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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원광법사

기자명 법보신문

“내 성불 늦추더라도 중생과 더불어 나아가리라”

세속오계는
전란속 실천 가능한
부득이한 방편

점찰 법회로
힘겨운 백성들에게
희망 심고 싶었다


이차돈 성사의 순교 이후 신라에 대가람 황룡사 창건 불사가 진행되고 국가차원의 불교행사가 잇따르던 진흥왕 28년(567). 열세 살 소년 원광(圓光, 542~630)은 긴 머리를 삭둑 자르고 불문에 귀의했다. 어려서부터 도교와 유교의 경전을 두루 섭렵했던 소년은 목마른 대지가 단비를 들이키듯 불교사상에 깊이 매료되어 갔다. 그러던 원광은 서른 살 때 경주 안강 삼기산에 금곡사를 창건해 그곳에서 6년 동안 생사를 건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그러나 원광의 구도열정은 그로 하여금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도록 했고, 마침내 험한 산과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향하게 했다. 진평왕 11년(589) 진나라로 건너간 원광에게 중국불교는 거대한 산맥이자 망망대해였다. 공인된 지 반세기에 불과한 신라불교에만 익숙했던 원광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중국에는 실크로드를 타고 인도의 경전들이 속속 전해졌으며 내로라하는 고승들이 별처럼 많았다. 원광은 처음 금릉 장엄사에 머무르며 『열반경』과 『성실론』을 배우는데 전념했다. 이 절은 양나라 3대법사로 이름을 떨쳤던 승민 스님이 상주하며 후학을 지도했던 곳으로 공(空)사상의 본산격 되는 사찰이었다.

그러나 원광의 발걸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몇 년 뒤 다시 소주 땅으로 옮겨 호구사에 바랑을 내려놓은 원광은 그곳에서 『구사론』을 비롯해 『아함경』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가고 그의 앎과 정진이 깊어질수록 원광의 도(道) 또한 더불어 깊어졌다. 그리고 나중에는 모든 세사를 물리치고 호구산에서 푸른 하늘과 청량한 바람을 벗 삼아 일생을 마치고자 마음을 다졌다.

그러나 시대는 불세출의 도인을 산 속에만 머무르지 않도록 했다. 산 밑의 한 청신남(淸信男)이 경전을 강의해달라는 거듭된 간청에 마침내 원광은 법단에 올랐다. 대중들은 환호했다. 그의 강의는 글귀마다 해석이 명확했고 어떤 질문에건 물 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그의 명성은 들불처럼 번져 중국 전역에 원광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젊은 구도자들의 발길 또한 끊이질 않았다.

원광은 고승으로 추앙받았고, 이러한 소문이 신라에 전해지면서 왕실에서는 원광의 귀국을 요청했다. 이에 중국 황제는 칙명을 내려 원광의 노고를 치하하고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진평왕 22년(600) 신라로 돌아온 원광은 예전에 정진했던 삼기산에 머물며 임금과 신하들의 두터운 존경을 받으면서 그곳에서 대승경전을 강의했다. 특히 그를 찾아온 귀산과 추앙 두 젊은이에게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친구와 믿음으로 사귀고 △싸움에 있어 물러서지 않으며 △살생을 가려서 하라는 그 유명한 세속오계를 설했다.

그 후 원광은 인왕백고좌 법회도 개최했으며, 점찰법회 등을 통해 민중교화에도 힘썼다. 그러던 중 신라의 자존심을 한껏 높여준 위대한 별 원광은 89세가 되던 630년 파란만장했던 사바세계와의 인연을 접었다. 그가 단정히 앉아 입적할 무렵 절의 동북방 허공에는 음악소리가 가득했고, 절 안에는 신묘한 향기가 가득 찼다고 역사서는 전한다.

▷한국측 기록에는 13세에 출가한 것으로 나오고 중국측 기록에는 중국에 건너가 뒤늦게 출가한 것으로 나온다. 무엇이 맞나?

“신라에서 어린나이에 출가해 계를 받았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정진했다. 그러나 불교에 대해 깊이 이해한 것은 중국에 가서였다. 그런 이유로 중국에서 편찬된 『속고승전』에는 내가 중국에서 출가했다고 기록한 것 같다. 출가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다.”

▷왜 중국유학을 가기로 결심했나?

“당시 신라에는 경전도 그리 많지 않았고 내 덕이 없어서인지 뛰어난 선지식도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내 앎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당시 각덕 스님과 지명 스님이 중국으로 공부하러 간 것을 알았지만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삼기산에서 정진하면서 산중에서만 수행하면 나 자신에게 이로움은 있을지언정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을 돕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 중국 불교계의 동향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 온 스님들도 많이 활동했다. 거꾸로 법현 스님이 인도에 다녀오신 후에는 중국의 인도 구법승도 많았다. 그렇기에 당시 중국에는 수많은 경전이 유통됐고 불교사상이 활짝 꽃 피었다. 특히 삼라만상은 반드시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유식이론과 이에 의한 종교적인 실천을 강조하는 『섭대승론』이 크게 주목받았다. 다행히도 나는 수나라 문제(文帝)의 초빙으로 장안에 와있던 담천 스님으로부터 섭론종의 교의를 배울 수 있었다.”

▷중국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는데?

