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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이차돈

기자명 법보신문

“말세의 법 만난다면 또다시 순교하리라”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된 지 1700여 년. 그 동안 불교는 한민족의 숨결이 되고 핏줄이 되어 고원한 정신문화의 새 영역을 활짝 열어젖혔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생활, 문화 전반의 근간으로 여전히 펄떡이며 숨쉬고 있다. 역사가 민중이라는 거대한 물줄기에 의해 흘러간다면 그 물줄기의 방향을 트는 것은 선각자다. 오랜 세월 불교가 이 땅의 중생들에게 빛이 되고 희망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숱한 불교 선각자들의 피와 눈물과 법을 위해 몸을 돌보지 않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시간과 공간이라는 장벽을 훌쩍 넘어 불꽃같은 치열함으로 살아갔던 그들을 만나보자. 편집자

박고슴도치가 내이름
당시 왕실-백성들 중
불교신자 많아

내 죽음 정치쇼 아니다
기적 믿음의 여부는
시대의 자화상일 뿐


번득이는 칼날이 그의 하얀 목덜미를 스쳤다. 순간 미소를 머금던 그의 머리는 하늘 높이 솟구쳤고 목에서는 흰 젖 같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올랐다. 천지도 비통해 함일까. 태양은 빛을 잃었고 땅은 진동했으며, 회오리바람에 비가 흩뿌리듯 꽃잎이 드넓은 하늘을 가득 뒤덮었다.

527년 8월 5일, 스물 두 살의 청년 이차돈(異次頓)은 투명한 꽃처럼 그렇게 스러져갔다. 자신의 몸을 태워 빛을 일으키는 한 자루 초 인양 그는 자신의 육신을 기꺼이 버림으로써 찬연한 신라불교의 불꽃을 지폈던 것이다.

이차돈은 본래 성은 박 씨이고 이름은 염촉(厭 骨+蜀)이다. 할아버지가 습보갈문왕의 후예라고 전한다. 이차돈은 어려서부터 성질이 대쪽 같아 사람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으며 일찍부터 불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따르고자 했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아도 등 스님의 노력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국법으로 불교를 믿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에 이차돈의 한탄과 시름도 깊어져만 갔다. 당시 왕이었던 법흥왕도 백성들이 참다운 행복에 이를 수 있는 진리를 전하고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국운의 번영도 꾀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왕권이 약하고 상대적으로 신권(臣權)이 강하던 당시에 신하들이 반발은 자못 거셌다. 이에 법흥왕의 뜻을 헤아린 이차돈은 거짓 명을 전한 죄를 내려 자신의 머리를 베면 만인이 왕의 명에 따를 것이라고 했다. 처음 왕은 한사코 반대했으나 이차돈의 금강석 같은 결심 앞에 마침내 그의 뜻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마침내 천경림에 절을 짓기 시작한다는 소문이 돌자 신하들은 크게 흥분해 법흥왕에게 집단으로 항의했다. 이에 왕은 피눈물을 삼키고 국령을 어긴 이차돈의 목을 베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차돈은 참으로 의연했다. “부처님이 신령하시다면 내가 죽은 뒤 이적이 일어날 것”이라며 하늘을 향해 기도하고 당당하게 칼날 앞에 나섰던 것이다.

▷죽음이 두려웠을 텐데 왜 순교하기로 결심했나?
“이 한 몸으로 신라 땅에 불법이 햇살처럼 번졌으면 하는 간절함이 두려움을 넘어섰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또 번번이 신하들의 저항에 부딪히던 대왕께 조금은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신라 최초의 순교자 맞나?
“신라인으로서는 최초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보다 훨씬 이전에 고구려의 정방(正方) 스님이 오셨다가 순교하셨으며, 멸구자(滅垢)라는 스님도 죽임을 당하셨다. 이 분들 외에도 변경 부근에서 숱한 스님들께서 순교하셨다. 그 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어찌 내가 불교를 알았겠는가. 신라인으로서 처음이라는 사실은 전혀 중요치 않다.”

▷진짜 이름이 따로 있다던데?
“이차돈도 이름이지만 『해동고승전』에 나와 있듯 박염촉(朴厭 骨+蜀)이 가장 많이 불리던 내 이름이다. 신라 말로는 ‘잊’, 요즘말로 풀면 고슴도치라는 뜻이다. 박고슴도치. 그런데 내 이름을 풀이해 고슴도치처럼 머리가 짧은 다른 나라의 포교승이라고 단정하는 견해도 있는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불법을 알리는 게 목적이라면 굳이 겉모습을 신라인과 다르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방 스님과 멸구자 스님의 이름과 확연히 다른 데에서 알 수 있듯 고슴도치는 신라의 평범한 이름이었다.”

▷어떻게 불교와 인연이 되었나?
“앞서 언급했듯 이미 100여년 전 눌지왕 때 묵호자 스님이 신라에 오셨었고 고구려 접경지역에는 불자들도 많았다. 일선군의 모례(毛禮) 거사님도 그런 분이다. 공인만 되지 않았을 뿐이지 신라에 불교의 가르침은 이미 상당히 전해진 상태였다.”

