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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성지 오대산을 가다]⑥ 중대·운강석굴[끝]

기자명 법보신문

1500년 이어 온 자비의 미소 앞에 만물이 합장

<사진설명>운강 석굴에서 외교관 석굴로 불리는 제 20굴의 노천 석불. 한 없이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석불이 온화해 보인다.

중대의 기운이 서늘하게 변해 몸을 휘감는다. 7월의 한 낮이건만 열기는 오간 데 없고 겨울의 문턱에 다가선 듯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이 온몸을 오싹거리게 한다. 해발 3000m. “중대 정상을 오를 때는 체온을 보호할 옷을 준비하라”는 가이드의 조언을 무시한 결과로 몸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잠시 뒤 초록의 융단이 드리워진 구릉과 파란하늘. 초록과 파랑만의 원색으로 연출하는 장대한 중대 정상의 풍경에 몸을 움츠리게 했던 한기(寒氣)는 멀찌감치 밀려난다. 중대에 오르지 않고 오대산을 얘기할 수 없다는 옛말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 사실 오대산 다섯 봉우리 모두 저마다의 특색과 자연 풍경을 자랑하고 있지만 중대는 연꽃 모양의 다섯 봉우리 중심에 자리하고 있어 예사롭지 않은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이를테면 중대가 오대산의 주빈이라고나 할까.

풍경에 취해 한참을 서성거리는 동안 벌써 해가 중턱을 넘어섰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이었지만 우리는 서둘러 다음 목적지인 태화지(太和池)로 향했다. 태화지는 이번 순례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코스. 통도사, 월정사 등 이른바 한국불교 5대 적멸보궁의 창건 배경이 될 뿐 아니라 한국불교 사리신앙의 뿌리가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태화지가 한국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 신라의 구법승 자장 스님이 깨달음과 중생 구제의 서원을 세우고 오대산을 찾게 된 이후부터라고 한다. 문수보살이 화현했다는 오대산에서 지혜를 얻어 돌아가겠다는 발원을 세운 자장 스님은 중대 태화지에서 기도를 시작했다. 간절한 기도가 삼칠일에 이를 무렵, 꿈에 갑자기 한 도인이 나타나 네 구절의 게송을 일러주는 것이 아니가. 꿈에서 깨어난 자장 스님은 전날 도인에게 들은 게송이 생생했지만 범어(梵語)라 도무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고민에 빠져 태화지 주변을 서성거리자 언제 나타났는지 가사와 발우, 부처님 사리를 가진 한 노승이 태화지에서 발을 씻으며 자장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가 고민하는 것이 무엇이요?” 그러자 자장 스님은 지난 밤 자신의 꿈 이야기를 노승에게 전해주며 그 의미를 몰라 그런다고 답했다. 그러자 노승은 자신이 갖고 있던 발우와 가사, 부처님 사리를 건네고는 그 의미를 하나하나 설명했다. 풀리지 않던 고민을 해결한 자장 스님은 뛸 듯이 기뻤다. 이에 스님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 다시 노승에게 시선을 돌리려 하자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순간 자장 스님은 이 노승이 바로 문수보살이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는 노승이 앉아 있던 태화지를 향해 삼배를 올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통도사와 강원도 오대산 등지에 5대 적멸보궁을 세웠다고 한다.

<사진설명>문수보살이 발을 씻었다는 태화지.

자장 스님의 살가운 체취가 남아있는 유적지 태화지. 한국 불자들에겐 이곳이 오대산에서 가장 의미 있는 참배지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중대에서 태화지까지의 여정은 만만치 않다. 비록 5km 내외에 불과하지만 급경사를 깎아 만든 임시도로인지라, 미니버스를 이용할 수 없어 결국 걸어서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행은 자장 스님의 따스한 숨결을 느끼고자 구불구불 험난한 길을 달팽이가 절벽을 오르듯 한발 한발 올라야만 했다. 대략 1시간가량 지났을까. 다리가 퍽퍽해지며 풀려갈 즈음 드디어 태화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태화지에 다가갈수록 일행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과 중국의 불교를 이어주는 특별한 성지라는 말이 무색하게 너무나도 초라한 형색이었기 때문이다. 쓰레기 더미가 곳곳에 널려 마치 쓰레기 처리장을 방불케 하는 곳에 내버려지듯 놓여있는 작은 연못. 문수보살이 발을 씻었다던 맑은 물은 간데없고 더러운 물에 수많은 벌레와 개구리들의 전용 놀이터인양 가득 들어 있었다. 참으로 실망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행들 사이에서 불평과 비탄의 목소리가 새어나온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실망감이 앞섰지만 일행은 문수보살을 모셨다는 법당에 들러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순간 머릿속에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깨끗했던 태화지가 이렇게 변한 것은 무상의 원리에 따른 것이다. 결국 다시 맑은 물로 되돌리는 것도 무상의 원리에 따른 우리의 몫 일터. 삼배를 올린 뒤 우리는 서둘러 태화지를 벗어났다.

