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⑭ 만달레이 언덕의 코브라 사원

기자명 법보신문

코브라 선행으로 세워진 미얀마인의 귀의처

<사진설명>만달레이 인근 팔리어 대학의 동자승들. 맑고 천진한 눈빛이 인상적이다.

만달레이 언덕은 넓은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230미터의 야트막한 야산에 불과하지만 주변에 높은 산이 없는 관계로 도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역을 톡톡히 하고 있다. 만달레이 언덕은 2500여 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방문해 위대한 나라의 수도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설화로 간직하고 있다. 이런 연유로 야트막한 야산에 불과한 이곳이 불심 깊은 미얀마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언덕의 의미를 넘어서 깊은 신앙의 귀의처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만달레이 언덕을 오르는 미얀마 사람들의 모습도 예사롭지는 않다. 물론 가벼운 운동을 위해 오르는 사람들도 있다고는 하지만 언덕을 오르는 이들의 경건한 얼굴 표정을 보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된다. 만달레이 언덕은 말 그대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이요, 경전인 셈이다. 언덕은 입구에서 정상까지 1729개라는 엄청나게 많은 수의 계단으로 이뤄져 있다. 마치 똬리를 튼 용처럼 구불구불 언덕을 따라 이어진 계단은 머리에 긴 회랑을 이고 있는데, 미로처럼 이어지는 회랑의 끝에는 일명 코브라 사원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쉐야토우 페이야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만달레이 언덕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소략하다. 이곳 역시 민돈왕에 의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만달레이에 새로운 왕도를 건설하고자 했던 왕은 2500여 년 전 부처님 만달레이 언덕 방문을 기리고자 쉐야토우 페이야를 건립하고, 언덕 전체를 불교의 성소로 재정비했다는 간단한 기록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 사이에서는 역사적인 기록보다 훨씬 풍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쉐야토우 페이야와에 얽힌 남다른 사연 즉 우칸디 스님과 코브라에 얽힌 설화가 그것이다.

일명 코브라 사원이라 불리는 쉐야토우 페이야는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 우칸디 사야도라 불리는 위대한 스님에 건립됐다. 스님은 어느 날 홀연히 만달레이 언덕에 나타났다고 한다. 이 스님에 관한한 만달레이 출신이 아니라는 것 외에 고향이나 출신 등 어떤 것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보수적인 교단이 장악을 하고 있던 만달레이 불교계에서는 우칸디 스님에게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적대감을 감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만달레이 언덕 꼭대기에 절을 세우겠다는 우칸디 스님의 계획은 철저히 배척받았다. 성스러운 언덕에 이방인이 절을 세우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며 많은 스님들이 강하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교단의 뜻은 곧 불자들에게까지 퍼졌고, 불자들은 교단에 방침에 따라 우칸디 스님에게 보시를 전혀 하려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겪어야할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컸다.

그러던 어느 날 우칸디 스님은 만달레이 스님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게 된다. 만달레이 언덕에서 모든 스님들에게 공양을 베풀겠다는 것이었다. 그 대신 절을 세울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스님의 청을 만달레이 스님들이 흔쾌히 승낙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우칸디가 공양을 베풀만한 여력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속한 날짜가 되자 스님들이 하나, 둘 만달레이 언덕으로 몰려들었다. 생각했던 것처럼 언덕에는 아무런 음식도 준비돼 있지 않았다. 스님들은 우칸디 스님을 비웃으며 거칠게 만달레이 언덕에서 떠날 것을 종용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신이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칸디 스님이 가사를 펼치자마자 산해진미가 쏟아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우칸디 스님의 신통력에 반쯤은 넋이 나갔던 만달레이 스님들은 곧이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무례를 사과함과 동시에 절을 짓는 것을 허락하게 됐다. 쉐야토우 페이야 불사는 이렇게 우여곡절을 거쳐서 시작됐다. 그러나 불사는 처음부터 난관이 부딪쳤다. 언덕의 정상에 절을 짓기 때문에 기술적인 어려움이 컸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고통은 엄청난 정재를 조달할 방법이 신통치 않았다는 점이다. 우칸디 스님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을 했지만 불사 완공은 그래서 요원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만달레이 시내에 살던 울릉과 도롱이라는 이름의 부부가 스님을 찾아와 ‘이상한’ 부탁을 하게 된다. 집에 갑자기 코브라가 나타났는데, 아무리 쫓아도 가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스님의 신통력으로 코브라를 집에서 내 보내 달라는 요청이었다. 스님은 결국 간청에 못 울릉과 도롱의 집을 찾게 됐다. 그런데 스님을 대면하자마자 코브라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머리를 흔들며 스님을 반기는 것이 아닌가.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스님은 곧바로 숙명통으로 살펴보았고 스님과 코브라는 전생에 남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만달레이 언덕과 마주보고 있는 용킨산에 살던 코브라가 스님의 어려움을 알고 도와주려 나타난 것이다. 코브라와 함께 언덕으로 돌아온 이후 불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사람 말을 알아듣는 신기한 코브라를 보기 위해 언덕은 인산인해를 이뤘고, 산더미처럼 쌓인 정재로 절은 어렵지 않게 완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절이 완성됨과 동시에 스님과 코브라는 이별을 해야만 했다. 불사가 끝나자마자 코브라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며 껍질을 남겨놓은 채 용킨산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이후로 코브라의 선행을 잊지 못한 사람들은 이 절을 쉐야토우 페이야라는 본명보다 코브라 사원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했으며, 사원 입구에 코브라의 모습을 새겨 그의 공덕을 기리고 있다.

