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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자장법사

기자명 법보신문

“이 땅에 문수보살의 화엄불국토 세우려 했다”

가시덩굴 속에서
내가 닦은 백골관은
고도의 초기불교 수행

계율은 승단과 사회
청정케 만드는
시대 뛰어넘는 규범


자장(慈藏)법사의 성은 김 씨, 속명은 선종랑. 진한의 진골이었던 소판 무림의 아들이었다. 늦게까지 자식 하나 없던 선종랑의 부모는 천수관음께 지성으로 기도드린 뒤 별 하나가 떨어져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꾼 뒤 아들 자장을 낳았다.

진평왕 12년 무렵(590) 부처님 오신날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천성이 맑고 슬기로웠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겪어야 했던 부모와의 사별은 선종랑을 깊은 절망으로 밀어 넣었다. ‘왜 태어나면 죽어야 하나?’ ‘죽음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인간의 영원한 화두인 삶과 죽음의 문제에 직면한 선종랑에게 더 이상 세속적인 삶은 의미가 없었다. 가족의 눈물을 뒤로 한 채 홀로 산속으로 향한 그는 ‘진리를 알지 못하면 이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으리라’는 각오로 무섭도록 정진했다.

화백회의에 참여했던 최고의 귀족 자제인 선종랑이 수행의 길을 선택했다는 말에 왕은 그에게 재상으로 그를 기용하겠다는 명했다. 그러나 선종랑에게 고관대작은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계속된 권유에도 번번히 거절하는 그에게 왕은 명을 계속 어기면 목을 베리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에 그는 “내 차라리 계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년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에 왕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출가를 허락했고, 선종랑은 자장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수행자의 길을 걸었다. 선덕왕 7년(638)년 승실 등 문인 10인과 함께 당나라도 들어간 그는 먼저 문수보살이 머물러 있다는 오대산을 찾았다. 그곳에서 7일 동안 지성으로 기도하자 대성인이 나타나 그에게 ‘일체의 법은 모두가 자성이 없다. 법의 성품을 깨우치면 곧 노사나불을 보게 되리라’는 4구게와 함께 가사와 부처님의 발우 및 사리를 건네주었다.

그 뒤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들어간 자장은 당태종의 열렬한 환대를 받았고, 그곳 대중들을 위해 법문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장님이 자장의 설법을 듣고 눈을 뜬 후 그를 찾아와 계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매일 1000명이 넘었다. 자장은 태종의 허락을 받아 중국 화엄초조 두순이 머물고 있던 종남산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홀로 3년간 수행하던 자장은 643년 선덕여왕의 간곡한 요청에 신라로 귀국했고 이후 대국통을 맡아 선덕여왕을 적극 도왔다.

그는 황룡사 9층탑 건립을 건의해 짓도록 했으며 화엄이나 유식 등 새로운 불교사상을 알리고 계율을 통해 승단의 기틀을 세우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자장은 만년 오대산으로 향해 그곳에 절을 짓고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곳에서 입적을 맞았다. 그 때가 태종무열왕 5년인 658년 무렵이었다.

▷왜 출가를 결심했나?
“어렸을 때 매를 놓아 꿩을 잡는 사냥을 즐겨했다. 그런데 한 번은 잡힌 꿩이 눈물을 철철 흘리는 것을 보고 내가 지금까지 엄청난 죄업을 지어왔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낳아주시고 정성껏 길러주신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생사문제를 기필코 해결해야겠다고 발심했다.”

▷홀로 산속에 들어가 정진했다는데 어떤 수행을 했나?
“백골관(白骨觀)이다. 시체의 살점이 다 없어져서 백골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것을 관하는 일종의 위빠사나 수행이라 할 수 있다. 흔히 백골관하면 몸에 대한 탐착과 욕심을 없애는 염세적인 수행법으로만 알고 있는데 사실은 몸에 대한 자각을 통해 늘 깨어 알아차리고자 하는 고도의 초기불교 수행법이다. 백골관 수행이 이후 내 신앙과 수행의 토대가 되었다.”

▷혹독한 수행을 했다는데?
“당시 나는 죽을 각오로 정진했다. 좁은 방안을 온통 가시덤불로 채운 뒤 알몸으로 그 곳에 들어가 앉았다. 처음에는 조금만 졸아도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들고는 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몸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덮쳐오는 졸음을 이기기 힘들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다시 대들보에 끈을 묶어 머리를 넣은 채 정진했다. 하나의 게송을 듣기 위해 절벽에 몸을 날린 설산동자의 심정이었다.”

▷계율에 대한 관심이 큰 것 같은데?
“계율은 자신과 단체의 그릇된 행동과 악을 방지하는 것으로 출가자 뿐 아니라 국가와 사회를 도덕적이고 청정하게 만드는 시대를 뛰어넘는 규범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살계본을 강의하고 오계를 주었으며, 통도사에 금강계단을 만들고 스님들이 계율을 공부하도록 의무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스님은 율사이신가?
“계율을 올곧게 지키려 했고 계율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려 했지만 율사라는 명칭은 다소 어색하다. 훗날 일연 스님이 나를 소개하며 ‘자장이 율을 정하다(慈藏定律)’라고 제목을 붙였던 이유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일연 스님도 나를 율사로 부른 적이 없고 다만 승가의 규율과 의관제도, 연호 사율의 규율을 확정했기 때문에 제목을 그리 붙인 것 같다. 나는 오히려 화엄과 문수신앙을 믿고 알리려 했던 전법사다.”

