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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설선대법회 정 광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적멸무심의 대장부가
걸림없는 대 자유인

5월 7일 열린 범어사 설선대법회에서 봉암사 태고선원장 정광 스님은 ‘선 수행의 단계’를 주제로 법문했다. 정광 스님은 법석에서 ‘무심’과 ‘의단독로’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청정 불국토를 장엄하실 분은 부처님도 조사스님도 큰스님들도 아니고 이곳에 모이신 우리 불자님 자신”이라며 “우리 불자님들이 어떻게 마음을 쓰느냐에 따라 불법의 흥망이 결정됨을 깊이 명심해 간화선을 열심히 닦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법문을 요약 게재한다. 편집자 주

무심(無心)이 도(道)라는 말이 있습니다. 황벽스님은 전심법요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이, 한 분의 무심도인을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왜냐하면 무심한 사람은 일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여여(如如)한 본래의 몸이 안으로는 목석(木石)과 같아서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으며, 밖으로는 허공과 같아서 막히지 아니하고 걸리지도 아니하여, 능소(能所)도 없고, 방소(方所: 일정한 방향과 처소)도 없으며, 상모(相貌)도 없고, 득실(得失)도 없다. 또한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 나아가 십지(十地)에 이르러 무심을 얻는 자가 있으며 이는 일념에 무심을 얻은 자와 같아서 다시 심천(深淺)이 없다.”

불조는 오직 일심법(一心法)만 전했습니다. 지위(地位)의 점차에 관계없이 바로 무심만 사무쳐 깨달으면 그 공용(功用)이 가지런하여 다시 심천이 없다고 하셨으므로 도를 배우는 분은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혹 동안상찰(同安常察)스님의 십현담(十玄談)에 나오는 “무심을 일러 도라 말하지 말라. 무심이 오히려 하나의 거듭된 관문으로 막은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분이 있으나, 여기서 말하는 무심은 유무의 견해가 소멸한 적멸무심(寂滅無心)으로 무심 또한 스스로 없는 무심한 본래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두 법융선사가 이르되, “넉넉히 마음을 쓸때에 넉넉히 마음없이 쓰나니 간곡한 이야기는 명상에 수고롭고 직설은 번거롭고 거듭됨이 없는지라. 무심을 넉넉히 쓰면 항상 써도 모자라지 아니하니 지금 무심이라 말하는 곳이 유심으로 더불어 다르지 않다”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일용에 무심을 여유롭게 쓰면서 생활화하면 마음이 항상 또렷하고 고요하여 편안하고 맑은 정신으로 모든 생활에 걸림없이 대응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간화선은 복잡한 현실 생활 중에서 직업이나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선생활을 할 수가 있음을 우리 불자님들은 이 자리에서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화두선 공부를 지어갈 때는 반드시 모기가 무쇠로 된 소 등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이 하라 했습니다. 목숨 걸고 하라는 얘기입니다. 고봉 스님은 『선요』에서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망설이지 말고 입부리를 내릴 수 없는 곳에 목숨을 버리고 한번 뚫어 볼 것 같으면 몸뚱이까지 쑥 들어갈 때가 있을 것” 이라 했습니다. 또한 수행인은 활구(活句)를 참구해야지 사구(死句)를 참구해서는 안됩니다. 활구에서 깨달으면 불조와 더불어 스승이 될만하지만 사구(死句)에서 깨달으면 제 자신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본래 부처님인데 “무엇 때문에 닦아야 하나?”라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은 닦음(修)이 없이 닦고, 증득(證得)함이 없이 증득하고, 무심(無心)히 닦으며, 오염(汚染)됨이 없이 닦는다고 하시며, 그 종지를 설법하실 때마다 강조했습니다.

간혹, 사람들이 ‘깨달으면 무사인(無事人)이라 수행을 마쳤는데 어째서 수행을 계속한다고 합니까?’ 하시는데, 이는 미(迷)한 사람은 범부(凡夫)라 망수(妄修: 바르지 못한 수행)를 하고, 깨달은 사람은 성인(聖人)이라 진수(眞修: 진실한 수행)를 하게 됨을 말합니다. 그래서 무사인은 곧 깨달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며 바르지 못한 수행은 끝마치고 진실한 수행만을 실행하시는 분이라고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은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고 있습니다. 이 긍지를 잃지 않고 지니기 위해서는 사람다운 사상과 행위를 늘 가지고 닦지 아니하면, 순식간에 역사의 흐름에서 밀려나게 되고, 그로인해 사람 몸마저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각자가 본래 부처님임을 명확하게 스스로 깨달아 부지런히 정진하며 수행하는 길만이 궁극의 행복한 길로 나아가는 축복 받는 삶을 누리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올바른 지혜를 지니신 분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인천(人天)의 복전(福田)이 됨을 의심치 않습니다.

