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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원효대사

기자명 법보신문

중생과 더불어 해탈 노래 부른 뜻 아는가!

나는 스님 아닌 거사
자기 욕망의 분출을
무애라 변명 말라

요즘도 신라와 비슷
나를 칭송하기보다
중생의 아픔 감싸라


한국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이자 종교인으로 손꼽히는 원효(元曉, 617~686). 이 나라 불교의 새벽을 활짝 열어젖힌 그는 성과 속을 자유로이 넘나들던 무애도인이자 분열과 다툼을 종식시킨 화쟁의 달인이었다.

초지보살로 일컬어지는 원효는 그 탄생부터 신비롭다. 617년 어느 날, 유성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아이를 밴 한 여인이 경산 불지촌(佛地村)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런 산기를 느낀 그녀는 미처 집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밤나무 아래에서 아이를 낳았다. 이 때 새들은 노래하고 오색구름이 땅을 뒤덮었다 전한다. 부처님의 탄생 설화를 쏙 빼닮은 이 아이가 바로 원효다.

귀족가문에 태어난 원효의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 신라말로는 ‘새털’이었다. 어린 시절 화랑의 무리로 활동했을 서당, 전쟁의 피바람 속에서 일찌감치 삶의 무상함을 깨달은 걸까. 그는 소년의 나이에 군대의 문이 아니라 불가의 문을 두드렸다. 자기 집을 헐어 초개사라는 절을 짓고 열다섯 살 무렵 황룡사에서 출가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원효는 경전 하나하나를 섭렵해 나갔으며, 노자나 장자 등 외전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얼마 후 황룡사를 떠나 깊은 산 속에 거처를 잡은 그는 「발심수행장」의 구절처럼 나무열매로 주린 창자를 채우고, 흐르는 계곡 물로 갈증을 달래며 정진했다.

그에게는 일정한 스승이 없었다. 반야공관과 아미타신앙에 정통했던 혜숙, 법화경에 조예가 깊었던 낭지, 고구려 승려로 열반경의 대가였던 보덕, 승조의 후신이라던 혜공 등 선지식은 물론 신라의 산천초목 모두가 원효의 스승이었다.

그렇게 20여 년, 여전히 진리에 목말라 하던 원효는 당시 많은 승려들이 꿈꾸었던 당나라 유학의 길에 올랐다. 한국불교사에 길이 남을 또 하나의 별 의상과 함께였다. 이들은 처음 뺏고 빼앗는 격전지를 가로지르며 요동까지 갔으나 결국 돌아와야 했고, 이번에는 뱃길로 가기 위해 당항성을 향했다. 그러나 운명이었을까. 폭우를 피해 하룻밤 머무른 고분에서 감로수처럼 마셨던 물이 해골물임을 알고는 모든 것을 토하고 말았다. 일순간 원효는 마음이 생기면 온갖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동굴과 무덤이 둘이 아닌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원효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동안 남아있던 의문이 장막 걷히듯 깨끗이 사라진 것이다.
의상과 헤어져 신라로 돌아온 원효는 저술에 몰두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태종무열왕의 둘째딸인 요석공주와의 로맨스, ‘유학의 종장’이라는 설총을 낳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후 원효는 승복을 벗고 스스로를 소성(小性)거사라 낮추며 거리로 나섰다. 광대의 복장을 입고 불교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사람들에게 가르쳤고, 술집, 대장간, 기생집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 등 100여부 240권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기었다. 그는 진정 거리의 성자이자 천부적인 사상가였다.

그렇게 한 평생 보살의 길을 걸었던 원효는 신문왕 2년(686) 3월 아들 설총이 지켜보는 가운데 위대한 삶을 마무리하고 피안의 나루터를 향해 고요히 눈을 감았다.

▷왜 당나라 유학을 포기했나?
“요즘 사람들이 체계적인 공부를 위해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을 가는 것처럼 당시 나도 17년간의 인도구법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현장법사에게서 마음의 도리에 대해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무덤에서의 하룻밤을 지내면서 온갖 법은 오로지 인식하기 나름이라는 ‘만법유식(萬法唯識)’의 유식학 핵심 이치를 깨달았다. 해외파라는 이력이 필요한 것도 아닌 만큼 당나라에 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잃은 것이 타이틀이라면 얻은 것은 마음이었다.”

▷일부에서는 스님과 의상대사를 라이벌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의상 스님은 나보다 10여 년 연하지만 내가 존경하는 벗이다. 특히 그는 내가 새로운 학문 경향에 관심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곳에서 많은 서적을 보내주었다. 우리는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해 주었다. 그러나 그 분은 호방한 나와 달리 조용하고 단아했다. 철저한 수행자의 길을 걸었던 그 분이 훗날 수행자의 사표가 된 것은 당연하다. 화쟁을 강조했던 나와 한없이 겸손했던 의상스님을 라이벌로 규정하는 것은 후세 사람들이 만들어낸 얘깃거리일 뿐이다.”

▷신라로 돌아온 후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고승이 됐는데 왜 파계를 했나?
“유학길에서 돌아온 후 나는 경전을 주석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화엄경소』를 찬술하던 중 지금까지 보살이 닦아온 모든 자리행(自利行)과 이타행(利他行)을 일체중생에게 돌려 그들을 제도함으로써 자기 자신도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간다는 내용을 읽고 깊은 고민끝에 마침내 붓을 꺾었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는 경전의 구절처럼 ‘귀족출신’이라는 허명, ‘고승’이라는 허울을 벗어야 함을 알았던 것이다. 나는 명예를 버린 대신 민중의 마음을 얻었다.”

