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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산 10년 방랑세월 접고[br]나머지 삶 ‘이뭣고’로 회향

기자명 법보신문

참선수행 발원 유 서 중 거사

1992년, 유서중 거사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파천교를 지나고 있었다. 법우에게 받은 영인 스님의 ‘우리말 반야심경’을 무심코 틀어보았다. 순간, 승용차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반야심경구절에 그는 점차 빠져들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마치 자신의 몸이 스피커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독송과 하나가 되는 듯 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환희였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그저 눈물만 넘쳐흘렀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 ‘바로 이거다’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을 뿐입니다.”

기독교 구원설 이해 안돼

유 거사는 원래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성경 공부에 남다른 열성을 보였던 그에게 주위사람들은 한결같이 신학대학에 입학하라고 권했을 정도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항상 의문부호가 하나 있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왜 완벽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특히 누구라도 예수를 믿으면 구원되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될 수 없다는 논리는 아무리 곱씹어보아도 이해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신학대 진학을 접고 설비사로서의 길을 수년간 걸은 그는 많지 않지만 남부럽지 않은 돈도 만져 보았다. 그런데 「반야심경」을 듣고 난 후 그의 심상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고 있는 지금의 나 자신이 과연 이 생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타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가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무상이라는 깊은 뜻을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돈과 명예가 무슨 소용이 있나 싶었습니다.”

당시의 ‘무상’은 ‘체념’에 가까웠다. 이후로 그는 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렇다고 그가 등산가가 된 것은 아니다. 지리산과 두타산, 노추산과 옥갑산, 태백산 등 전국의 산을 누비며 암자와 토굴에서 기도와 참선을 병행했다. 다행히 그는 산에 오르기 전 「천수경」을 비롯한 기본적인 불교서적은 탐독한 터라 산 수행 중에 빠져들기 쉬운 무속의 유혹에는 걸려들지 않았다.

산을 누볐던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암자나 토굴을 찾으면 하룻밤을 청해 기거하곤 했다. 자신의 고독을 알았다는 듯 산바람은 그를 감싸주었고 구름이 그를 늘 지켜봐 주었다. “산에 이는 바람 한 점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 3년여가 지나서였습니다. 나중에는 꽃잎과 나뭇잎 하나하나가 모두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알게됨으로써 저의 정체성도 조금씩 갈무리 되더군요.”

그 당시 그는 산에 머물며 수행정진 하는 이들로부터 가르침도 받았다. 특히 남해 보리암과 충북 괴산에서 만난 스님과의 인연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남해 보리암 주변의 절벽 토굴에서 수행하시는 노장 스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대중과의 접촉을 일체 끊고 정진의 고삐를 놓지 않았던 분입니다. 무작정 스님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찾아뵈었는데 놀랍게도 반갑게 맞이하면서 한 말씀 하시더군요.”

노장 스님은 그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며 “금강경을 공부하는 게 좋겠다”고 전했다. 이 순간의 인연이 있어서일까? 그는 후에, 정확히 1997년 유 거사는 청담 스님의『금강경 대강좌』를 접하면서 선에 한 발짝 다가간다. 남해 보리암 토굴을 떠날 때 노장 스님은 그에게 “한가로움을 놓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충북 괴산의 한 토굴에서 만난 스님은 그의 가슴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존재로 다가왔다. 그 스님은 유 거사에게 촛불을 건네고는 “다시 달라”고 해 다시 돌려주니, 스님은 다시 그에게 건네주며 돌려 달라고 해 다시 스님에게 그 촛불을 건네주었다. 스님은 그에게 “받을 사람이 누구냐?” 하고 물었지만 말 한마디 뗄 수 없었다. 법거량이 진행되는 순간이었지만 헤아릴 길이 없었던 그였다. 스님은 그날 유 거사에게 업과 인연에 대한 심도 있는 법문을 들려주었다. 그는 지금도 스님의 말씀 중 이 한마디를 잊지 못하고 있다.

“나는 신통력을 버림으로써 삼매를 얻었다. 수행 중에 얻을 수 있는 신통력에 빠져드는 순간이 자신을 산산조각 내는 순간이다.” 다음의 한마디도 평생 가슴에 남을 것이라고 한다.

“역대 선지식이 말씀하셨던 한마디 한마디는 거짓이 아니다. 윤회한다고 하니 죽자마자 바로 사람으로 태어날 줄 알겠지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도 사람 몸 받아 태어나려고 기다리는 영혼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사람 몸 받아 태어나기 어렵고, 사람으로 태어나 불법 만나기 어려우니 이 생에서 업장을 소멸하며 수행하라.”

「천수경」에서 이르는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만겁난조우’(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遇)에 대한 선법문이 아닐 수 없다.

“신통력 버려라” 충고 생생

그러나 그는 당시에 자신을 점검해 줄 선지식과의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렇기에 보통의 수행 초발심자가 범하기 쉬운 장애에 걸려들고 말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의 화두에 자신의 온몸을 바치지 못하고 ‘이뭣고’에서부터 ‘판치생모’, ‘무’, ‘부모미생전 본래면목’ 등의 화두 사이에서 무엇 하나도 잡지 못했다. 그러나 전국의 산을 오르내리며 수행정진 했던 그는 적어도 깨달음은 아닐지라도 방랑의 심신을 다스릴 수는 있었다. 2000년에 접어 든 그는 산에서 내려와 다시 중국과 태국, 네팔 등지를 순례하며 불교에 대한 시야를 넓힌 후에야 세속의 삶에 안착했다.

유 거사가 전국의 산을 돌며 터득한 것은 수행 외에 하나가 더 있다. 바로 약초를 재료로 병을 치료하는 민방요법.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산에서 약초를 통한 대체의학 연구에 몰두 하는 기인들인 많다고 한다. 유 거사는 이들을 만나며 그들로부터 한 가지씩 비법을 전수 받았다. 산에서 내려온 후 그는 아픈 사람들을 보면 처방할 수 있는 약재를 일러주어 병의 시름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있다. (02-882-1137)

약초 처방으로 이타행 실천

“저 자신이 산에서 방황할 때 밥 한끼, 물 한잔도 다 얻어먹었습니다. 그분들이 생면부지의 저에게 아낌없는 보시를 해주셨으니 저도 이젠 타인에게 보시를 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에게 재물은 없지만 인연 닿는 사람들에게 약초 처방전을 일러주어 자신의 병을 치료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벌써 그는 신경질환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처방을 내려 많은 이들을 고쳐주었다고 한다. 고맙다는 뜻으로 돈을 주려 하지만 유 거사는 이렇게 말한다. “저도 보시를 통해 고쳐드렸으니 당신도 누군가에게 베푸는 삶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사진설명>유서중 거사의 법문(?)에 아내 정혜월(사진 오른쪽) 보살도 기독교에서 불교로 개종했다.

또 산에 오를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약초 구하러 가야지요!”라며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제 선지식과 인연을 지어야 할 때라 생각합니다. 화두도 선지식으로부터 받은 후에야 드는 것이지만 허락한다면 ‘이뭣고’를 남은 생애 동안 들으려 합니다.”

굳이 수행 측면에서 보면 그는 높은 경지에 있는 거사는 분명 아니다. 그러나 수행 초발심과 이타행에 대한 원력은 누구 못지않게 남달라 보였다.

지난 10여년의 방랑 세월을 만행의 한 기억으로 간직하며 수행의 첫발을 내딛는 그가 선지식을 만나 정진의 깊이를 더하기를 기대한다.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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