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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죽어가는 사람의 일곱 번째 반응 : 희망의 사례

기자명 법보신문

최고의 암치료제는 희망 잃지 않는 것

죽음에서 희망을 읽느냐, 절망을 읽느냐 하는 차이는 곧 삶에서 희망, 혹은 절망을 읽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삶은 죽음과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이(不二)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어가는 마지막 모습은 그가 삶을 어떻게 영위했는가 하는 자기존재의 가치를 거짓 없이 드러내는 거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무엇일까. 사람마다 각양각색으로 답하겠지만, 삶은 물론이고 죽음에 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잃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밝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보다 중요한 과제는 없을 것이다.

한 번에 두 가지 암을 이겨낸 산부인과 전문의사 홍영제 박사는 암환자에게 희망을 잃지 말라고 말한다. 어떤 경우에도 절망 자체가 암환자에게 가장 해롭다는 것이다. 2001년 10월 대장암과 콩팥암에 걸린 그는 수술과 항암치료를 통해 재발없이 건강하게 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최고의 암 치료제는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희망은 최고의 암 치료제일 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치료제이기도 하다.

서양에서 생사학을 창시한 퀴블러 로스 박사는 어린아이들에게 죽음을 설명할 때 자주 나비의 유충인 번데기 모양의 인형을 사용한다. 번데기 모양의 인형은 그가 직접 만든 것이다. 번데기의 배에 달린 지퍼를 열자 그 속에서 예쁜 나비 인형이 나온다. 그는 소아암 등으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는 어린아이를 향하여 말한다. “여러분의 몸은 헝겊으로 만든 번데기와 마찬가지이다. 죽음에 의해 여러분의 영혼은 이 육신으로부터 벗어나 저 나비처럼 예쁘게 날아서 천국으로 올라간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쉽게 설명함으로써 어린아이를 안심시킨다. 그도 얼마 전 우주로 여행을 떠난다고 말하면서 밝은 모습으로 죽었다.

또한 스위스 심리학자 융도 사후 생명의 존재를 믿는 편이 정신위생상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죽음을 지향하는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정신위생상 유익하다. 죽음을 불길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인생의 후반기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건강하지 못하고 병적이라고 믿는다.” 만일 죽음에서 희망을 읽을 수 없더라도, 가능한 한 희망을 유지하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

인도에서 ‘니르말 흐리다이’(죽어가는 사람을 보살피는 집)을 1952년 설립해 누구든지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죽을 수 있도록 했던 마더 데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은 고향으로 가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계속이고 완성이다. 사람들은 죽으면 어떻게 될지 두려워하기 때문에 죽기 싫어한다. 죽음이 무엇인지 안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살아왔던 방식 그대로 죽기 마련이다.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일 뿐이지 영혼은 계속 유지된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내가 죽어도 전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 안에 소멸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했다. 교황에 따르면 죽음은 어둡거나 모호하지 않고, 전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죽음은 사람에게 최후로 찾아오는 명백함, 눈부신 빛이다.

티베트의 달라이라마는 죽음을 한 마디로 ‘옷을 벗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매일 옷을 갈아입을 때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기지 않듯이, 죽음도 영혼이 육신의 옷을 벗는 과정이므로, 죽음에 대해 절망감을 지닐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죽음은 육신의 죽음일 뿐이고 영혼은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것이므로, 죽음은 결코 끝일 수 없다. 죽음이란 인연이 다한 육신의 옷으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과정이다. 영혼은 죽음을 통해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하고 새로운 삶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만일 죽음에 의해 전부 무(無)로 귀결된다면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것도 결국 부조리라는 생각을 피할 수 없다. 확실히 죽음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죽음에 의해 모두가 종결된다면, 산다는 것 또한 무의미하게 되고 만다.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삶의 고통도 결코 쓸데없는 것은 아니게 된다. 죽음은 끝이 아니고 영적 성장의 마지막 단계이므로, 우리가 죽음의 고통을 겪는 것도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한림대 철학과 오진탁 교수
jtoh@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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