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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이들의 따뜻한 언덕 [br]정토마을 이사장 능 행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죽음은 삶의 축소판
연꽃처럼 살아야
마지막 순간도 맑죠

‘사생의 어버이이신 거룩한 부처님께 간절히 비옵니다. 저의 말 한 마디, 저의 작은 움직임 하나, 저의 어설픈 사랑 한 움큼마저도, 그분들에게 생명의 감로수가 되게 하시고, 그늘진 마음에 따사로운 햇살 되게 하시고, 내 작은 가슴 그들에게 따뜻한 언덕이 되게 하소서.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과 슬픔,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방황하는 그들의 마음속에 당신의 자비가 깃들게 하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능행 스님의 기도소리가 정토마을의 정적을 깨운다. 교계 유일의 독립형 호스피스 시설 정토마을은 더 이상 생명을 이어갈 수 없다고 선고받은 사람들이 모여 마지막을 준비하는 곳으로 늘 스님의 기도로 하루가 시작된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새로운 생을 시작하는 자비의 도량인 이곳에서 능행 스님은 죽음의 절망과 맞선 사람들에게 희망과 마음의 평화를 주고 있다. 능행 스님은 지금까지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와 가족들을 돌보며 1000명이 넘는 이들을 아미타부처님이 계신 극락세계로 인도했다.

“준비 없는 죽음 앞에 선 사람들, 절규하며 고통과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 불교가 이러한 세상의 고통과 함께할 때 비로소 ‘자비’란 두 글자가 온전히 그 가치를 발휘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불교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진정으로 살아 움직이는 길이요, 종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

출가 전 스님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불교에 관해 무지에 가깝던 스님은 어느날 법정 스님이 지은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한 권의 책을 읽고 출가를 결심했다. 무조건 스님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계룡산 학림사를 찾아 발길을 옮겼다.

그런 스님이 죽음과 인연을 맺은 것은 14년 전 암에 걸린 한 보살의 남편을 병문안하러 가면서였다. 처음 방문한 병원은 온통 두려움뿐이었다. 링거를 꼽고, 콧줄을 달고, 마스크를 쓰고, 주사바늘이 온몸에 꽂혀있고…. 이들의 모습이 한없이 낯설고 무섭기마저 했다.

“처음에는 마치 병실 안이 스님들로 가득한 것 같았습니다.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모두 빠진 것을 제가 오해한 거지요. 사람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님이 왔다’는 말은 금세 병원에 퍼졌고 스님 주위로 앙상한 뼈만 남은 병자와, 가족들이 모여들었다. 단지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우리 아들의 손 한번만 잡아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마치 목련존자가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던진 밧줄에 중생들이 달려드는 것처럼 복도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날 스님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고통에 일그러진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며칠 후 거사님이 돌아가신 후 장례식장에서 환자를 돌보는 한 수녀님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스님은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들었다. 병원에서 봉사하는 스님이 한분도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큰 병원에, 대한민국에 스님들이 얼마나 많은데 한명도 없단 말인가.’

스님이 고통 받는 중생과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것도 그 때다. 그리고 당장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의료원 행려병동은 돌볼 가족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가장 많다는 곳이다. 스님의 만행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6년간 부산의료원을 비롯해 소록도, 음성 꽃동네 등지에서 수행삼아 자원봉사를 했다.

“『증일아함경』에는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천상에서나 인간세계에서 병든 사람을 돌보는 것보다 더 훌륭한 베풂을 보지 못했다. 설사 나에게 공양하거나 과거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더라도 나에게 베푼 복덕은 병든 사람을 돌본 것과 다름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호스피스를 불교 교리 차원에서 살펴본다면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대승 이념에 바탕을 둔 보살행의 꽃일 아닐까요.”

능행 스님이라고 이 일을 하며 갈등이 없었을까. 다른 스님네들처럼 강원에서 선원에서 공부도 하고 싶었다. 자신과 함께 환자들을 돌보다가도 홀연히 바랑을 짊어지고 선방을 찾아 떠나는 도반들의 모습을 볼 때면 부러워 눈물이 나기도 했다. 실제 벗어나려 여러 번 마음을 굳히기도 했지만 막상 마지막 순간마다 벗어날 수가 없었다. 마치 ‘죽음’이라는 진흙탕 속에 갇혀버린 것 같았다.

‘나올 수 있는 것도, 나와지는 것도 아니라면 더 깊이 빠져들자. 진흙탕에 빠졌다면 연꽃을 피우자. 진흙탕이 무엇인가. 세상에서 가장 낮고 습한 곳이다. 이런 곳에서만 연꽃이 피어난다고 하지 않았는가.’

한 생각 바꾸니 그토록 갈망하던 수행과 이 수행이 둘이 아님을 알게 됐다. 또 이 수행이 더없이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1999년 능행 스님은 교계 최초의 전문 호스피스 요양시설 정토마을을 충북 청원군 문의면에 개원했다. 평생을 선객으로 살아오셨던 한 스님이 마땅한 거처를 찾지 못해 결국 머리맡에 십자가가 걸려있는 이웃 종교의 병원에서 입적하신 것이 계기가 됐다.

“시님! 나는 이렇게 십자가 아래 누워 죽지만, 우리 시님들 늙거나 병들면 편히 죽을 수 있는 병원 하나 지어주소. 시님은 할 수 있어요. 내가 죽어서라도 도와줄게.”

능행 스님에게 남긴 이 간절한 유언으로 건립된 정토마을은 현재 15개의 병상을 갖추고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무료로 운영되고 있다. 또 최근에는 이곳의 이야기들을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라는 한권의 책으로 엮어 화제가 되고 있다.

<사진설명>능행 스님은 사회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 존중받아야할 마지막 삶을 고통 속에 지내고 있는 말기 환자들을 위한 공간인 관자재병원 부지를 10월 5일 마련했다. 능행 스님은 암 투병중에도 병원설립을 위한 1000일 기도를 회향한 성오 스님에게 눈물로 감사를 전하고 있다.

현재 능행 스님은 또 다른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6년간 그토록 갈망하던 관자재병원 설립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10월 5일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에 8000평 부지를 마련한 능행 스님은 내년 5월 이곳을 말기 환자들을 위한 무료공간으로 개방할 계획이다.

능행 스님은 “누구나 관심을 가질 수 있지만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 바로 호스피스라고 말하는데, 이를 수행으로 받아들인다면 참으로 멋진 수행자가 되는 것”이라며 “호스피스는 시대적으로 반드시 요구되는 역할이며, 불교 수행적 차원에서 호스피스는 대승불교의 핵심적 보살행 중 하나”라고 강조한다.

“죽음은 한 사람이 지금껏 살아온 모습을 압축해 보여줍니다. 이런 죽음을 잊지 않는다면 삶은 저절로 아름다워집니다. 호스피스를 통해 보리심(菩提心)을 발하고 보리원(菩提願)을 세워 보리행(菩提行)을 닦아나가는 일에 많은 불교인들이 함께 하기를 손 모아 발원합니다.”

청원=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관자재병원 건립 후원계좌
농협 401131-51-075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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