<사진설명>운강석굴입구. 세계문화유산인 운강석굴은 언제나 순례객들로 붐빈다.

오대산에서 일정을 마무리한 일행은 운강석굴을 향해 길을 나섰다. 운강석굴은 오대산에서 버스로 달려 4시간이나 떨어진 대동이라는 지역에 있다. 본래 오대산 순례를 목적으로 여정을 떠났던 우리에게는 보너스 코스라고나 할까. 산서성 중심부에서 서북부 지역에 있는 운강석굴은 용문석굴, 둔황의 막고굴과 함께 중국 3대 석굴 중 하나로 동서로 약 1km에 걸쳐 총 53개의 석굴로 구성된 세계 문화유산이다. 규모가 말해주듯 운강 석굴은 총 100여 년에 걸쳐 완성된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의 역사를 가진 문화재이다.

운강 석굴은 북위(386∼535) 시절 담요(曇曜) 스님에 의해 건립됐다. 불교를 배척했던 태무제(太武帝)의 뒤를 이어 북위의 4대 황제에 등극한 문성제(文成帝)는 나라가 급격히 위기에 빠지고 각종 전란으로 몸살을 앓게 되자 지금의 종교장관에 해당하는 사문통(沙門統) 담요 스님에게 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물었다. 이에 담요 스님은 산천에 대규모의 석불을 조성해 부처님의 가피를 구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이후 문성제는 5년(460∼465)에 걸쳐 대규모의 석굴이 조성했는데 이른바 ‘담요 5굴’이라 불리는 제16동에서 제20동까지의 동굴이 이 때 만들어졌다. 문성제의 뒤를 이은 북위의 황제들은 선(先) 황제의 뜻을 이어 계속해서 석불 불사를 이었고 마침내 524년 총 53개의 석굴이 완성됐다.

어눌한 말투지만 역사소설을 이야기해 주듯 정감 있는 허홍발 씨의 설명이 끝날 무렵 우리는 이미 운강 석굴 입구에 도착했다. 때마침 내린 소나기에 하늘은 물론 대기 또한 각질하나 없이 맑기만 해 멀리 거대한 민둥산이 속살을 드러낸다. 폭탄 세례를 맞은 듯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린 모습이 한눈에도 석굴임을 짐작케 한다. 조용히 발길을 옮겨 운강 석굴 내부로 들어섰다. 먼저 일행을 맞은 것은 눈을 의심하리 만큼 거대한 불상.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폼이 너무나 위압적이다. 어두컴컴한 석굴 내부에서 장엄하게 아래를 굽어보는 불상은 거대한 몸체임에도 살아 숨쉬듯 역동적이다. 특히 거대한 몸체에도 불구하고 그 온화한 미소는 참배자들의 시름마저 덜어내는 듯 자비롭다.

벅찬 감동에 간간히 탄성을 쏟아냈지만, 외교관 석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감탄이 너무 빨랐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외교관 석불은 운강 석굴을 대표하는 불상으로 높이 17m, 가로 20m가 넘는 대형 좌불이다. 산에 굴을 파고 그 안에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불상을 조성할 수 있었는지 옛 사람들의 지극한 신심에 절로 가슴이 절절했다. 일행들 사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온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대동 운강석굴을 마지막으로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중국 성지 순례는 끝을 맺었다. 지혜의 상징 문수보살의 자비로운 미소가 잡힐 듯이 묻어나는 옛 모습 그대로의 오대산. 그리고 웅장한 석불을 고스란히 간직한 운강 석굴. 세계 변방으로 밀려 있는 중국 불교를 다시 일깨울 풍경소리이자 죽비가 아닐까. 5박 6일의 짧은 순례 일정에도 불구하고 점차 긴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중국불교의 저력을 보는 것 같아 기쁘기 그지없다.

글·사진=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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