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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만달레이

기자명 법보신문

황량한 바람만 가득찬 城 풍경
제국주의 침략의 상처만 남아

<사진설명>만달레이언덕에서 바라본 구도도 페이야 전경.

오후 1시 30분, 이라와디강을 건너 다시 만달레이로 들어섰다. 인구 50만의 만달레이는 미얀마 제2의 수도로 불릴 만큼 큰 도시다. 그러나 크기보다는 도심 곳곳에 남아있는 전통의 흔적들로 더욱 주목을 받는 곳이다. 수도 양곤이 정치·경제의 중심지라면 만달레이는 문화의 중심지라고나 할까. 밤이면 폭주족들의 활개 치는 자유로운 분위기도 이곳만이 가진 문화적 여유의 표출에 다름 아니다.

만달레이가 긴 침묵을 깨고 역사의 무대로 뛰쳐나온 것은 1859년 무렵이다.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미얀마 마지막 왕조 꽁바웅의 민돈왕이 수도였던 아마라뿌라를 버리고 이곳으로 천도하면서 만달레이가 미얀마 역사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밍군탑 건립으로 촉발된 영국의 침략은 그 뒤로도 몇 차례에 걸쳐 계속됐고 고통을 견디다 못한 왕이 수도를 만달레이로 옮기게 된 것이다. 당시 왕은 위대한 제국의 위용을 갖추기 위해 인구의 대규모 이주와 도시 건설, 그리고 미얀마 최대의 성이라는 만달레이성을 쌓아 영국의 재침을 대비했다. 그러나 만달레이는 천도 후 불과 30년 만에 영국에게 점령당했고, 난공불락의 요새 같던 성도 전쟁 시작 15일 만에 함락되어 버렸다. 부처님과 아난이 직접 방문해 “장차 위대한 왕조의 수도가 될 것”이라고 했다던 설화 속 이야기도 최첨단 무기를 앞세운 침략군의 야욕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셈이다.

비운의 역사가 펼쳐졌던 무대 만달레이성은 도심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불운했던 옛 이야기를 잊은 듯 활기차 보였고, 성 주변을 거니는 아베크족으로 보이는 쌍쌍의 젊은이들로 인해 분위기는 더욱 자유로워 보였다. 순례일행을 태운 버스가 작은 도로들을 헤매다가 제법 큰 도로로 쑥 빠져나오자 저 멀리에 용트림을 하듯 도시를 가른 채 당당하게 서 있는 거대한 성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온통 붉은 빛으로 시뻘겋게 치장된 성은 너무 거대해 신화 속 거인처럼 보는 사람을 위압한다.

성벽 앞에는 강보다 넓은 해자(적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성 주변을 빙 둘러 파 놓은 호수)가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해자의 맑은 물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유원지 어디에 온 것 같은 착각이 인다. 군인들이 통제하고 있는 다리를 어렵게 건너 성 앞에 도착하니, 성벽은 그야말로 깎아지른 절벽이다.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성벽의 높이는 무려 8미터. 쳐다보면 고개가 꺾일 정도다. 또한 성벽의 두께가 3m나 된다니 난공불락의 요새가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밖에서의 감탄도 잠시, 5달러를 내고 들어간 성은 실망 그 자체다. 호화찬란한 왕궁과 건물들은 간데없고, 황량한 바람만이 성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성 안 빈터에는 살림집이 가득 들어서 있고 곳곳에는 밭을 일궈 나물을 키우는 곳도 적지 않았다. 비극의 역사는 사람만을 데려간 것이 아니라, 그들 남긴 흔적에도 깊은 상흔을 남겨놓은 것이다.

