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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탑의 나라 바간-(1)

기자명 법보신문

영욕의 세월 간 데 없고
긴 탑 그림자만 석양에 남아

<사진설명>'탑의 나라' 바간이 석양의 그림자 속에 묻혀 있다.

틀로 찍어낸 듯 비슷하게 닮은 탑군(塔群)을 둘러보면서 미얀마 불교에 대한 경외감이 점점 지루함으로 전이될 무렵, 순례 일행은 아이러니하게도 한 때 ‘탑의 나라’로 불렸던 바간으로 들어섰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간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인도네시아의 보르부드르와 함께 세계 3대 불교 유적지 가운데 하나로 인도, 중국, 남아시아 등 각 나라 양식의 탑들이 모두 모여 있어 미얀마 불교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곳이다.

앙코르와트와 보르부드르가 거대한 구조물로 사랑을 받고 있다면 바간은 엄청나게 많은 탑과 사원의 수로 감동을 주는 곳이다. 40km에 불과한 평원에 2700여개라는 상상할 수 없이 많은 수의 탑과 사원이 구름처럼 펼쳐져 있는 모습은 말 그대로 장관이다. 눈이 가물거리도록 끊임없이 펼쳐진 탑들의 향연에 누구랄 것도 없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여기에 더해 수많은 탑과 탑 사이로 떠오르고 지는 일출(日出)·일몰(日沒)의 아름다움은 언설의 경계를 넘어선 경지다. 언어가 느낌을 표현하기에 얼마나 부족한 수단인가를 절감케 하는 것은 이들 탑군이 일러주는 또 다른 교훈이다.

그렇다면 유독 바간에만 이처럼 수많은 탑이 모여 있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 연유는 미얀마 불세출의 영웅 아노라타왕(1044~1077)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간 왕조의 42대 왕이었던 아노라타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미얀마 통일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사방으로 전쟁을 벌였던 정복 군주였다. 그는 북부 라카잉을 정복하고 남부의 타톤 왕조를 복속시켜 명실상부한 미얀마 최초의 통일 왕국을 건설했다. 그가 불교에 귀위한 것은 북부 미얀마를 정벌한 후 남부 타톤 왕조에서 불법을 전하러 온 신아라한이라는 스님에 의해서였다. 불교에 깊이 감화된 왕은 이후 정복 전쟁을 멈추고 남부 타톤 왕조와 우호 관계를 맺으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게 된다. 또 포교에 남다른 재미를 붙인 왕은 남부의 타톤 왕조의 마누하왕에게 불교의 홍포를 위해 불교 경전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한다. 허나 돌아온 것은 차가운 거절이었다. 불경을 나라의 큰 보물이라 여겼던 마누하왕은 국력은 생각지도 않고 이를 일언지하에 거부해 버린 것이다. 거절의 대가는 무서운 파국이었다. 격분한 아노라타왕은 지체없이 군사를 남으로 돌려 타톤 왕조를 철저히 짓밟아버렸다. 이때 아노라타왕은 마누하왕을 비롯해, 수많은 불교건축 기술자들을 포로로 잡아 바간으로 끌고 오게 되는데 이것이 바간에 수많은 탑이 들어서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탑은 아노라타왕 이후 대략 200여 년간 왕과 귀족과 이름 모를 백성들에 의해 끊임없이 조성되었다. 1287년 몽골의 쿠빌라이칸에 의해 바간 왕조가 멸망하기 전까지 들어선 탑은 대략 5000여 개. 말 그대로 도시 전체가 거대한 탑의 밭이 된 것이다. 그러나 포르투칼, 영국,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를 차례로 겪으며 많은 탑들이 도굴되거나 파괴됐고, 1975년에는 설상가상으로 지진까지 발생해 지금은 전성기 때의 절반가량만이 남아 옛 영화의 추억을 아련히 되살리고 있다.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남아있는 탑의 수가 여전히 많다보니 바간은 탑의 박물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탑들은 흰색, 혹은 황금으로 아름답게 치장했으며, 서양의 고대 건축물에서 중국의 전탑, 혹은 잉카 유적의 일단을 보는 듯 형태도 너무나 다양해 종류를 가늠하기 어렵다. 미얀마의 다른 도시에서 보았던, 틀에서 뽑아낸 것 같은 비슷한 탑의 지루함을 이곳 바간에서는 찾아 볼 수 없으니, 신기할 뿐이다.

