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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죽어가는 사람의 여섯 번째 반응 : 순응의 사례

기자명 법보신문

웨딩드레스 입은 임종환자

우리 사회에 죽음에 순응하면서 편안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다른 여러 가지 이유도 있겠지만, 평소에 죽음을 사려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죽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자살 사망률이 급증하는 것도, 죽음의 질이 심각한 것도 바로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하나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하는 문제만 골몰했지, 어떻게 죽을 것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회 풍토는 하루 빨리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유방암 말기환자 옥설희씨(40세)는 어느 대학의 교수였다. 먹는 항암제 치료를 사용해 더 치료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의료진에게 있었는데 본인이 원하는 호스피스에 가입한 경우였다. 호스피스 관계자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단아한 기품이 느껴졌다. 유방암을 발견해 수술을 한 후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항암치료를 성실하게 받았는데 그 후 재발해 약물치료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면서 약물치료는 원치 않고 통증과 증상완화를 위한 치료를 받겠다고 했다. 담당의사와 암 센터 수간호사도 항암치료를 받으면 어느 정도 생명연장은 가능하다고 보았고 남편도 한 번 더 약물치료를 해보고자 했지만 그녀가 거부했다.

“한때 고민도 많이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억지로 생명을 연장하고 싶지 않아요. 다행히 집에 일하는 아줌마가 7, 8년 동안 성심껏 도와주는 사람이라 믿고 맡길만하고 시어머니도 계세요. 남편이 지금 42살인데 어중간한 나이에 일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지금 일 치르는 게 장래를 위해서도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들이 어리니까 엄마가 옆에서 돌보아야 하잖아요? 돌보지를 못하고 오히려 고통스러워하는 엄마의 모습을 오래 보게 되니까 아이들이 태도가 달라졌어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일까 모색하던 끝에 입원하기로 했어요.”

옥설희씨의 아이들은 9살, 5살짜리 사내아이들이다. 큰아들은 엄마가 주로 키워서 유대관계가 있으나, 작은 아들은 두 돌도 되기 전부터 엄마가 병이 나서 할머니가 데리고 자면서 키웠더니 엄마와는 조금 서먹서먹했다고 한다. 입원하기 이틀 전에도 숨이 차고 몹시 아파서 괴로워하고 있었더니, 작은 아이가 엄마 방에 들어오려다가 무서운 듯 할머니 품에 안기면서 울음을 터뜨리더라는 것이다. 집에 있으면 이런 모습을 아이들이 보게 되어 엄마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만 남기게 될 것 같아 병원에서 마지막을 보내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녀는 몸이 약해 담당 의사를 정해놓고 치료를 받았는데 의사가 이 아이는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다행이 병이 낫고 스무 살이 넘도록 성장하자 ‘그러나 결혼은 하지 말라’는 조언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가 결혼을 결심하고 그 의사를 찾아갔더니 만일 임신하게 되면 산모와 아이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으니 ‘그러면 절대로 아이는 낳지 마라’고 간곡하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결혼해서 지난 10년 간 건강하게 살아왔고 아들도 둘이나 낳아서 잘 자랐다. 그 의사도 옥설희씨가 결혼해 아이를 낳는 것을 보고 이것은 기적이라고 말했다면서 지난 10년 간 후회 없이 살았다고 말했다.

임박한 죽음에 순응하고 있는 그녀는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마지막 편지도 쓰고 묘지와 장례식에 쓸 사진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아내의 죽음이 기정사실이지만 마음이 너무 아파요. 이젠 어찌될지 몰라 출근도 못해요. 집사람이 저보고 운다고 가라고 하면 차에 내려와 있다가 다시 올라가곤 해요. 어제 밤에도 히터 틀어놓고 차 안에서 잤어요.”

임종하기 이틀 전에 옥설희씨는 친지들을 다 오라고 했다. 침대 주위에 둘러선 친지들에게 “나는 이제 죽을 거예요.” 라고 말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임종하는 날에는 웨딩드레스를 가져오라고 해서 갈아입었다. 죽은 이후 관에 들어가면서도, 사랑하는 남편에게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아름다운 마지막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원했다. 그녀는 결혼식장에 서 있는 새 신부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남편과 간병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미소를 띈 채 그렇게 여행을 떠났다.

한림대 철학과 오진탁 교수
jtoh@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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