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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숲에서 배운다

기자명 법보신문
일이 잘 풀려 나갈 때 멈추고 돌아봐야
참된 지혜는 ‘비움’을 통해 움트는 것


어제 오늘 그리고 요 며칠동안 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이른 아침 앉았다가 일어나 문득 문을 열어보면 시린 바람과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오감을 뚫고 들어 와 깊은 영감으로 생기로운 속 뜰을 적셔준다. 가을철 단풍이나 봄철에 갓 피어난 꽃도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에 못지 않게 앙상한 가지 위로 피어난 침묵의 보이지 않는 풍경도 내 안 깊은 곳에 깨어있는 종소리를 울리게 한다. 그래. 종소리. 문득 고개 들어 바라 본 자연의 소탈함에는 그 어떤 깨침의 종소리가 들린다. 분주하게 무언가를 하다가도 문득 아주 문득 바쁜 일들을 잠시 내려 놓고 보게 되면 그 풍경 너머의 화폭을 볼 수 있고 소리 너머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내 방 너른 창 밖으로는 떨어진 낙엽위로 하이얀 눈들이 여전히 소복하다. 겨울 숲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생기가 피어오르는 봄 숲이나 풍요로운 여름 숲, 그리고 오색의 가을 숲에서는 느끼지 못할 가볍고 말끔한, 소탈하고 가난한 수행자의 면모를 보는 듯 내 속 뜰은 맑은 비질을 한다. 겨울 숲이 아름다운 것은 이처럼 비움과 침묵의 내적인 수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겨울 숲의 침묵이 없다면 봄이 오더라도 새로운 꽃을 피워내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 삶의 길 위에서 한참 물이 오르며 꽃망울을 틔우고 훨훨 날갯짓할 때가 있어야 하겠지만, 이따금 침묵으로 안을 비추는 내적인 자기 수련의 시간이 필요하다. 한창 잘나갈 때가 있으면 그것을 끝까지 몰아갈 것이 아니라 한 번쯤 돌이켜 멈출 줄도, 쉴 줄도 알아야 한다. 삶에도 속도 조절이 필요한 것이다.

참된 지혜는 전진과 소유보다 멈춤과 비움을 통해 안으로부터 움트는 것이다. 이 침묵의 겨울도 이제 막바지에 접어 들었다. 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가던 길을 멈추고 가만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잠시 돌이켜 보라. 내가 걸어온 삶에는 얼마만큼 많은 멈춤과 비움, 그리고 나눔이 있었던가.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가면서 욕심과 집착을 채우고 소유를 늘리는 일에만 전력투구하지 않았는가.

사람의 깊이는 얼마만큼 성취했으며 얼마를 벌었고 어떤 위치에 올랐는가 하는 그런 채워진 양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존재의 깊이는 침묵과 비움 그리고 나눔의 깊이에 있을 것이다. 얼마나 내적으로 비우고 살았는가! 얼마나 외적으로 나누며 살았는가! 이 두 가지야말로 부처님께서 구족하신 지혜와 복덕의 양족이다.

저 고요한 겨울 숲의 침묵을 보면서 한 스님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오랜 선방 스님께서 어떻게 인연이 돼 도심 사찰의 주지 소임을 맡아 살다가 세속적인 시선에서 보면 한창 잘나가고 명성을 드날릴 때 홀연히 다 놓아 버리고 눈 내리는 겨울 숲 속으로 걸망 하나 걸머지고 떠나시던 모습. 그 뒷모습은 참자유인의 모습이었다. 스님의 삶에도 한겨울 침묵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영원하지 않고 잠시 피었다가 사라지는 데 있는 것처럼 우리들 삶도 오직 앞만 보고 달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때때로 멈추고 비우며 안으로 묵연히 침잠할 수 있는 겨울 숲의 침묵과 지혜를 배워야 한다.

법상 스님 buda1109@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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