<사진설명>바간에서 가장 큰 사원인 담마양지.

바간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짧지만 반듯한 도로에 길을 따라 늘어선 나무들은 이곳이 미얀마 불교 유적의 정점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말하자면 다분히 관광객을 의식한 전시행정의 편린이 눈에 띠는 것이다.
일행은 바간에서 가장 오래된 탑으로 알려진 부파야를 찾아 그 앞에 섰다. 이라와디 강변에 위치한 부파야는 기원 후 300년께 세워진 오래된 탑으로 금방이라도 파란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쪽빛 하늘을 배경으로 매혹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다.

황금 요령을 세워놓은 듯한,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도 모양이려니와 햇볕을 받아 하얗게 빛을 발하는 대리석 바닥과 함께 파란 하늘을 이고 있는 모습이 한 폭의 멋들어진 풍경화다. 크기는 4∼5m에 불과한 비교적 작은 탑이지만 바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양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그 명성이 높다.
이런 명성 때문일까. 부파야 아래로 내려가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작은 선착장이 일행을 맞이한다. 본래는 석양이 지기 전 배를 타고 강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바간의 아름다운 노을을 즐기기는 것이 정석이다. 그러나 빠듯한 일정 탓으로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한낮에도 불구하고 배를 타고 바간의 전경을 즐길 밖에 없었다.

강을 따라 펼쳐진 바간은 감동 그 자체였다. 아니 감동이라기보다 오히려 무거운 침묵이었다. 푸른 숲들 사이에서 배가 지날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는 흰색, 황금색, 황토색, 붉은색 탑들은 천년의 전설을 품고 있는 듯 신비롭기만 했다. 사각, 원형, 단층, 중층, 다층 등 다양 종류에, 무너져 속살을 훤히 드러낸 붉은 탑에서, 싯누런 황금으로 치장하고 위용을 뽐내는 거대한 탑까지 바간은 마치 생노병사(生老病死)의 모든 군상을 탑으로 담아 놓은 듯하다. 가끔씩 배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옷을 적시는 것도, 작열하는 태양이 살갗을 태우는 것도 잊은 채 강을 따라 펼쳐진 바간의 아름다움에 부산했던 마음마저 숨을 죽였다. 강과 탑들 사이로 고개를 내민 하늘은 또 어찌나 푸른지 우리의 가을처럼 청아하기만 하다.

한 시간에 걸친 선상 파노라마를 끝낸 일행은 마누하 사원으로 향했다. 이곳은 타톤의 마지막 왕 마누하의 진한 슬픔이 배어있는 곳이다. 경전을 보내달라는 아노라타왕의 제의를 거절한 결과로 포로가 돼 바간에 끌려왔던 비운의 왕 마누하. 그는 왕의 신분을 박탈당한 채 감옥에 갇혔지만 곧 풀려나 탑과 사원을 짓는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마누하 사원은 감옥에서 풀려난 마누하가 직접 공사를 담당해 완성한 사원이다. 따라서 그의 고통과 슬픔이 사원 곳곳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진왼쪽>마누하 사원의 불상. 워낙 공간이 비좁아 전체 모습을 잡기가 수월치 않았다./ <사진오른쪽>바간에서 초기 탑의 전형을 보여주는 부파야. 복발 형태의 탑이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원은 참배객들에게 최대한 불편함을 주기 만들어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겨우 한 사람이 지나다닐 정도의 비좁은 공간만을 남겨 놓은 채 들어선 거대한 불상들. 부인과 함께 조그맣게 조성된 마누하 자신의 소상(小像)은 무표정을 넘어 진한 슬픔을 발산하고 있다.

나라를 잃고 포로로 잡혀 있는 자신의 답답함을, 노예로 전락한 왕비의 불쌍한 삶을 그는 이렇게 처연한 모습으로 표현했을 것이리라.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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