<사진설명>쉐야토우 페이야 입구의 코브라 상.

설화는 역사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역사가 왕과 귀족 등 가진 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설화는 민중들의 숨결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설화에는 늘 잔잔한 여운이 있고 감동이 있으며 따뜻한 숨결이 있다. 이 설화 역시 당시 불사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보수적인 교단의 반발과 방해, 그리고 이에 굴하지 않고 사원 건립에 매진했던 우칸디 스님 등. 사실 어쩌면 코브라는 보수적인 교단의 반대로 난관에 봉착한 우칸디 스님을 도왔을 이름 없는 백성들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를 일이다.

일행이 만달레이 언덕에 도착한 것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였다. 시간은 이미 밤의 가장 자리로 들어섰지만 언덕은 긴 회랑을 따라 한발 한발 정상을 향해 오르는 사람들로 여전히 붐비고 있었다. 언덕으로 오르는 회랑에는 각종 수공예 상점과 작은 불상들이 늘어서 있었고 독특한 형태의 탑들도 즐비해 볼거리도 많다. 더구나 남서 계단의 중간쯤에 부처님의 사리 3과가 안장된 페샤와 유품이 모셔져 있다고 하는데, 불행히도 확인을 할 수가 없다.

일행은 성지 순례임에도 촉박한 시간에 쫓겨 부득이하게 버스를 타고 정상에 올랐다. 쉐야토우 페이야의 폐문 시간이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선한 산바람에 등 떠밀려 10여분 동안 언덕을 오르자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사원 입구를 지키고 있는 두 쌍의 코브라다. 고개를 치켜들고 혀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 매우 사실적이다. 신화 속 코브라가 세상에 현신해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는 것이다. 한갓 미물에 불과하지만 같은 불제자라는 마음에 가볍게 합장을 했다. 순간 신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가벼운 전율이 몸을 타고 흐른다.

<사진설명>만달레이는 세계 최대 옥생산지로 유명하다. 사원 인근의 옥불 조각원.

쉐야토우 페이야는 입구에 마련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참을 올라가야 비로소 그 모습을 온전하게 드러낸다. 사원 본당으로 향하는 회랑은 마름모꼴 유리로 장식돼 현란하기 그지없고, 다양한 문양들은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안은 아라비안나이트의 천일야화(千一夜話)에 나오는 깊고 깊은 궁궐처럼 그윽했으며 시원한 바람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 회랑 끝은 툭 터져 있었다. 그 끝에는 의자를 갖춘 넓은 공간을 마련돼, 만달레이 시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뿌연 어둠 속에 아스라이 펼쳐진 만달레이 성과 도시, 아름다운 구도도 사원의 전경, 그리고 멀리 편안하게 펼쳐진 논과 밭. 시원한 바람에 시름마저 모두 사라지는 듯 몽환적 편안함에 도취되어 폐문시간이 다되도록 자리를 뜨지 못했다.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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