교밖에 없다.

개인부터 자신이 부처라는 자부심을 잃지 말고 생활해가면 그것이 가족, 이웃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 그것이 곧 사회화가 아닌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가정을 통해서, 생활을 통해서, 나부터 착실히 해나가야 된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국민들을 분열시키고 대립시키고 갈등을 부추기는 일은 하루빨리 종식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정말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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