간화선은 일상생활 중에서 수행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일상생활을 떠난 간화선은 허망하여 토끼뿔이나 거북의 털 같다고 하여 지극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조사문중에서는 행주좌와와 어묵동정을 늘 여의지 말고 한결같이 공부짓기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간화선이 생활선으로 이해되어 생활속에 살아 숨쉬는 실질적인 선으로 보편화 되지 못하고, 참선은 전문수행자만이 닦는 것이요, 상근기(上根機) 사람만이 접근할 수 있는 수행법이라 잘못 인식되어 왔습니다. 간화선 대중화를 설선(說禪)하는 지금에 이르러 이곳에 모이신 사부대중이 언제, 어디서나 생활 중에 간화선 수행을 할 수 있어야 함은 물론이요, 급급히 변천하는 현 시대의 바쁜 생활중에도 가장 편리하게 수행할 수 있는 간화선법으로 발돋움하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의상조사(義湘祖師)가 법성게(法性偈)를 통해 이르기를 “한 생각이 곧 한량없는 시간이요, 한량없이 오랜 시간이 곧 한 생각” 이라고 했습니다. 간화선 수행은 화두를 드는 짧은 순간에 한량없는 오랜 시간을 남김없이 수용할 수 있는 수행법이므로 언제, 어디서나 여유롭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간화선 수행은 언제, 어디서나 화두를 드는 순간 내가 스스로 부처님임을 믿고, 바른생각과 바른 생활이 모르는 사이 점차 익어져서 시비에 갈등하고 집착하는 중생심을 멀리 여의고 청정하고 물듬이 없는 순일한 마음으로 화두를 들게 되므로, 조작하여 취사(取捨)함이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됩니다. 의단이 독로하면 마음과 경계가 타성일편(打成一片; 한 덩어리를 이룸)이 되고, 무심(無心)이 깊고 그윽하여 일용(日用)중에 막히거나 장애됨이 없어 불성이 밝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를 당해 과거의 악업이 문득 소멸하고 그 자취마저 찾을 길이 없게 되므로, 한량없이 오랜 시간을 곧 한 생각 속에 남김없이 거두어 들인다는 의상스님이 남긴 법성게의 유훈(遺訓)을 실지로 증험하게 됩니다.

어찌 우리들은 바쁘고 시간내기 어렵다는 핑계로 내 생명과 삶의 근원을 망각하고 성실히 돌보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간화선은 고독한 자신과의 대화의 길을 열어주어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자신만이 지닌 인생의 고뇌에 통풍을 시켜주는 감로의 역할을 하여,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심중의 고뇌를 단번에 풀어주고, 지혜와 편안함을 원만히 갖추게 하여 구경에 이르도록 부족함이 없는 세계를 한량없이 열어보인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모인 사부대중은 간화선을 실참하여 누구나 제 자신이 부처님임을 확신하며 바르게 생각하고, 생활하면서 밝고 아름다운 미래를 설계하시기 바랍니다.

간화선의 수행 요체가 되는 의단 독로(疑團 獨露)에 관해 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화두선은 반드시 화두를 들면서 참구해야 합니다. 화두를 들지 아니하면 삿된 생각으로 믿음이 흔들리고, 간절하게 참구하지 아니하면 의단이 독로하지 아니하여, 조사관문도 뚫지 못하고 분별심도 끊을 수 없어 결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의심을 지어가되 지어감이 없이 지어가야 하고, 의심을 억지로 지어가지 아니하되, 끊임없이 지어가면서 짓지 아니해야 합니다.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면 자연히 성성적적하고, 성성적적한 공부가 깊이 진행되더라도 간화(看話)와 참구(參究)는 병행하여야만이 성성적적한 식심(識心)이 조복되어 의단이 독로하고, 타성일편이 되어 은산철벽을 뚫고 무문관(無門關)을 통과하여 깨달음을 이루고 일체법에 자유로울 수 있다고 봅니다.

간화선을 실참실오(實參實悟)하여, 일체 중생으로 더불어 청정 불국토를 장엄하실 분은 부처님도 조사스님도 큰스님들도 아니고 이곳에 모이신 우리 불자님 자신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평소에 우리 불자님들이 어떻게 마음을 쓰느냐에 따라 불법의 흥망이 결정됨을 깊이 명심하시고 일상에 간화선을 열심히 닦도록 합시다.

부산지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정광 스님은

1942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난 정광 스님은 1961년 쌍계사에서 대월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고, 이후 약 40년간 선원에서 정진해 오면서 선과 교를 겸비한 대표적인 선승으로 알려져 있다.
봉암사에서만 30년 이상 정진한 스님은 보물 제 138호인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등 선종사 관련 비문들을 번역, 연구한 결과로 『지증대사비명소고』를 펴내 한국선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있다. 스님은 현재 봉암사 태고선원에서 선원장을 맡고 있다.


