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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논리 탈피가 새 출발의 관건

기자명 문병호
변화하는 것을 기준으로 보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변화하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보면 변하는 것은 또 아무 것도 없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하는 시인의 영탄도 맞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 또한 진리다.

같은 말, 비슷한 표현이라도 경우에 따라 함축하는 의미가 꼭 같지 않다는 것을 유념하면 일견 상반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어긋나는 표현이 실은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종합과 이해가 가능해진다.

이러함에도 세상에는 본질이 아닌 표현의 모순성을 두고 끝없이 시비하거나 다른 차원의 것을 동렬에 놓아 혼돈 속에 갈등을 증폭시키는 일이 흔하다.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가닥이 덜 잡힌 과거사 정리가 그런 사례의 하나다. 따지고 보면 자명한 사리를 외면해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는 상황이다. 쉽게 풀어보자.

일제 강점기의 친일을 합리화할 수 있는가. 안 된다. 친일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그러면 천차만별의 친일행위를 하나의 기준으로 재단하고 처벌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그럼 그런 이유를 내세워 친일청산을 하지 말자고 할 것인가. 그것은 더 옳지 않다.

결론은 자명하다. 친일이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판단을 흔들릴 수 없는 전제로 여러 층위의 갖가지 친일행위를 민족공동체에 끼친 해악의 정도에 따라 구분하고 처벌하는것이 마땅하다.

단 당사자에게 충분한 소명과 반성의 기회를 주고 그것을 가능한 너그러이 참작해 모두가 새출발을 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아무리 합리적 과정을 밟더라도 완전한 합의는 어렵다. 가치관이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철저한 검증과정을 거쳐 공유된 정보를 기초로 다수가 동의하는 결론을 도출해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 결론은 따를 수 밖 에 없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도 제법 이름이 알려진 지식인이라는 사람이 '일제때 어떤 식으로건 친일 안한 사람이 있느냐'고 논점을 흐리고 친일 행적이 기록에 엄연한 언론사가 민족의 대변지 역할만을 해온 듯이 선전하려는 자세는 우리사회의 수준을 낮추어보고 한없이 낮추려는 반역사 행위다. 이제 더 이상 이런 궤변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30여년에 걸친 군사 파쇼집단의 청산도 마찬가지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을 선포하고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이 수립된 다음 군사 구데타는 정당화될 수 없는 규범파괴 행위다.

왕조시절의 모반이나 공화국 체제에서의 구데타나 폭력으로 권력을 탈취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평가는 같지 않다. 그것은 권력의 정당성에 관한 국민적 합의, 곧 헌법의 존재 여부 때문이다. 왕조시절에는 성공하면 왕이다. 그러나 공화국에선 백 번 성공해도 역적이다.

이 간단한 논리를 이해한다면 5.16, 5.17 두건의 군사 구데타는 김영삼 정부의 규정 그대로 군사반란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이 폐지되지 않는 한 시간의 경과와 관계없는 불변의 판단이다. '헌법이 대수냐, 먹고 사는 문제가 급하지'하는 따위의 저급한 논리로 무시될 수 있는 수준의 규범이라면 이미 헌법이 아니다.

노무현 정권의 출범, 불교종단의 새 총무원장 체제, 각 분야의 세대교체 등 일련의 변화는 역사의 흐름이 바뀌는 같은 맥락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변화의 핵심 메시지는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의 종합이며 새출발이다. 그것은 당연히 단절과 계승의 선택을 필요로 한다.

과거의 논리와 명쾌히 절연하면서 바람직한 유산을 제대로 이어받아야 한다. 흑아니면 백이라는 단순논리의 함정에 더 이상 빠지지 말자. 그것이 과거의 족쇄에서 풀려나는 길이다.



문병호<중앙일보 J&P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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