만달레이성의 파괴는 제국주의의 부도덕한 압제가 남긴 증거들이다. 성은 영국과 일본의 식민지를 차례로 거치는 동안 점령군들의 캠프로 사용되면서 조금씩 파괴되기 시작했고, 그나마 남아있던 건물들은 패망 직전 일본군이 분풀이로 불을 지르는 바람에 그 원형마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최근에 정부에서 나서 전망대와 왕의 집무실 등 일부 건물을 복원하기는 했지만 성 안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등 군부의 비상식적인 조치들이 이어지면서 훼손은 지금 이 순간도 계속되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성을 나와 본래 목적인 성지 순례에 나섰다. 먼저 찾은 곳은 구도도 페이야. 돌에 경전을 새긴 석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우리의 해인사 같은 곳이라고나 할까. 구도도 페이야는 커다란 시장을 끼고 들어서 있었다. 북적이는 시장에 들어서자 만달레이성의 비극적인 운명에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씩 생기를 되찾는다. 이곳의 시장 또한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기는 마찬가지다. 추억 속의 5일장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듯 각종 잡화에서 먹거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품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다.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의 흥정하는 모습이 시골장을 보는 듯 친근하기만 하다. 특히 시장 입구에 걸려있는 전통극 공연 안내판은 어릴 적 보았던 유량극단의 포스터처럼 고졸하기 그지없어 오히려 진한 인간미를 내뿜는다.

왁자지껄한 시장을 지나 한참을 걸어가자 하얀 탑들의 군락이 햇볕을 받으며 일행을 반갑게 맞이한다. 바로 구도도 페이야다. 민돈왕에 의해 건립된 구도도는 천도와 함께 건립된 만달레이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사진설명>석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729개의 탑.

2500여 년 전 부처님이 입적하자, 인도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보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4차례에 걸쳐 경전 결집이 이뤄졌다. 그러나 인도에서의 불교 쇠퇴와 함께 결집도 중단이 됐는데, 만달레이로 수도를 옮긴 민돈왕이 이를 다시 계승해 제 5차 경전 결집을 단행한 것이다. 결집된 내용들은 729개의 하얀 대리석에 새겨 보관했는데 그 곳이 바로 구도도 페이야다. 당시 석장경은 2400여명의 스님들이 무려 6개월간을 쉬지 않고 작업해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석장경에는 율장 111판, 논장 208판, 경장 410판이 새겨져 있다. 탁본을 할 경우 400페이지 책 38권을 제작할 수 있고, 한 사람이 쉬지 않고 경전을 읽으면 500일이 걸린다고 하니, 과히 고려의 팔만대장경 조성에 버금가는 대작불사라고 할 수 있다. 민돈 왕이 석장경을 조성한 이유는 패엽경에 남겨진 경전의 내용들이 1000년 이상을 내려오면서 많은 오류들을 낳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패엽경이 나뭇잎이라는 재료적인 한계 때문에 산실(散失)되거나 혹은 옮겨 적는 과정에서 오기(誤記)가 발생하면서 문제가 생기자 이를 바로잡고자 했던 것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를 빌리자면 석장경은 당초엔 금은장경(金銀藏經)으로 제작하려고 했다고 한다. 원래는 금판이나 은판에 경전을 새겨 보관하려 계획을 세웠으나 도난을 염려하며 말리는 신하들의 간곡한 청을 물리치지 못해 결국 대리석에 경전을 새기게 된 것이다.

높이 1.5m, 폭 1.1m 크기의 거대한 석판들은 벽돌로 쌓은 하얀 탑 속에 하나씩 보관돼 있다. 풍화작용으로 석장경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왕의 배려 때문이다. 따라서 이곳 구도도 페이야는 이른 아침이 가장 아름답다. 일정한 비율로 도열한 729개의 하얀 탑들이 살갑게 햇살을 받으며 사람을 맞이하는 모습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맑기만 하다.

<사진설명>만달레이 승가대학. 학인 스님들이 위파사나 수행을 하고 있다.

구도도 페이야의 안쪽에는 만달레이 정부승가대학이 들어서 있다. 수도 양곤의 승가대학과 함께 미얀마를 대표하는 승가대학이다. 건물들은 각 지역의 정부들이 하나씩 보시해서 건립했다고 하는데 각 지역의 문화적 특색들을 담고 있어 문화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만달레이 승가대학에서 정진 중인 학인 스님은 모두 400여명. 한때 미얀마 민주화에 앞장섰던 승가대학으로 유명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상마저 사라져 버려 안타까울 뿐이다.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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