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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성지 오대산을 가다]② 청량사(淸凉寺)

기자명 법보신문

조화옹이 빚은 풍광에
신비 켜켜이 드리운
오대 불교의 발상지

똬리를 튼 뱀처럼 ‘S'자로 굽어진 길을 따라 남대(南台) 정상으로 향했다.

<사진설명>동화 속에 나오는 성 처럼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청량사의 전경.

듬성듬성 자리를 잡은 몇 그루 나무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고 서 있는 듯하더니 어느새 끝간데 없이 푸른 초원이 넓게 펼쳐진다. 눈이 가물거리도록 광활한 대지와 쪽빛 하늘. 명산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이런 광경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푸른 초원 멀리서 작은 바람이 일어난 듯 싶더니 어느새 다가와 옷자락을 흔들며 이마에 맺힌 7월의 열기를 한 순간에 식혀버린다. 자연이 빚어낸 예술작품에 감동도 잠시, 서둘러 카메라를 꺼내 눈에 맞췄다. 가슴 밑바닥에 솟구치는 환희를 오롯이 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말이 진실을 담기에 역부족이듯 카메라 또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담기에는 불가항력이었다. 어느 예술가가 있어 조화옹(造化翁)의 경지를 뛰어넘을 것인가. 카메라를 놓고 자연이 빚어낸 아름다움을 넋 놓고 바라볼 밖에.

가슴 밑바닥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감동에 숙연해진 일행은 첫 번째 방문지인 오대산 남대 인근 청량사(淸凉寺)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가갈수록 절의 이름처럼 투명하면서도 시원한 공기가 점점 진해지는 것을 보니 옛 선인들의 지혜에 감탄사가 절로 난다.

청량사는 북위 효문제(재위 471∼499) 때 건립됐다. 오대산에서도 가장 오래된 도량이라고 하니 말하자면 오대산 불교의 시원이라고나 할까. 특히 문수보살에 얽힌 청량사의 창건 설화는 역사적 사실을 넘어 신비감마저 일게 한다.

지금부터 1500여 년 전 서역에서 지혜의 화신 문수보살은 동으로 순례의 길을 가고 있었다. 보살의 가슴에는 동쪽 세상 끝까지 불교를 전파하고자 하는 원력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서역에서 동쪽 끝은 수 만리 길. 그러나 문수보살은 조금도 힘든 기색이 없이 추위와 더위, 밤과 낮이 바뀌는 거대한 대륙을 걷고 또 걸었다. 이렇게 한참을 걷던 보살의 눈에 오대산이 거대한 몸체를 드러냈다. 잠시 쉴 곳이 궁했던 보살은 한달음에 오대산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오대산에 가까울수록 사나워지는 폭풍우와 타는 듯한 더위가 달려들 듯이 다가왔다. 더욱 놀라운 것은 봇짐을 둘러맨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오대산을 떠나는 것이 아닌가. 늙고 병든 노인으로 변장해, 그들에게 먹을 것을 구걸하자, 정신 없이 피난을 떠나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자비의 화신인양 빵과 음식을 내 놓았다. 아름다운 마음씨에 감복한 문수보살은 오대산의 날씨를 바꿔, 이들에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문수보살이 먼저 떠올린 것은 용왕의 청량석을 빌려오는 것이었다. 청량석이 날씨를 변화시키는 효험이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노인으로 변장한 보살은 바다로 들어가 용왕에게 청량석을 빌려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용왕은 “내 그대의 청을 들어주고 싶으나 이 거대한 바위를 옮길 수 없으니 가져갈 수 있으면 그냥 가져가도 된다”고 했다. 용궁의 보물을 주기 싫었던 용왕은 노인이 이 돌을 옮길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용왕의 이런 속내를 모를 리 없었던 문수보살은 주문을 외워 이 거대한 바위를 주먹 크기의 조약돌로 바꿔 주머니에 담고 용궁을 나와 버렸다.

