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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탑의 나라 바간-(2)

기자명 법보신문

소박한 미얀마인이 빚어낸
고귀한 인류 문화 유산

<사진설명>마차를 타고 둘러본 바간의 전경. 파란 하늘과 푸른 숲, 황토빛 탑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무더운 바간도 아침저녁으로는 우리의 가을 날씨를 연상시키듯 신선하다.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라 아침에 올려다 본 하늘은 맑은 청록색으로 각질하나 없다. 상큼한 공기를 폐 가득히 들이 마시며 순례일행은 바간에서의 이틀째 여정에 들어갔다.

앞서 밝힌 대로 바간은 엄청나게 많은 탑과 사원들이 ‘탑의 밭’을 이룬 곳이다. 따라서 바간의 유적을 제대로 둘러보기 위해서는 보통 3∼4일에서, 많게는 일주일까지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빠듯한 일정이 일행의 발목을 잡고 있으니 마음은 조급하기만 하다.

바간에서도 가장 많은 탑이 남아있는 올드 바간을 감상하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바간은 따로 버스가 다니지 않는 관계로 유적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마차나 자전거를 이용하는데, 이방인에게는 아무래도 마차가 더 멋스럽다. 특히 마차를 운영하는 마부들은 바간의 유적들에 대해 상세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바간의 길라잡이로도 손색이 없다.

올드 바간으로 향하는 길은 시원스럽게 쭉 뻗어 있다. 파란 쪽빛 하늘을 머리에 인 채 ‘딸각 딸각’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달려가니 마치 바간의 옛 신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듯 아늑한 기운이 감돈다. 길옆으로 스치듯 얼굴을 내미는 바간의 속살들은 매우 아름답다. 눈을 시원하게 맑히는 푸른 숲과 그 안에 서서 기기묘묘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는 수많은 탑들이라니! 부서지고 무너진 이름 모를 탑들은 황량한 바람 속에 전설과 역사를 가득 담은 채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바간 도착 첫날 보았던 유적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유적으로, 바간 불교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아난다 사원의 늘씬하고 화려한 불상, 황금으로 빛나는 쉐지곤 대탑, 거대한 몸체로 사람들의 기를 죽이는 담마양지 사원 등, 이제까지 보지 못한 색다른 아름다움에 절로 감탄을 자아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유적들은 시선을 사로잡기는 하였으나 가슴을 열지는 못했다. 한마디로 감동이 부족했던 것이다.

특히 첫날 보았던 담마양지 사원이 주는 참담한 느낌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담마양지는 앙라웅시투왕의 아들인 나라투왕에 의해 건립된 유적이다. 나라투왕은 미얀마에서도 손꼽히는 폭군으로 아버지인 앙라웅시투왕과 동생, 그리고 아내까지 무자비하게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나중에 참회의 징표로 지었다는 사원이 바로 담마양지이다. 그러나 나라투왕은 사원을 건립하는 도중에도 잔인한 심성을 버리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사원의 벽돌 틈 사이로 바늘을 찔러 만약 틈새가 발견되면 건축 담당자와 일을 한 노예들의 팔목을 잘라버리는 무서운 형벌을 스스럼없이 자행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탑이 주는 기운은 음침하고 서늘했었다. 분위기에 걸맞게 박쥐들이 서식하고 있었으며, 박쥐의 배설물 냄새가 피비린내처럼 진동했다. 탑 안에는 당시 노동자들의 팔을 잘랐다는 작두 등이 전시돼 있어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따라서 오늘 마차를 타고 둘러보는 탑과 사원들은 비록 주목을 받지 못하고 버려져 있는 유적이지만 그대로가 한 폭의 수채화고, 살아 숨 쉬는 역사였다. 세상의 주인이 백성인 것처럼 이들이 바간의 진정한 주인인 셈이다.

이름마저 사라져 버려 겨우 번호로 불리는 탑들은 무너지고, 흘러내려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러나 이들 탑 속에는 앉아 있는 부처님, 누워있는 부처님, 서 있는 부처님, 웃는 부처님, 슬픔에 찬 부처님 등 다양한 형태의 불상이 사람들을 맞이했고, 코가 뾰족하고 낮은 버마족의 얼굴에서, 이목구비가 뚜렷한 인도인의 모습, 코가 낮고 얼굴이 둥근 중국과 몽골리안의 얼굴까지 가지각색의 상호를 한 부처님이 모셔져 있었다. 말 그대로 탑과 불상의 전시장이었다.

은은한 풍경 소리를 들으며 방문한 아자고나 탑은 이끼가 낀 채 무너져 내리고 있었지만 황금빛 보륜과 벽돌을 조각처럼 쌓아 올린 화려한 문양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탑을 장식할 금을 얻기 위해 자신의 눈을 바치고 대신 양과 소의 눈을 가졌다는 이자고나 스님의 전설이 깃들어 있기도 한 이곳은 스님의 환생을 믿는 사람들의 귀의처로 민초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름조차 잃어버려 번호로 불리는 탑군에는 오래된 벽화들이 즐비했다. 사문유관에서 교훈적인 전생담까지, 벽화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대부분의 벽화가 비바람에 노출돼 퇴색돼 있었지만, 은은하고 섬세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은 하나하나가 그대로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었다. 고졸하고 소박한 탑 속에는 또 그만큼의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직접 만든 수제품을 들고 방문객의 발길을 붙드는 사람에서, 관리 소홀을 틈 타 아예 탑 안에 살림을 장만한 이들까지, 탑과 사람들은 한 몸이 되어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의 심성 또한 무공해 채소와도 같았다. 그림엽서나 조각품을 들고 다가오기는 하지만 다른 동남아의 유적지의 사람들처럼 끈질기게 따라 붙으며 살 것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국과 일본은 같은 불교국가라며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는 맑고 순진한 그들의 심성에서 깊은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작렬하던 태양이 점차 숨을 죽이자 일행은 이라와디 강변의 밍글라제디 탑으로 향했다. 몽고군에 저항하다 멸망당한 바간의 마지막 왕 나라티하파티에 의해 조성된 밍글라제디는 벽돌을 퍼즐처럼 연결해 완성한 아름다운 탑으로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탑의 나라’ 바간 왕조의 멸망을 슬퍼하며 일몰을 맞는다. 머리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올라야 할 만큼 가파른 탑의 계단은 한때 왕과 스님만이 오를 수 있었던 신성불가침의 장소였다. 아마도 이들은 이곳에서 바간 평원에 구름처럼 펼쳐진 탑들을 보며 자신의 공덕을 찬탄했으리라.

시나브로 어둠이 밀려들면서 탑 주변에는 지는 해를 보기 위해 벌써부터 세계 각지에서 모인 수많은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다. 해는 수많은 탑들이 점점이 박힌 넓은 바간 평원을 붉게 물들이며 한참을 머무르다 멀리 산 너머로 몸을 숨긴다. 마지막을 사루는 강렬한 태양의 빛에 탑들은 숨을 죽이고, 사람들은 아쉬움의 탄성을 지르고, 이윽고 어둠 속으로 바간이 고요히 저물어 간다.

“바간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탑과 그 안에 머물러 계신 부처님과 평생을 함께 하기 때문이지요.” 산디마 스님의 은은한 설명이 저문 해를 따라 산등성이를 넘고 있었다.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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