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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롱불 아래서 밤새 경 읽던[br]그 때 그 시절 지금도 그리워

기자명 법보신문

봉녕사 승가대학장 묘 엄 스님

어제-오늘 햇빛 같으니
새해는 처음부터 없어
유위-무위 세계 허물 때
걸림없는 삶 향유

60여년 체득한 法
길 떠난 후학의 등불
간절함 상실하면
나태함만 낳아


<사진설명>묘엄 스님은 화엄경에 담긴 ‘믿음이 도의원천’이라는 말을 전하며 “나태함을 버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정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느 날 청담 스님이 속가 딸인 묘엄 스님에게 물었다.
“니, 중 된 거 후회 안 하나?”
“예, 스님. 후회 안 합니다.”
“그라믄 끝까지 중노릇 잘 할 자신 있나?”
“예, 스님.”
“그럼 됐다.”
스님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빙긋이 웃었다.

수원 광교산 중턱에 자리 잡은 봉녕사에서 묘엄 스님을 만나 독자를 위한 새해 덕담을 청하자 스님은 미소부터 지어 보이셨다. 순간, 묘엄 스님의 구도여정을 담은『회색 고무신』(시공사, 윤청광 엮음) 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혹, 지금의 미소는 청담 스님이 묘엄 스님에게 보인 그 미소가 아닐까! 수행이 익은 스님에게서나 느껴볼 수 있는 특유의 부드러움과 인자함이었다. 굳이 부드러운 말 하나가 아니어도 직감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향기로운 훈훈함이 전해져왔다.

“새 해란 없습니다. 오늘 햇빛과 내일 햇빛이 다르지 않을 진데 어찌 새해가 지난 해와 다르겠습니까?”

나지막한 속삭임이었지만 단호한 일갈 속엔 당찬 기운이 배어 있었다. 대선사가 법석에서 탁자에다 주장자를 ‘쾅’ 내려치는 그런 선기가 느껴졌다. 한 찰나와 다음 한 찰나 사이에 무궁무진한 변화가 있다 하지만 한 해와 다른 한 해가 다르지 않음을 스님은 전하는 듯 했다.

“유위의 세계와 무위의 세계가 있다 하지요? 이 분별은 발심한 사람을 위해 한 말일 뿐입니다. 간단한 예로, 흔히 정신은 무위, 육체는 유위라 하지만 정신 없는 육체 없고, 육체 없는 정신 또한 없습니다. 유위무위의 경계를 허물고 그 두 세계의 중간에서 서서 걸림 없는 삶을 향유해야 합니다. 대나무 속이 비었다 하지만 그 속엔 마디가 있습니다. 바로, 그 마디로 인해 텅 빈 대나무는 힘차게 하늘을 향해 뻗을 수 있습니다.”

텅 빈 대나무가 그토록 올곧게 자랄 수 있는 연유를 마디에서 찾는 스님의 선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분명 참선 수행을 하지 않고는 보기 어려운 혜안이었다. 운문사에서 4년 동안 학인을 가르치던 스님이 참선 수행을 위해 봉녕사로 발길을 돌린 연유와 무관하지 않을 듯 했다.

“학인들과 함께 강론을 하며 나름대로 이론은 정립했지만 어느 순간 되돌아보니 내 소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그저 경을 전하는데 급급했지 내 몸으로 체득해 전한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던 겁니다. 팔만대장경은 부처님이 설한 비유의 바다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 비유 속에는 중생이 이해하기 쉽도록 한 부처님의 배려가 스며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배려는 확고한 신념과 논지 없이는 베풀 수 없는 것입니다. 저도 스스로 무엇이 부족한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로 참선 수행이었습니다.”

30여명의 스님들과 함께 운문사를 떠난 묘엄 스님은 우여곡절 끝에 1971년 약사전과 요사채 한 동만이 자리한 봉녕사에 정착했다. 수행에만 정진 했던 스님은 또 한 번 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모든 것을 잠시 접고 참선에만 몰두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질 않고 다시 강단에 서야 했기 때문이다.

“저야 제 길 찾는다고 좌복 위에 앉아있으니 괜찮지만 후학들은 어쩌겠습니까? 제가 가르치지 않으면 다른 산사로 보내야 하는데 그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묘엄 스님은 참선과 함께 강의와 사찰 불사를 함께 진행 해야만 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산사 주변의 논밭을 매립해 선방을 만들고 강당을 지어 지금은 108평의 웅장한 대웅전과 함께 건평 300여 평이 넘는 대형 건물만도 4개나 된다. 그 중에서도 지난 1999년 6월 개원한 세계 최초의 비구니 율원인 금강율원은 계율에 대한 묘엄 스님의 원력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계란 육신을 위한 결계입니다. 대승과 소승권에서의 계율에 대한 이해도는 다르지만 그 근본 의미는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부처님이 말씀하신 계율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주장과 현대에 맞게 다시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는데 두 주장 모두 설득력이 없다고 봅니다. 계율은 고치고 말 것이 없습니다. 각국의 여건에 따라 취하면 되는 것입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세부 계목을 지키고 안 지키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의미입니다.”

