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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건너 지엄(智儼) 문하로-1

기자명 법보신문

중국 화엄종장이 인정한 신라의 ‘마니보주’

625년 신라 귀족 김한신의 아들로 탄생
38세에 入唐…종남산에서 지엄과 조우


<사진설명>일본의 고산사(高山寺)에 묘오에(明惠)가 1206년경 원효의 진영과 함께 봉안했던 의상의 진영. 지금도 고산사에는 원효와 의상의 영정이 전한다.

의상(義相)은 진평왕 47년(625)에 귀족 김한신(金韓信)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어났고, 성장하면서 구도적 천성이 역연했던 의상은 나이 19세에 왕경에 있는 황복사에서 출가했다. 그는 8년 연상인 원효와 만나 함께 구도의 세월을 보내지만, 그의 가계나 스승, 그리고 국내에서의 수행 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이 무렵 구도의 열정에 불타던 신라의 젊은 구도자들은 중국으로의 유학을 꿈꾸었고, 그 중에서도 더욱 용감한 젊은이는 머나먼 천축을 향하기도 하였다. 의상은 도반 원효와 함께 서쪽 중국으로의 유학길에 올랐다. 이들은 입당구법을 두 차례 시도했다.

1차의 입당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와 함께 요동으로 갔다가, 변방의 순라군이 정탐자로 잡아 가둔 지 수십일 만에 간신히 빠져 나와 돌아왔다고 했다. 의상의 나이 26세 때인 진덕여왕 4년(650)의 일이다. 이 무렵 한반도는 삼국이 서로 대결하며 긴장이 고조되어 있었다. 해동화엄초조기신원문(海東華嚴初祖忌晨願文)에는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예맥(濊貊)의 도적들이 횃불을 들고 야경(夜警)을 단단히 하여 구도(求道)의 도정(途程)으로 말하건 대 움직이기만 하면 가시덤불이었다. 그러나 이미 산을 만들겠다는[爲山] 뜻이 간절한지라 홀로 배 수(背水)의 마음을 품어 어렵고 위험한 것을 꺼리지 않은 채 멀리 호랑(虎狼)의 나라로 건너갔다. 능히 상해(傷害)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어찌 양차(羊車)와 녹차(鹿車)에만 의지하겠는가? 곧 장 바다에 떠서 높이 피안(彼岸)에 올랐던 것이다.

예맥은 고구려를 지칭한 것으로, 이 글은 1차 구법의 어려움과 위험스러움을 잘 묘사하고 있다. 신라에서 당나라에 이르는 길은 흔히 뱃길이 이용되었고, 고구려와 당의 국경지대인 요동을 통과하는 루트도 있었는데, 요동은 중국 대륙과 우리나라 교통의 요지였다. 그리고 7세기 중엽의 요동은 고구려의 영토로 당의 침략을 방어하는 요충지였다. 특히 의상이 입당을 시도했던 650년경의 요동은 당의 침략으로 긴장이 고조되어 있었기에 변경의 수비군에게 정탐자로 오인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겨우 목숨을 건져 신라로 돌아왔던 두 젊은 구도자는 10년 세월이 지나도 구법의 꿈을 접지 못했다. 문무왕 원년(661), 의상과 원효는 또 다시 구법의 길에 올랐다. 동아시아가 전쟁으로 소란하고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무너졌던 그 풍진의 시절도 이들의 열정을 꺾지는 못했다. 그러나 의상이 원효와 함께 2차로 시도했던 입당도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배를 타기 위해서 항구로 가던 도중에 심한 폭우를 만나 고분에서 피했는데, 이때 오도(悟道)를 체험한 선배 원효는 입당을 포기하고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좬송고승전좭중의 의상전에 전한다.