▷법흥왕은 후대의 기록과는 달리 불교를 탄압했던 걸로 알려져 있는데?
“처음 대왕께서는 불교에 별로 관심이 없으셨고 그 시선도 곱지 않으셨다. 그러나 왕실에는 이미 불교가 뿌리 내리고 있었다. 특히 제18대 실성왕(實聖王)께서는 광개토대왕 2년(392)부터 11년(401)년까지 고구려에 인질로 가셨었다. 이 때 고구려 불교의 성세를 본 왕께서는 깊은 관심을 가지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죽기 수십 년 전부터 후비나 귀족층 여성들 상당수는 불교신자였고 스님까지 궐내에 있었음을 역사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법흥왕이 당숙이라던데 맞나?
“9세기 초 일념 스님은 내가 습보갈문왕의 손자라고 했다. 그러면 내가 박 씨가 아니라 김 씨여야 한다. 또 일연 스님에 따르면 나는 박 씨고 『삼국유사』에 인용된 김용행의 ‘아도비’에 의하면 나는 석 씨가 된다. 어느게 맞는다고 보나? 후대에 바뀐 것이다. 각훈 스님의 『해동고승전』에 나오듯 나는 왕의 뒷바라지를 하는 사인(舍人) 박염촉일 뿐이다.”

▷2005년 9월 2일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이차돈의 순교는 정치쇼였나?’라는 제목으로 이차돈의 순교를 불교 수용을 통해 왕권 강화를 모색했던 법흥왕과 이차돈의 정치적 밀약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를 어떻게 보는가?
“당시 신라는 왕께서 절 하나도 마음대로 짓지 못할 만큼 귀족의 힘이 막강했다. 신라사회는 공동체적 집단지도체계인 6부 연맹체로 운영됐고 6부의 동의를 얻어 국정을 운영해야 했다. 또 귀족세력은 내부에 군사를 둘 정도로 막강한 자치력을 가지는 등 독자체제를 이뤘다. 이런 이유로 그렇게 본 것 같은데 앞서 얘기했듯 나는 대왕과 친척이 아니고 단지 신하일 뿐이다. 또 대왕께서는 내가 죽던 해 이미 당시 양나라의 무제처럼 출가의 의지를 밝혔으며, 훗날 모든 살생을 금하라는 명을 내리시기도 했다. 특히 만년에는 정말 출가하시어 법공이라는 비구스님이 되셨다.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해서 내 죽음을 단순히 대왕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폄하하는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대왕께서 왕좌를 버리고 출가의 길을 걸은 것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꽃비가 내리고 흰 젖이 솟았다는데 진실인가? 이차돈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학설도 나오고 있다.
“소위 비과학적이고 합리적이지 않다고 해서 모두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신이(神異)한 일이 일어났다고 믿었던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의 자화상이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 또한 이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일 뿐이다.”

▷당신의 순교에 대한 얘기는 20세기 이후에도 이광수에 의해 소설로 쓰였으며, 무용과 연극, 드라마까지도 나오고 있다. 꾸준한 인기의 비결은?
“돈과 명예, 욕망이 번들거리는 세상에서 진리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듯싶다. 그러나 부끄럽다. 그렇지만 나를 미화해서라도 그걸 계기로 업과 탐욕의 구덩이에서 벗어나 진리의 길을 걷겠다는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다.”

▷지금 다시 그 시대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부처님께서 전생에 인욕선인으로 계실 때 정법을 위해 가리왕에게 귀와 코와 사지를 잘리는 수난을 당하셨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생을 거쳐 고난을 겪으시면서 인욕행을 성취하셨던 부처님을 떠올리면 부끄럽고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난다. 죽음이 최선은 아니지만 그것이 내 길이라면 또 다시 선택의 여지란 없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삼국사기』, 『삼국유사』, 윤일선 편 『성자 이차돈』(1976), 심재열 『성 아도화상과 이차돈』(1983), 문경현 「순교성인 이차돈고좦(1990), 신종원 「신라 불교공인의 실상」(1993), 이봉춘 「흥륜사와 이차돈의 순교」(2002), KBS역사스페셜 2004년 9월2일 방영분 등




이차돈 어록

<사진설명>이차돈 순교비(경주박물관 소장)

“나라를 위하여 몸을 죽임은 신하의 큰 절개이오며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침은 백성의 바른 의리입니다.”『삼국유사』

“모든 것 중에서 버리기 어려운 것이 제 목숨보다 더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저녁에 죽어 아침에 큰 가르침(불교)이 행해진다면 불일(佛日)이 다시 중천에 오르고 성주가 길이 편안할 것입니다.”『삼국유사』

“나는 불법을 위해 형을 받기로 하였는데 만약 부처님이 신령하시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이적이 일어날 것이다.”『삼국사기』


후대의 찬탄

‘임을 찾아 남행천리 왔건만/ 아득한 청산만 쓸쓸히 바라보며/ 지내기 몇 해던가./ 만약 말세에 법을 행하기 어려운 때 만나면/ 나또한 임을 따라 목숨 바치리.’
(고려 의천 이차돈 묘소 참배시)

‘하늘꽃 흰 젖은 더욱 다정하다/ 칼날이 한 번 번쩍 몸을 마친 뒤로/ 절마다 종소리 서라벌 흔든다’
(고려 일연의 염촉 찬)

‘만일에 저 하늘에 핏줄이 있다면/ 당신의 핏줄만큼 거룩하리까?/ 영원한 부처님 마음 맥박을 이은/ 당신을 찬양하여 빛이 됩니다. 꽃다히 새로 사는 빛이 됩니다./
거룩해라 그 몸 죽여 영원히 사시는/ 우리 성사 이차돈 거룩하셔라.
만일에 이 땅에서 젖이 난다면/ 당신 피의 젖만큼 인자하리까?/ 뭇생명을 바로 하는 영혼의 젖/ 마시고 또 마시어 힘이 됩니다./ 영원히 안 끝나는 힘이 됩니다.’
(서정주 ‘이차돈 성사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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