오대산으로 돌아오던 문수보살은 이 청량석을 과연 어디에 둘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런데 남대 정상을 지날 무렵 주머니에 있던 청량석이 갑자기 커지더니 다시 원래의 크기로 변하면서 땅에 떨어졌다. 순간 문수보살은 이 곳이 청량석을 둘 자리라고 판단하고 이 곳에 사찰을 짓게 했다. 이 절이 바로 청량사다. 이후 문수보살은 매년 이 곳 청량사를 찾아 청량석 위에서 대중들을 향해 설법하니 사람들은 이 청량석을 문수보살 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사진설명>수많은 전설을 담고 있는 청량사의 보물 문수보살 바위.

가이드 허홍발 씨의 설명이 끝날 무렵 멀리서 청량사 전경이 들어왔다. 동화 속에 나오는 성처럼 크고 작은 돌들을 쌓아올린 담 위에 서 있는 청량사는 굳이 이 소설 같은 창건 설화가 아닐지라도 신비스럽다. 좀처럼 무너질 것 같지 않은 단단한 외벽에 자주 빛의 전각들이 파란 하늘과 어울려 정갈하면서도 이색적이다.
청량사는 오대산에 있는 사찰 중 비교적 작은 편이다. 천왕문, 대웅전, 관음전을 기준으로 좌우에 지장전과 순치 황제의 영정을 모신 수호신전을 합쳐 모두 5개의 전각으로 구성돼 있다.

천왕문을 지나 대웅전에 이르자 앞서간 순례자들이 피워놓은 향으로 경내 곳곳이 희뿌연 연기로 덮여 있다. 중국의 향은 피워놓으면 가느다란 실타래가 풀리듯 가늘고 긴 연기를 내뿜는 우리의 것과는 달리 이슬에 젖은 낙엽을 태운 듯 희뿌연 연기를 뿜어낸다. 이러니 몇 개의 향만 피워도 금새 경내는 불이 난 듯 흰 연기로 자욱하다.

자욱한 아침 안개를 헤치듯 향 연기를 빠져 나오자 오대산 기후를 변화시켰다는 전설의 청량석이 시야에 나타났다. 이미 가이드로부터 청량석의 전설을 들은 탓이라 거무스레한 색깔의 이 바위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가로 2m, 세로 4m 정도 크기의 청량석은 마치 거북이 등처럼 편안해 보였다. 신비함에 잠겨 청량석 주위를 맴돌자 허 씨는 청량석에 얽힌 또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 줬다. 청량석은 청나라 순치 황제가 불교에 귀의해 삭발 염의 했던 곳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비운의 임금 순치 황제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진설명>파란하늘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청량사 일주문.

순치 황제는 청나라의 2대 황제인 태종이 1643년 갑자기 죽자 6살의 어린 나이로 황위에 올랐다. 그러나 너무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오른지라 모든 실권은 숙부인 예친왕에 의해 이뤄졌고 이렇다보니 청 조정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이런 황실의 분위기와는 달리 순치 황제는 어려서부터 불교경전 읽기를 좋아하고 덕망 높은 스님들로부터 불교에 대해 묻고 공부하는 것을 즐겨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낸 순치 황제는 자신을 둘러싼 끊임없는 권력 싸움이 계속되고, 여기에 사랑하던 후궁 동귀비가 돌연 죽자, 인생의 무상함과 삶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 이런 그에게 유독 마음의 안정을 준 것은 불교였다. 특히 어린 시절 스님들이 해준 석가모니 부처님의 출가 이야기를 떠올리며 불법에 귀의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그는 과감히 황제 자리를 버리고 출가할 것을 결심했다. 이후 순치 황제는 청량사를 찾아 불법에 귀의하고 평생 무소유로 일관하며 생을 마감했다.

허 씨의 계속된 설명을 뒤로하고 불경스럽지만 청량석에 올랐다. 가부좌를 틀고 잠시 눈을 감았다. 청량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청량석의 전설이 현실로 다가오는 듯 뜨거운 태양으로 타 들어간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이국 땅을 찾았던 순례자도 이 곳 청량석에서 순례 여정의 고단함을 달랬으리라. 순간 구법을 위해 목숨 건 순례를 떠났던 그 옛날 구법승들의 고단함이 가슴 밑바닥에서 ‘몰록’ 솟아난다.

글·사진=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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