‘가죽신을 신어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남방불교처럼 밑창이 얇은 신발을 신고는 사막에서 버틸 수 없기에 부처님은 신을 ‘몇 켤레 더 겹 신어도 된다’고 하셨다. 스님은 “부처님은 절대 사람을 코너로 몰아치지 않았다.”며 “지계정신 고양을 위한 풍토조성에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할 때”라고 강조한다.

올해부터 대한불교진흥원 주최로 청정지계운동을 전개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자 스님은 “재가권에서 지계실천 운동을 펼친다면 큰 호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며 “자신을 진실되게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보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스님이 계율과 반조를 연관지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강의하던 중 어느 한 학인이 스님에게 “이 더운 여름날 수행하는데 모기가 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스님은 “그것은 나한테 물을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라고 답했다.

“부처님이 살생하지 말라 한 것은 생명을 중시 하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비록 수행중이지만 그 작은 모기 한 마리 ‘탁’ 죽이면 피 흘리는데 얼마나 잔인합니까? 내 피 한 방울 아까워서, 수행에 잠시 방해가 된다고 해서 ‘이 놈의 모기’하고 죽이는 그 순간 자신은 어떤 상태에 머무른 것입니까? 결국 그 모기 한 마리 어떻게 할 것인지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부처님의 생명존중 정신을 몰라서 모기를 잡겠습니까? 실천과 반조는 도반과 다름 없습니다.”

봉녕사에는 도서관 내에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언제 어느 시간에든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다.

묘엄 스님이 젊은 시절 경학에 매진할 때는 전기불이 없었다. 초 한 자루도 구하기 어려워 촛농도 탁발해 와야 했다. 헤어진 이불 속에서 실과 솜을 꺼내 심지를 만들어 촛농 사이에 심어 불을 밝혔다. 일종의 호롱불인 셈이다. 그 호롱불 아래서 밤새 책을 읽다 보면 얼굴과 콧구멍이 새까맣게 그을렸던 시절.

“불이 그리 밝지 않으니 도반들은 모두 불 가까이 얼굴을 대고 경을 보았지요. 까닥 잘 못 하다가 눈썹 태울 뻔한 일도 많았지... 그러다 새벽녘 도반들은 서로 얼굴을 보며 배꼽을 잡고 웃었어요. 그쯤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가 새벽별을 말없이 보고 또 보고…”

산사의 엄격한 규범이 오히려 공부하는데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일정 시간이 되어서 모두 잠에 들어야 하지만 문득 강의를 통해 들은 경 한 구절이 생각나 다시 경을 펴보고 싶을 때가 분명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는 ‘내일 보면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바로 경전을 펴 밤을 지새우더라도 부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단체 규범 때문에 이를 놓친다면 그만한 큰 허사가 없다는 것이다. 도서관 내의 ‘자유 공간’도 묘엄 스님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후학들을 향해 일침을 놓았다. 총명한 인재는 많을지 몰라도 지혜로운 인재는 찾기 힘들다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 연유를 스님은 ‘간절함’에서 찾았다.

“간절함은 참선에서도 누누이 강조합니다만 그 간절함은 승가의 모든 분야에서도 필요합니다. 간절함이 없으면 편리함을 좇고, 편리를 추구하면 나태를 낳습니다. 나태한 사람은 선(禪)도, 교(敎)도, 포교도 할 수 없습니다. 이론만 알고 실천 없는 사람은 아무런 소용없습니다. 실천 없는 사람은 승가든 재가든 일반 세속에서든 인정받지 못 합니다.”

스님은 재가불자들에게도 이 한마디를 전했다. “화엄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믿음이 도원 원천이요, 공덕의 어머니다.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源功德母)를 항상 유념하며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출가한 묘엄 스님은 이제 세납 70을 넘어섰다. 60여 년의 구도길에서 홀로 체득한 법을 스님은 후학들에게 전하고 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다시 걸으려는 사람들의 등불이 되어주고 있는 것이다.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묘엄 스님은

1931년 진주에서 태어난 스님은 1945년 조계종 종정을 역임했던 성철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자운 스님으로부터 사미니 율의, 범망경, 비구니계율 등을 수학하고 1956년 동학사에서 사교과를 수료한 후 경봉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아 최초의 비구니 강사가 되었다.

1958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한 스님은 1966년 청도 운문사에서 처음으로 강원을 개설, 강주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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