“동진(東晋) 이래로 260년 간 나뉘어 싸우던 중국이 수나라에 의해 통일될 무렵이었다. 나는 당시 양자강 유역 진나라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때 수나라 군대가 절로 쳐들어왔다. 나는 탑 앞에 묶여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였다. 그런데 수군 지휘관이 갑자기 달려와 내 목을 치려는 군인에게 칼을 내려놓으라고 했다. 그 지휘관은 ‘멀리서 보니 절과 탑이 불타고 있어서 달려와 보니 불이 나지 않고 내가 묶여있었다’고 했다. 부처님의 가피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이번 생에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계율에도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안다. 그런데 세속오계 중 임전무퇴와 살생유택은 불교의 근본사상과 상치되지 않나?

“『열반경』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사람은 칼과 활을 들고 비구를 수호해야 한다’고 언급돼 있다. 이것은 아마도 불법수호와 중생구제를 적극적으로 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귀산과 추항 두 젊은이가 평생의 교훈을 물어왔을 때 순간 고민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 시대는 하루도 싸움이 끊이질 않았고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이었다. 그런 때에 내가 불살생만을 강조했다면 그것은 공허한 이상론에 그쳤을 것이고 불교는 백성들의 현실과 괴리돼 뿌리 내리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나는 최선보다 차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게 세간의 삶이라면 최대한 적게 생명을 희생하고 그 희생에 마음 아파하고 참회할 것을 기대했다. 귀산과 추항의 죽음은 나로 하여금 피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러나 불교가 사회의 아픔과 현실을 외면한 채 독야청정 고고할 수 있겠는가.”

▷요즘 학교에서는 이 세속오계를 유불선 3교의 융합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정말 그런가?

“중국으로 공부하러 가기 전에 이미 주요 유교 경전을 익혔다. 하지만 나는 출가한 승려다. 이 세속오계 또한 불교의 사상에서도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상적 배경이 아니라 당시 신라사회에 적합했느냐 아니냐 일 것이다.”

▷스님으로서 수나라에 고구려를 쳐달라고 군사를 요청하는 걸사표를 썼는데 그 이유는?

“내가 걸사표를 쓰던 해에도 고구려와 백제는 번갈아 가며 국경을 침범하고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 대왕께도 말씀드렸듯 나를 위해 남을 없애 버린다는 것은 승려로서 할 짓이 아님을 잘 안다. 그러나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처지로서 바람 앞의 등불 같은 나라와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어찌 걸사표를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떤 학자는 스님이 점찰법회를 열었던 것과 관련해 신라의 무속신앙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분석한다.

“그건 오해다. 불교는 지식인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길흉화복을 점쳐 사람들로 하여금 수미산 같이 두터운 업장을 참회하고 하루 빨리 성불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점찰법회의 근거가 된 『점찰경』은 『기신론』의 여래장 교의와 다르지 않으며 지장신앙과도 상통한다. 또 나를 권력승이나 재력승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안다. 귀족을 교화하고 사찰의 재정을 위해 노력했던 것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속고승전』에서 평가하고 있듯 나는 단지 산승이었으며 일생 동안 가진 것은 오직 가사와 바리때뿐이었다.”

▷스님을 기점으로 한국불교사에서 수많은 고승들이 배출됐다. 후대 스님들 중에 특히 좋아하는 분이 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다수 스님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진리를 위해 살았던 분들이다. 어찌 좋고 나쁨이 있겠는가? 다만 내가 다시 살았다면 원효 스님이나 일연 스님, 그리고 경허 스님처럼 홀로 깨달음의 길을 가기보다는 몇 생을 늦추더라도 중생들의 곁에서 수행하고 불법을 펼쳤을 것이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속고승전』,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종원 『신라 최초의 고승들』, 이종찬·손병국 『우리역사인물전승』, 이기백 「원광」, 안계현 「원광-화랑의 윤리」, 「불교춘추」통권 12호, 신현숙 「정토교와 원광세속오계의 고찰」, 이종학 「원광법사와 세속오계에 대한 신고찰」 등





원광법사 어록

“자기가 살려고 남을 죽이는 것은 사문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대왕의 땅에 살면서 대왕의 물과 풀을 먹는데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삼국사기」
“육재일과 봄·여름에는 죽이지 않으니, 이는 때를 택하는 것이다. 가축을 죽이지 않음은 곧 말, 소, 닭, 개를 말하는 것이며, 잔 생물을 죽이지 않음은 곧 고기가 한 점도 안 되기 때문이니, 이는 대상을 가리는 것이다. 이처럼 꼭 필요한 것만 죽이되 많이 죽이지 않도록 하는 것을 ‘세속의 계(戒)’라 하겠다.” 「삼국사기」

찬탄 및 비판

“진·수 시대에 해동 사람으로서 바다를 건너 불도를 찾아간 자가 드물었고,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원광의 뒤를 따라 서학(西學)한 이들이 존경하는 마음을 금하지 못했으니 실로 원광법사가 구법의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일연 스님

“원광은 청계천으로 내려와 중생과 더불어 이익중생을 위해 살았다. 그 사상은 오늘날 새로운 지도 원리로 떠올라야 한다.” 민영규(학자)

“원광법사는 승려이면서도 호국이념과 국가관이 투철했다. 오늘의 경제 위기의 해법은 원광철학에 있다.” 김지견(학자)

“그는 국가사상과 현실과의 융합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주체사상을 사물의 행실보다 우위에 두었다. 불교나 불교의 교리만을 고집하지 않는 활달한 기풍도 매력을 풍긴다.” 이규태(언론인)

“세속오계는 한국불교의 굴절이다.” 서경수(학자)

“원광법사는 화랑들에게 살생유택(殺生有擇)의 계를 줌으로써 속인들의 ‘조건부 살생’을 긍정한 것이다.” 박노자(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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