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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사 조실 월운 스님과[br]한국사회연구소 이상현 이사장

기자명 법보신문
<사진설명>“상을 내지 않고 하심하는 자세로 사는 참불자”라고 이상현 거사를 소개하는 월운 스님.

“겸양지덕 실천하는
재가불자의 모범상”


“이보시오, 거사님. 뉘 신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그리 무심하신가. 허드레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가서도 두 번째 올 때는 ‘나 또 왔습니다’하며 눈인사라도 하는 게 우리네 인정인데, 어찌 그리 말 한마디 없이 가시나. 예불 끝났으면 공양이라도 하고 가시게나.”

1976년 봉선사 주지 소임을 맡게 된 월운 스님은 그야 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을 보내야 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던 봉선사의 사격을 다시 세우기 위한 중창 불사가 여전히 큰 과제로 남아있었을 뿐 아니라, 주지 소임을 맡고 보니 사중 어느 한 곳 스님의 손길이 소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일같이 계속되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유독 스님의 눈길을 끄는 거사 불자가 한 명 있었다.

종종 새벽예불에 동참하는 이 거사를 보아하니 지극심으로 예불을 올리는 것은 분명한데, 예불이 끝나고 나면 말한 마디 없이 종종 걸음으로 법당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절에 온 불자들이야 스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하고, 한두 번 얼굴을 익히고 나면 차도 마시고 공양도 함께 하기 마련 아닌가.

“그냥 몇 해를 두고 봤지요. 참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굳이 불러 세워 놓고 물어 볼 생각도 못했으니, 나도 참 무심했지. 그런데 하루는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에 가는 이를 불러 공양이라도 하시라고 말을 붙여보았어요. 그런데 이 거사님, 껄껄 웃더니 ‘괜찮습니다’하고 그냥 가는 거예요. 나중에 사무장을 통해서 그 거사님 이름이 이상현이라는 걸 겨우 알게 됐지 뭐예요.”

지금은 봉선사 조실로 주석하며 후학들의 귀감이 되고 있는 월운 스님은 20여 년 전 이상현 거사와의 만남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1960년대 중반, 은사인 운허 스님을 따라 봉선사와 인연을 맺고 평생을 봉선사 중창불사와 역경불사에 진력해 오며 많은 불자들을 만난 스님이지만 이상현 거사를 떠올릴 때면 아직도 궁금한 점이 많다.

20년전 첫 만남 아직도 ‘생생’

“그때나 지금이나 이 거사 집이 서울 관악구인데, 어떤 인연으로 이곳 봉선사까지 오게 됐는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생각해보니 지금껏 그걸 한 번도 안 물어 봤네. 허긴 이 거사가 워낙 말수가 적고 겸손해 몸을 드러내지 않은 탓도 있는 거야. 그런 이가 참 드물지.”

월운 스님만큼이나 이상현 거사도 당시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70년대 후반 미국에서 잠시 유학을 했던 이 거사는 당시만 해도 불교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유학 시절 불교에 관심이 많았던 한 친구 덕에 미국에서 처음 불교를 접할 기회를 가졌던 이 거사는 귀국 후 조계사에서 열리던 기초교리강좌를 통해 비로소 불교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런 세상이 있었구나 싶었지요. 미국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그저 불교가 뭘까 궁금증만 갖는 정도였는데, 막상 불교를 접하고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야말로 의지처를 얻은 기분이랄까요. 그때부터 서울과 경기도 인근의 사찰을 다니며 참배를 했는데, 그때 우연치 않게 봉선사 사무장님을 알게 됐어요. 83년으로 기억합니다. 처음 봉선사를 찾은 게.”

이 거사는 당시의 봉선사를 떠올리며 “맑고 깨끗한, 그러면서도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봉선사에 들어서니 마치 속진이 다 씻겨 나가는 기분 이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이 거사는 ‘스님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저 불교가 좋고 봉선사가 좋았을 뿐이다. 사무장의 배려로 가끔 봉선사에 하루씩 머물기도 했던 이 거사는 예불에 꼭꼭 참석했고 이런 이 거사의 모습이 월운 스님의 눈에 띈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꼭꼭 봉선사를 찾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분주히 살게 되더군요. 그래서 이런 저런 번잡한일 다 잊고 그동안 찌든 몸 추스르려 한 달에 하루 이틀씩 봉선사에 머물기 시작한 게 지금껏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사이 이 거사는 정계에 입문해 1996년에는 신한국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의정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조계종 25교구 신도회장을 맡은 것도 이 즈음이다.

“교구별 신도회 구성이 한창 진행될 때였는데, 내가 이 거사에게 맡으라고 권했지. 그런데 사람이 너무 겸손해서 그런지 그 나마도 두 해 전에 사임을 하더군요. 봉선사 불사 할 때마다 소리 소문 없이 많이 도와줬고, 특히 동국역경원에서 『선문염송』 발간할 때 비용이 모자라 쩔쩔 매고 있는데 나더러 한 사나흘 기다려 보라더니 선뜻 7000만원이라는 거금을 내미는 거예요. 덕분에 그 대작 불사가 무사히 마무리됐어요. 그런데도 저렇게 자리 욕심 없는 사람 참 드물지요.”

서로에게 “존경할 만한 이”라 지칭

월운 스님은 이 거사를 가리켜 “너무 얌전하고 겸손해서 탈”이라고 핀잔 아닌 핀잔을 준다. 그러면서도 “불자들이 모범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신행 활동에서도 손색이 없는 불자이기 때문이다. 이 거사는 매일 새벽 관악산 관음사를 참배하고 108배를 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하루를 되돌아보며 한 줄이라도 불서나 경전 읽기를 원칙으로 삼고 있다.

“월운 스님을 뵈면 언제든지 작은 책상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읽거나 쓰고 계셨습니다. 단 한 번도 하시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 스님을 보면서 참으로 열심히 사시는 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은 마음으로부터 존경하는 스승님이 되셨습니다. 저런 분을 가까이서 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합니다.”

이 거사에게 월운 스님은 언제나 든든한 마음의 의지처다. 기탄없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불교에 관한 것이나 세상사에 관해 무엇이든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여쭐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설명>“월운 스님을 떠올리면 언제나 마음이 든든해 진다”는 이상현 거사.

“큰 형님같이 든든한
마음 속 평생 의지처”


“스님을 떠올리면 왠지 ‘큰 형님’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경스런 말일지도 모르지만 제게 스님은 든든한 마음의 기둥이 되어주시고 있습니다.”

“이 거사야 말로 불자들이 본받을 만한 사람이지. 작은 일에 상을 내고 자리에 연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거사 같은 불자들이 많아야 불교가 잘 되는 거예요.”

한 평생을 살면서 마음으로부터 존경할 만한 이를 갖는 다는 것은 분명 행운이다. 서로를 가리켜 “존경할 만한 이”라고 지칭하는 월운 스님과 이 거사의 모습은 흰 눈에 쌓인 봉선사의 소담한 풍광만큼이나 보는 이들에게 푸근함을 전해주고 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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