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들의 나무사랑
스님들의 나무사랑
  • 보광 스님
  • 승인 2004.08.1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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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는 청계산에도 푸른 기운이 감돌고 있다. 휴일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고 절을 참배한다. 유난히도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는 명산일수록 대찰이 있으며, 그 곳만은 울창한 산림이 자리하고 있다. 어디 고찰이 있는 산에 나무 없는 절이 있는가 보아라.

이와 같이 전국 사찰림에 숲과 나무가 울창하기까지에는 역대 스님들의 나무사랑, 산사랑이 남달리 지극하였기 때문이다. 요즈음에야 산에서 땔나무를 하지 않지만, 70년대까지만 하여도 집집마다 부엌 아궁이는 이산 저산의 나무를 모두 다 집어 삼켰으며, 시골 동네마다 나무 짐을 지고 다니는 일꾼들이 줄을 이었다. 도시에서도 땔나무를 파는 장터가 열렸으며, 장작더미를 높이 쌓아 두는 것이 마치 부의 상징인 것처럼 여길 때도 있었다. 그 뒤에 나온 것이 연탄이며, 겨울이면 연탄가스로 숨지는 사람이 많은 적도 있었다.

한국불교의 근거지는 산 속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산악불교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산이 있으면 절이 있고 숲이 있기 마련이며, 다소 생활에 불편함이 있더라도 산을 마구 헐어 길을 내지 않았다. 길거리에 큰 나무가 있으면 피해가면서 오솔길을 내어 몇 십리를 걸어 다니면서 수행하여 왔다. 특히 총림(叢林)에는 스님들의 직책 가운데 산감(山監)이라고 하는 소임이 있었다.

대체로 돌아가면서 맡는 일이지만, 이 소임을 맡으면 도시락을 싸 가지고 산에 가서 하루 종일 산을 지킨다. 나무꾼들이 올라와서 땔나무라도 했다가는 야단이 난다. 나무 짐을 보면 일단 멈추게 하지만,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짐을 진 체로 넘어뜨린다. 그때 넘어진 사람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짐 뒤의 어린나무가 다치지 않았는지를 염려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보니 자연히 사하촌(寺下村)의 사람들에게는 인심을 잃는 소임이 되고 말았다.

때로는 산중 사찰에서도 땔나무 때문에 많은 대중이 함께 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용성스님께서는 1925년에 도봉산 망월사에서 만일참선결사(萬日參禪結社)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점차로 결사대중이 늘어남에 따라 보안림으로 지정된 도봉산에서는 땔감을 조달할 수 없어서 통도사 내원암으로 이석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스님들의 수행도 땔나무의 수급에 따라 이동이 이루어질 정도였다. 과거에는 스님들의 시비 가운데 하나가 산판(山坂)문제였다. 수백년을 잘 가꾸어 놓은 사찰림을 일부 산판업자들의 꾐에 빠져 벌채를 허락하였다가 큰 경을 치른 스님들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평생토록 오점이 남게 된다. “저 스님은 어느 절의 산판을 해먹은 스님이다”라고 말이다. 이는 바로 비리에 연루된 사람이라는 뜻으로 통하였다. 그러다가 보니 어지간히 간이 큰 사람이 아니고는 산판을 허락하는 주지스님은 없었다. 이렇게 가꾼 산에는 가을이면 송이가 많이 나게 되어 사찰 살림에도 크게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교통의 편리와 도시의 확장으로 인하여 큰산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지리산 꼭대기까지 도로가 나고, 설악산을 마음대로 넘나들고 있다. 급기야는 정부에서 산을 보호하기 위해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여 입장료까지 받고 있는 북한산에 관통도로가 난다니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북한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때 여기에 있는 수많은 절들은 불편함과 신도관리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예상되었지만, 정부의 취지가 산을 보호한다고 하여 동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산을 파괴하는 도로를 낸다고 하니 어찌 참을 수 있단 말인가? 스님들이 단순히 자신의 절을 보호하기 위해 북한산 도로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스님들의 산사랑과 나무사랑의 마음은 한국불교 특유의 역사성을 지닌 것으로서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며, 단순히 자연보호 차원이 아님을 말이다.



보광 스님(동국대 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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