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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날의 단상

기자명 법보신문
내 주위에 도반들이 있는 것에 감사
나의 공부 도와주는 이에게 또 감사


봄이다. 길에 흐드러지게 핀 바닐라색의 목련꽃이 봄의 서막을 알리고, 겨우내 무표정해 보이던 무채색의 나뭇가지에서는 기적 같은 연녹색의 희망이 보인다. 오늘은 시간을 내어 꽃과 봄나무들로 가득한 교정을 홀로 걸어보았다. 항상 시간에 맞추어 이곳 저곳을 쫓아다니던 습관에서 벗어나 오늘은 왠지 나 스스로에게 ‘여유’라는 선물을 주고 싶었다. 화창한 날씨에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걷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김춘수 님의 ‘꽃’이라는 시가 입 속에 맴돌았다. 학창시절 국어선생님에 의해 반강제로 외워야 했던 그 시가 지금은 가슴에 남아 언제 어느 때고 꽃의 향을 음미할 수 있게 됐으니 그때 국어 선생님께 고마울 따름이다.

누군가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 달라는 부분이 생각날 즈음 정말로 뒤에서 나의 이름을 부르는 이가 있었다. 평소에 알고 지낸 중국 청화대 대학원생 친구인데 1주일에 한번씩 만나 나는 그 친구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고 그 친구는 나에게 중국어를 가르쳐준다. 같이 점심을 먹지 않겠냐고 한다. 예전에 내가 점심을 한번 샀던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요번에 그 답을 하고 싶은가 보다. 중국 대학원생들의 뻔한 주머니 사정을 알고있는 터라 학교 밖 식당으로 나가자는 것을 굳이 교내 학생식당으로 가서 먹자고 청했다.

대부분의 학생식당이 그렇듯 식당 안에는 다양한 음식이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그런데 청화대학교 학생식당의 특징은 점심식사 판매 시간이 12시에서 1시 사이로 매우 짧은데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 시간에 학생 식당을 이용하기 때문에 점심 한 그릇을 사먹는 일이 거의 전투장을 방불케 한다. 오늘은 가지와 고구마를 같이 조림한 중국식 요리와 속이 없는 하얀빵 만토우 하나, 그리고 유산균 음료 하나가 나의 점심이다.

오늘 그 친구와 나의 점심 토픽은 중국 6세대 영화 감독들이 만든 영화 이야기였다. 내가 왜 6세대 감독들의 영화가 그토록 우울하고 사회 비판적인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외국인들에게 무조건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는 대부분의 중국인들과 달리 중국이 지금 가지고 있는 문제나 한계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곤 하는 그 친구는 지금 많은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경제적·정치적 혼란에서 오는 과도기적 상태의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오후 수업에 들어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중 티베트 불교를 전공하는 도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본인이 한번 뵌 적이 있는 티베트의 어느 큰스님께서 북경에 오신다며 다음 주말에 큰스님과 함께 점심공양을 하자 한다.

그 친구와 전화 통화를 끝내고 나니 약간의 황사가 섞인 굵은 바람이 내 옷깃을 스친다. 그리고 문득 지금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에 지극히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위에 좋은 도반들이 있는 것에 감사하고 나의 공부를 직간접적으로 도와 주시는 중국 교수님들과 은사 스님께 감사하고, 또 이렇게 좋은 봄 날씨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다. 김춘수 님의 시처럼 무언가가 되고 싶어하는 우리들에게 서로 서로 관심을 쏟으며 아낌없이 이름을 불러주는 이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 그리고 나 또한 그들에게 그러한 존재가 되고자 한다는 것이 중생으로써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지 않는가.

오후 수업에는 송나라때 시인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소동파가 명월의 시를 읊조렸듯 나 또한 그의 시를 봄기운이 왕성한 4월의 어느 날에 낭송하게 되니 이 또한 어찌 감격스럽지 아니한가?

혜민 스님
vocalizethis@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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