▷아직까지도 일부 스님들이 자신들의 파계 행위를 스님의 무애행과 요석공주와의 관계를 연결하면서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 책임이 스님에게도 있는 것 아닌가?
“계율은 욕망을 제어하고 나와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한 장치일 뿐 불변의 법칙이 아니다. 나는 나를 위해 요석공주를 찾아가지 않았고 나를 위해 무애가를 부르며 뒤웅박을 두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정해진 틀에서 벗어난 이상 나는 더 이상 스님으로 자처하지 않았으며 이후 거사로서 살았다. 계율이라는 틀은 벗어나면서도 스님이라는 틀을 고집하거나, 자기 욕망의 분출을 무애라 변명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합리화 될 수 없다.”

▷설총은 스님의 아들임에도 불교보다는 유교에 더 깊은 조예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정작 아들은 교화하지 못한 것 아닌가?
“나는 불교를 추구했던 게 아니라 진리를 추구했다. 유교를 고려, 조선의 대립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는다면 유교 또한 불교와 상생하는 또 하나의 길이다. 중요한 것은 설총이 유교를 통해 정치가 올바르게 이뤄지도록 노력했고, 이두를 체계화함으로써 많은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아들이 걷고자 했던 길은 내 길과 둘이 아니다.”

▷고려시대에 대각국사의 형인 숙종은 스님에게 ‘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릴 정도로 스님께서 화쟁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이유는?
“내가 살고 있던 시대는 삼국의 극심한 대립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전쟁이 일어날 정도의 혼란기였다. 또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대립하고, 이를 해소하려 노력해야 할 불교계마저 신·구역불교로 대립각을 세웠다. 대립과 갈등만큼 인간을 황폐화 시키는 것도 없다. 화쟁은 이론이 아니라 서로 상생하는 실천적인 원리다. 그 토대는 생명에 대한 외경과 자비심이다.”

▷『삼국유사』에는 스님이 가난한 소년 사복만큼도 못하게 등장하고, 또 의상 스님처럼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러 낙산사로 가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등 스님에 대한 얘기가 전한다.
“『삼국유사』 곳곳에서 내가 다소 바보스럽게 표현되는 것은 내가 낙산사 등 설화의 주인공이 아니고 조역인 이상 윤색과 희극화는 당연하다. ‘원효’라는 이름에 매달리지 말고 그 설화가 주는 교훈에 주목하라.”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오늘날 이 나라는 남북으로 분열되고 지역으로 분열되고 빈부로 분열돼 갈등과 대립을 반복하고 있다. 또 헛된 욕망의 충족을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화쟁의 의미를 불교학에서 찾을 게 아니라 세상사에서 찾으라. 나의 사상을 칭송하기보다 바람 부는 세상의 거리로 나서 사람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황량한 마음의 밭에 씨를 뿌리라. 이게 우리가 가야할 보살의 길이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속고승전』, 『삼국유사』, 김상현 『역사로 읽는 원효』, 남동신 『원효』, 장휘옥 『자 떠나자 원효 찾으러』, 불교전기문화연구소 『원효 그의 위대한 생애』·『원효사상의 현대적 조명』, 이기영 「사회병리의 치유-원효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등


원효대사 어록

“어젯밤에 잘 때는 동굴이라 여겨서 편안했는데, 오늘밤 잠자리에는 귀신 소굴이란 생각에 저주가 많구나. 그러니 알겠도다. ‘마음이 생기면 온갖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동굴과 무덤이 둘이 아니며, 또 이 세상은 오직 마음에 달렸으며, 온갖 법은 오로지 인식하기 나름인 것을’ 마음 밖에 법이 없거늘 어찌 밖에서 구하리요.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노라.” 『송고승전』

“대해에는 일정한 나루가 없지만 배를 띄우고 노 저어 능히 건널 수가 있고, 허공에는 사다리가 없지만 날개를 펄럭이며 능히 날 수가 있다. 문 아닌 것이 없기에 일일마다 현현한 곳에 들어가는 문이요, 길 아닌 것이 없기에 곳곳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본업경소』

“부서진 수레는 갈 수 없고 노인은 닦을 수 없는데, 누우면 게으름이 생기고, 앉으면 어지러운 생각만 일어난다. 몇 생을 닦지 않고 세월만 헛되이 보냈으며, 그 얼마나 헛되이 살면서 평생을 닦지 않는가. 이 몸은 반드시 끝이 있는데 몸을 버린 뒤에는 어찌할 것인가. 급하지 아니하며, 급하지 아니한가.”『발심수행장』


후대의 찬탄

“오직 우리 해동보살만이 성(性)과 상(相)을 융합해 밝혔으며 고금의 잘못을 바로잡고, 백가의 다투는 실마리를 화합시키고 일대의 지극히 공정한 논을 얻으셨다.” 대각국사 의천

“각승은 처음으로 삼매경을 열었고, 표주박 가지고 춤추며 온갖 거리 교화했네. 달 밝은 요석궁에 봄잠 깊더니 문 닫힌 분황사엔 돌아보는 모습만 허허롭네.” 보각국사 일연

“원효의 화쟁과 원융과 무애의 사상은 신라를 벗어나고 한반도를 벗어나서, 당시의 전세계를 뜻하는 동아시아를 관통하는 사상이었다.” 가마다 시게오(일본 도쿄대 명예교수)

“원효는 존경받던 고승이면서 환속한 거사였고, 뛰어난 사상가이면서도 실천적 행동인이었다. 그에게는 일정한 범주가 없었고, 굴레도 구애도 없었다. 그는 해방자였고 자유인이었다.” 김상현(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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