본국 신라의 해문(海門)이자 당의 주계(州界)에 도착, 장차 큰 배를 구해서 창파를 건너려고 했다. 중도에서 심한 폭우를 만났다. 이에 길옆의 토감(土龕), 즉 토굴 사이에 몸을 숨겨 회오리바람과 습기를 피했다. 다음날 날이 밝아 바라보니 그곳은 해골이 있는 옛 무덤이었다. 하늘에서는 궂은 비가 계속 내리고 땅은 질척해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또 무덤 속에서 머물렀 다. 밤이 깊기 전에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 놀라게 했다. 원효법사는 탄식하여 말했다. “전날 밤에는 토굴에서 잤음에 편안하더니 오늘밤은 귀신 굴에 의탁함에 근심이 많구나. 알겠도다. 마음이 생김에 갖가지 것들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감과 고분이 둘이 아닌 것을. 또한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이요 마음이 오직 인식임을.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어찌 따로 구하랴. 나는 당나라에 들어 가지 않겠소.” 이에 원효는 바랑을 메고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홀로 남은 의상은 죽어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마침 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빌려 타고 등주(登州)에 도달할 수 있었다. 물론 『삼국유사』에서는 의상이 입당한 지역을 양주(揚州)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문제가 된다.

신라에서 당나라에 이르는 해로에 유의하거나 훗날 적산 법화원(法花院)이 세워진 위치 등을 참조할 때 의상이 당나라에 도착한 곳도 지금의 산동성에 속해 있던 등주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등주의 해안에 도달한 의상은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이 관아에 유숙하도록 청했는데, 공양이 풍성했다. 그 집에는 선묘(善妙)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의상의 용모가 뛰어남을 본 그 소녀가 아양을 떨면서 유혹했다. 그러나 의상의 마음은 돌과 같아서 바꿀 수가 없었다. 응답이 없자 소녀는 갑자기 도심(道心)을 발해, 의상 앞에서 크나큰 원을 말했다.

세세생생토록 화상(和尙)에게 귀의하여 대승을 익히고 배우며, 큰일을 성취하겠습니다. 제자는 반드 시 단월(檀越)이 되어 필요한 생활 용품을 공급하겠습니다.

의상은 구법의 굳은 의지를 단단히 다지면서 장안(長安)을 향하여 다시 길을 떠났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은 당시에 번성하던 도시였다. 그리고 장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종남산(終南山) 이 있었는데, 의상은 이 산의 지상사(至相寺)로 가서 지엄(智儼)(602∼668)의 제자가 되었다.

최치원에 의하면, 의상이 지상사에 도달한 때는 용삭(龍朔) 2년(662)이라고 한다. 신라 경주로부터 당나라 장안에 이르는 먼 여정과 더불어 종남산에 이르기 전에 몇 곳을 방문하거나 머물렀을 가능성에 유의하면, 661년 입당했다는 설과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의상과 지엄의 만남에 대해서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의상은 조금 후에 종남산 지상사를 찾아가서 지엄을 뵈었다. 지엄은 그 전날 밤에 꿈을 꾸었다. 하나의 큰 나무가 해동(海東)에서 나서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 중국으로 와서 덮었다. 그 위에 봉의 집이 있기에 올라가서 보니, 마니보주(摩尼寶珠)가 있어서 광명이 멀리 비치고 있었다. 꿈을 깬 뒤에 놀랍고도 이상스러워 소제하고 기다렸는데 의상이 왔다. 특별한 예로 맞아서 조용히 이르기를, “나의 어젯밤 꿈은 그대가 나에게 올 징조였구나”라고 하면서, 입실(入室)을 허락했다. 의상은 화엄(華嚴)의 미묘한 뜻을 은미(隱微)한 부분까지 분석했다. 지엄은 영질 ( 質) 만난 것을 기뻐하며 새로운 이치를 발굴해 내었다. 이야말로 깊은 곳을 파고 숨은 것을 찾아서 남천(藍)이 본색을 잃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지엄에게는 혜효(慧曉), 박진(薄塵), 회제(懷齊), 도성(道成), 혜초(慧招), 번현지(樊玄智), 의상(義相), 법장(法藏) 등의 제자가 있었다.

의상이 그의 문하에 이르렀을 때, 지엄은 이미 61세의 고령이었고 의상은 38세였다. 그리고 법장은 겨우 20세로 출가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지엄이 의상을 만나기 전날 밤에 꾼 꿈의 내용은 의상의 그릇과 인품, 그리고 학덕을 큰 나무, 혹은 광명을 발하는 마니보주 등으로 상징한 것 같다. 신라에서 자란 큰 나무의 가지와 잎이 중국을 덮었다고 하여 의상을 더욱 뛰어난 고승으로 윤색하고 있음도 주목할 만하다.

지엄은 의상을 만난 것을 기뻐하면서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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