▷중국 도선율사와는 어떤 관계였나?
“중국에 갔을 때 그 분을 만나 많은 것을 배웠고 신라 사회에 그 분의 계율정신을 정착시키려 했다. 그런데 그 분께서는 한참 후배인 나를 『속고승전』에 쓰셨으니 민망할 따름이다.”

▷정치문제에 깊이 개입한 것은 출가자의 본분으로부터 이탈한 것 아닌가?
“선덕여왕께서 보위에 오르시면서 대외내적인 상황이 극도로 악화됐다.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신라와 고구려는 수시로 쳐들어와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개 성을 빼앗아 신라는 말 그대로 존폐위기의 기로에 있었다. 여기에 당태종에 의해 제기된 여왕폐위론은 국내의 정치적 갈등을 유발했다. 나 홀로 청정하기보다는 왕을 도와 혼돈 속에서 불교의 이상을 구현하고 싶었다. ‘자기 홀로 착하기보다 바다와 같은 많은 사람들을 두루 구제함이 낫다’는 내면의 소리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이다.”

▷스님은 신라 고유의 복식과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의 복장제도와 연호를 사용하도록 했다. 이는 사대주의가 아닌가?
“내 것을 버리고 중국의 것을 따르자고 했고 실제 그 일이 실제 이루어졌으니 당연히 그 비판으로부터 나는 자유로울 수 없다. 다만 당시 당나라와 외교적인 문제를 풀지 않는 한 신라는 곧바로 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절박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나라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고, 또 그들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해서라도 그들과의 군사동맹을 이끌어낼 수 있게 하자는 건의를 했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사직 앞에서 취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런데도 왜 엄청난 재정과 인력이 투입되는 황룡사 9층탑을 건립했나?
“탑을 쌓으면 불보살님 가피로 외적의 침입이 그치고 태평성대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청량산 문수보살님으로부터 들었다. 풍부한 재정이나 군사력보다 백성들의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고 자긍심과 희망을 갖도록 하는 게 시대적인 과제였다.”

▷만년에 경주를 떠나 오대산으로 향한 이유는?
“무열왕께서 보위에 오르시면서 굳이 내 자문이 없어도 될 듯싶었다. 그래서 문수성지인 오대산을 찾아 그곳에 절을 짓고 기도를 열심히 해 문수보살님을 다시 한 번 친견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님은 남루한 옷을 입은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전한다. 왜 이런 설화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나?
“내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절실한 것은 계율과 정법의 선양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보다 크고 넓은 가치가 요구됐다. 그러다보니 후인들의 눈에는 전통적인 질서를 인정하며 개혁을 추구했던 내가 상대적으로 편협하게 비춰졌을 수도 있다. 또 계율을 고집해 신앙을 소홀히 했다거나 대국통을 지낸 탓에 서민불교·대중불교의 여망을 저버렸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래서 결국 나의 문수신앙 또한 결국 문수보살에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나는 주어진 여건속에서 내 시대에 충실하려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고 후회 또한 없다. 또다시 그런 상황이 주어진다 해도 이는 변함이 없다.”

▷스님이 살아생전 가장 역점을 기울인 것이 있다면?
“내 꿈은 신라를 불국토로 만드는 것이었다. 당태종은 선덕여왕을 폄하했지만 나는 그 분이 도리천의 딸이자 부처님 같은 크샤트리아로서 만백성을 아픔을 어루만져 주는 성군이 될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알리려 노력했다. 그리고 부처님의 사리를 모셔와 탑을 쌓고 이 땅이 바로 문수보살의 성지이며 부처님의 백성들임을 자각시키려 했다. 내 노력이 비록 수억 소털 중 하나에 불과할지라도 신라가 부처님을 가르침을 믿고 따르려는데 도움이 됐다면 내 삶을 바친 것에 털끝만큼의 후회도 없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속고승전』, 『삼국유사』, 김상현 『신라의 사상과 문화』, 신종원 『신라 최초의 고승들』, 이기영 「자장과 문수보살」, 안계현 「자장-호국이념의 율사」, 이기백 「자장의 최후」, 김영태 「화엄사상가로서의 자장법사」, 도업스님 「한국 화엄의 초조고-자장법사의 화엄사상」, 최완수 「황룡사 구층탑의 비밀」, 남동신 「자장의 불교사상과 불교치국책」, 박태원 「자장 사상의 기반-백골관 수행을 중심으로」 등




자장법사 어록

“내 차라리 계(戒)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년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吾寧一日持戒死 不願百年破戒而生).” 『삼국유사』

‘자기 홀로 착하기보다 바다와 같은 많은 사람들을 두루 구제함이 낫다’ 『봉안사리개건사암제일조사전기』


후대의 평가

“자장은 매우 근엄하고 조용하며 성실하여 조금도 윤리적인 과오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착실한 도인이었다.”(이기영·전 한국불교연구원장)

“자장은 화엄불국토를 이 땅에 세우려고 했던 위대한 화엄사상가였다.”(김영태·동국대 명예교수)

“위기에 부닥친 신라를 건지기 위하여 오직 불교를 바탕으로 하는 신념을 굳게 가지고 나아갈 자세를 마련하기에 힘쓴 이가 바로 자장이다.”(안계현·전 동국대 명예교수)

“삼국시대 신라의 불교 전체를 놓고 평가할 때는 아무래도 자장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이기백·전 한림대 명예교수)

“자장은 출신배경이나 행적으로 보아 계율의 보급과 불국토 건설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가장 잘 실천했던 인물이다.” (신종원·한국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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