질의 응답



“신심 속에 분심-의단 갖춰져 있다”

질문자 무관 스님

Q: 대신심, 대분심, 대의정을 구비하지 못한 초참자나 일반 재가 신도들이 할 수 있는 화두선 수행의 단계, 그리고 화두를 성성적적하게 참구할 수 있는 방법을 듣고 싶습니다.

A: 화두선 공부에 있어서는 반드시 대신심과 분심과 또한 의정 이 삼대요소를 구비해야만 한다.
신심이 결여되면 자신의 뼈대와 근원이 되는 요소가 없어서 바람이 부는데 따라 갈팡질팡하게 된다.
그래서 모든 중생들은 부처님과 다름이 없이 본래의 모습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어야 된다. 중생은 망상분별집착만 여일 것 같으면 바로 부처님의 불성과 모습이 그대로 현존할 것이다. 이 신심이 갖추어진 이후에는 뜻이 견고해야 한다. 믿기는 믿었는데 스스로 현실에서 공부를 짓지 않게 될 것 같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마음이 뜻한 바가 태산같이 견고해서 흔들리지 않고 공부를 지어가야 만이 자신의 궁극적인 뜻을 이룰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이렇게 내가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러한 이유를 마음 속에 깊이 명심하고 그렇게 되지 못한 사유를 마음속에 늘 의문을 가지고 참구하면서 망상분별집착을 근원적으로 소멸해야 한다. 삼대 요소 중에서도 대신심만 내면 자연히 분심과 의단은 그 속에 갖춰져 있다.

Q: 선지식 스님들이 법거량으로 질문자의 수행 정도나 말과 문자를 여읜 심행처멸한 견처를 구분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A: 부모는 자식들 가운데 어떤 말로 어떤 교묘한 거짓말을 하더라도 저놈이 무슨 마음으로 무엇이 필요해서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을 금방 할 수 있다.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의 말씀은 상대편의 말과 언어로서 조작하는데 있지 않고 상대의 마음이 무엇에 기인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알고 있으나 그때 그때의 방편에 따라서 모른척 하면서 이것저것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방편설이라고 한다. 또 이도공독이라는 재미있는 말이 있다. 독으로서 더 지독한 독을 공략한다는 말이다. 천차만별로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들이 본래 자기의 마음을 깨닫도록 하는 방법이라는 뜻이다.




“본래에는 시작도 끝도 없어”

질문자 최익두 거사

Q: 본래면목이나 실상에서는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님이 분명한데 현 법계에서는 분명히 부처와 중생이 둘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저를 포함한 모든 중생을 일러서 무엇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A: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깨달으면 부처고 미하면 중생이다. 본래 마음의 본 자리는 다른 것이 없다. 다른 것은 무엇이냐? 깨닫고 미한데 관계가 있다.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부처님과 중생 둘로 나누어지지 아니하고 근원적인 모습에서는 다 같다. 그러니까 중생이라고 있을 것도 없다. 그러나 산을 보면 산이요, 물을 보면 물이로다. 전체 두두물물이 실상 그대의 모습이다. 그래서 중생은 중생이고, 부처는 부처고 또한 깨달은 사람은 깨달은 사람이고, 미한 사람은 미한 사람 이렇게 천차만별로 나누어 진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조금도 차별이 없다.

부처님께서는 본래 우주만물이 한 물건, 즉 일불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있다, 없다의 경계를 뛰어넘어 본래 일물, 또는 본래 무일물이라고 하는 말이 같은 뜻으로 이해가 됩니다만 그렇다면 이 본래 무일물 내지 일물이 왜 오늘날 이 모든 중생을 포함한 우주 만법계로 나누어지게 되었는지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말씀해 주십시오.
이 문제도 근원적인 질문으로 우리들이 맨 처음에 이야기한 본래 마음, 본래의 모습을 알 게 될 것 같으면 이러한 이야기가 나타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의문도 없다.
본래의 마음, 본래 면목,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미와 오, 깨달음과 미한 것으로 이야기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본래라는 말을 썼다. 이 본래는 나도 여의고 타도 여의게 된다. 나도 없고 타도 없다. 나와 남이 없고 또한 성인과 중생이 없다는 데서 본래의 마음, 본래의 모습이라고 이야기 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본래면목, 본래 모습을 확실히 알지 못하게 되면 일상생활 가운데 맞지 않는 일들이 현실에서 그대로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모든 법은 방편이고 거짓된 것이라고 부처님이 확실하게 말했다. 본래라는 것에는 시도 없고 종도 없다. 이름과 형상 이런 모든 것을 여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본래라는 말 자체도 없는 무심한 우리들의 영원불멸하는 마음의 본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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